115화 황당하기 그지없다
영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표정과 같이 심드렁하게 느껴졌다.
“평양 공주의 옆에 앉은 사람은 평양 공주의…… 노리개입니다.”
‘노리개’이라는 세 글자가 입속에서 맴돌다가 결국 튀어나왔다.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풉!
사람들은 음미하던 차와 마시던 술을 뿜었다.
대전 안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젊은 공자들은 물을 뿜었고 궁녀들은 재빨리 그것을 치웠다.
아무것도 마시지 않은 사람들은 굳은 얼굴로 하얀색 장포를 입은 잘생긴 공자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노리개?’
줄곧 말없이 있던 종친 귀족 소저들도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준수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은 불을 뿜을 것처럼 이글거렸다.
‘노리개? 저렇게 훌륭한 공자가 노리개라고? 평양 공주도 참…… 너무하잖아!’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평온한 눈길로 영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영린은 눈을 깜박이며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노리개라고요?”
영가도 놀란 듯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이름이 뭔지도 모른다는 말이에요?”
그러자 이번에 대답한 사람은 묵백이었다.
“이 공자는 저와 성이 같습니다. 이름은 ‘수(修)’, 외자지요.”
‘묵수?’
영가는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전의 사람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방금 황제가 버럭 화를 낸 것에 아직 겁을 먹고 있는지라 노리개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더 이상 감히 평양 공주를 건드리지 못했다.
황제의 앞인데 어찌 평양 공주를 건드리겠는가.
‘이 노리개는 왜 묵백 대인과 성이 같은 거지? 묵백 대인과 무슨 사이인가? 정말 그렇다면 더욱 건드려서는 안 돼. 폐하와 평양 공주는 물론이고, 묵백 대인에게까지 밉보인다면 정말 큰 일이야.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겠군. 다른 건…… 그래, 됐어,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겠어?’
“묵 공자의 이름은 참으로 듣기 좋네요.”
심운미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투에서는 불만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공주 전하가 노리개를 들였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군요.”
예로부터 흔한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황당하기 그지없고 윤리와 도덕을 어긴 일이었다!
‘삼종사덕(三從四德)을 따라야 하는 여인에게 무슨 노리개라는 말인가? 그것도 궁의 연회처럼 중요한 자리에 노리개를 데리고 나온다는 자체가 참으로 창피한 일이 아닌가?’
신하들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들은 악독한 말로 평양 공주의 죄행을 호되게 꾸짖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지만 겉으로는 약간의 언짢음도 내비칠 수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내색하지 못하고 속으로 욕을 퍼붓는 게 다였다.
대전 안에서 그나마 제일 침착한 것은 섭정왕부의 영묘언이었다.
그녀는 황제의 소개를 들었을 때, 흠칫 놀라기는 했지만 곧 진정했다.
‘능묵은 능묵이지, 묵수는 무슨.’
그녀는 야홍릉의 인품을 알기에 능묵이 노리개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다만 능묵을 이렇게 소개한 황제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언니를 넘볼까 봐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건가? 하지만 언니의 성격으로 보면 동제 귀족 공자 중에서 감히 언니를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능묵.”
야홍릉은 찻잔을 들고 천천히 마시며 능묵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인간이 하는 헛소리 듣지 마.”
능묵은 야홍릉에게 줄 포도 껍질을 바르느라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그러면서 드러난 하얀 목덜미가 유난히 유혹적으로 비쳐졌다.
무복(舞服)을 입은 미인들이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가벼운 발걸음과 하늘거리는 옷소매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무녀들은 허리를 움직이며 우아하고 부드럽게 춤을 췄다.
잔잔한 사죽 소리와 함께 연회의 분위기는 한참 무르익어갔다.
“주인님.”
능묵은 껍질을 바른 포도를 야홍릉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른 뒤,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흔쾌히 주인님의 노리개가 되고 싶습니다.”
야홍릉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능묵은 시선을 내리깔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기다란 속눈썹으로 속마음을 감췄다. 지금의 그는 유순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노리개가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야홍릉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대전에 울려퍼지는 사죽 소리가 그들의 말소리를 덮었다.
대전의 대신들은 수시로 시선을 그들에게 보내왔다. 마음속으로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들이 뭘 하는지 궁금한 듯했다.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공손하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훤칠한 그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니 듬직하게 느껴졌다.
그의 싸늘하던 눈매에도 한기 대신 따뜻한 분위기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동자와 검고 짙은 속눈썹, 조각 같은 이목구비, 어디로나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남자였다.
거리가 가까운 탓에 야홍릉은 능묵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능묵은 그녀의 시선을 받자 긴장한 나머지 입술에 힘이 들어가고 무릎 위에 놓인 두 손도 자꾸만 떨리기 시작했다.
야홍릉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시선을 거두고 차를 마셨다.
대신들은 아까부터 조용해졌다. 그들은 짐짓 점잖게 무녀들의 춤 자태를 구경했다.
