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화를 낼 필요도 없다
영린은 찻잔을 들고 우아하게 한 모금 마셨다.
기다란 손가락에서 귀티가 흘렀고 느긋한 행동에서는 여유로움이 비쳤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후께서는 요새 몸이 좋지 않으셔서 쉬겠다고 하셨습니다.”
대전은 또 미묘한 정적에 잠겼다.
몇몇 대신들은 연회의 자리를 빌려 태후에게 새 공주가 위 국구에게 한 만행을 고자질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태후의 얼굴조차 뵈지 못하자 그들은 실망스럽기도 했고 화도 났다.
조기헌은 대전 위의 여인을 분노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폐하, 평양 공주는 오늘 위 국구를 쓰러뜨렸습니다. 위 국구는 지금 몸 곳곳이 골절되어 의식을 되찾지도 못했습니다. 평양 공주의 악랄한 수단에 저희는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폐하께서 위 국구의 상황을 헤아려 주십시오.”
그의 말에 대전은 또 한 번 정적에 잠겼다.
위녕은 영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지만 황제와 장공주의 외삼촌이자 태후의 친동생이었다.
그런 그가 다쳐서 누워 있으니 이유가 뭐든 황제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영가는 시선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대전 위를 바라보았다.
조기헌이 말을 마친 뒤에도 야홍릉은 시선을 내리깔고 새하얀 손가락으로 찻잔을 들었다. 어여쁜 그녀의 얼굴은 싸늘할 만큼 무덤덤했다.
지금의 상황에 당황하거나 겁을 먹은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눈썹도 꿈틀대지 않