영린은 널따란 좌석에 기대앉아 기다란 손가락으로 백옥 술잔을 든 채, 우아하게 술을 마셨다. 그의 입꼬리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검은 장포를 입은 묵백도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에게서는 풍류스러운 멋짐이 흘러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사람들은 황제와 묵백을 보면서 평양 공주에게 도대체 어떤 특별한 점이 있기에 그들이 이렇게 특별 대우를 하는지 짐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특별한 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밤이 점점 깊어졌다.
어둠의 장막이 황궁에 드리우자 사람들은 각자 생각에 잠겼다.
조용히 앉아 있던 영묘언은 누군가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시선을 돌렸다. 황족 종친에서 실권이 없는 왕의 손녀, 영형(榮馨)이었다.
그녀는 올해 열다섯 살 정도였다.
영묘언이 물었다.
“언니, 왜 그래요?”
영형은 고개를 들이밀고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평양 공주 옆에 앉아 있는 공자 말이야. 정말 공주 전하의 노리개야?”
영묘언은 눈을 깜박이더니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형의 마음을 한눈에 꿰뚫어 볼 것 같은 눈빛이었다.
“언니, 혹시 저 공자에게 관심이 있어요?”
영형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뿐이야.”
‘궁금해서 물어볼 뿐이라고?’
영묘언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언니, 궁금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저 사람 평양 공주의 노리개가 맞으니까.”
황제가 이렇게 소개하기도 했고 능야와 능묵도 반박하지 않았으니 그녀도 굳이 아니라고 할 생각이 없었다.
영형의 표정에 아쉬움이 드리웠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네.”
“언니, 지금 뭐라고 했어요?”
영묘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누가 돼지이고 누가 진주 목걸이라는 거예요? 여기에 돼지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영형은 표정이 변하더니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묘언아, 왜 이렇게 흥분해? 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면 안 되죠.”
영묘언이 차갑게 말했다.
“언니의 신분을 잊지 마요. 이런 말은 언니의 신분에 맞지도 않고 황족의 존엄에도 금이 가는 말이에요.”
영형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 찻잔을 들고 어색한 표정을 숨기느라 애썼다.
“아, 알았어…….”
영형도 영묘언과 같은 군주였다. 다만 영형의 조부가 실세를 잃은 덕에 그녀는 영묘언보다 두 살 많았음에도 이름뿐인 군주였다.
실제로는 귀족 소저들조차 그녀보다 훨씬 잘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영묘언은 섭정왕의 딸인데 누가 감히 그녀와 맞서겠는가?
하지만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혼나자 영형은 민망한 나머지 내심 불만이 생겼다.
‘왜 남의 일에 이렇게 진지해?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폐하께서 직접 정무를 보시게 되면 너희 섭정왕부가 며칠이나 갈 것 같아?!’
영묘언은 그녀의 속생각을 읽을 수 없었지만 기분이 나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관이 없었다.
‘누구든 능야 언니의 욕을 한다면 난 맞서 싸울 거야!’
시선을 들어 야홍릉의 방향을 바라본 그녀는 능야와 능묵이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신분만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공자들 중 문관이나 무장을 막론하고 능묵에 견줄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다는 말인가?
‘흥, 여기서 능야 언니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대전에 있는 남자들은 말만 잘하고 우쭐거리는 능력만 강했지 하나같이 겉만 번지르르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을 여장부 능야와 붙여놓으면 두들겨 맞기만 할 것이다.
‘이 신하들 좀 봐. 어제까지 씩씩거리며 폐하를 뵈려고 하더니 지금은 찍소리 못하고 속으로 능야 언니 욕이나 하잖아. 그러면서 겉으로는 불만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겁쟁이들!’
영묘언은 이렇게 생각할수록 의기양양해졌다.
‘곱게 자란 이 귀족 공자들은 능야 언니에게 혼 좀 나야 해. 안 그러면 정말 자신이 잘난 줄 안다니까. 제멋대로 굴고 사람들을 마구 괴롭히고 말이야.’
술자리 분위기가 무르익자 악기 소리를 제외하고 대전 안은 고요해졌다.
대신들은 술을 마시면서 춤을 구경하다가 수시로 황제 쪽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바로 옆에는 싸늘한 인상의 평양 공주와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준수한 청년이 보였다.
둘의 행동은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기만 했다.
청년은 전혀 불만 없이 공주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사람들은 청년이 원해서 저러는지, 아니면 핍박에 못 이겨서 저렇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원한 거라면 세상 남자들 중 여인의 노리개로 되고 싶은 사내가 몇 명이나 있다는 말인가?
밤이 깊어졌다.
영린은 의자에 기댄 채, 떠들썩한 광경을 덤덤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는 아래쪽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 변화와 시선이 향하는 곳을 모두 지켜보았다.
옅은 색의 입꼬리가 비웃는 것처럼 씨익 올라갔고 눈에도 한기가 감돌았다.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영가는 대전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장공주여서 다른 사람들보다 신분이 더 높았고, 황제의 친누이였기에 충분히 먼저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연회 중간에 퇴장하자, 사람들은 또 제멋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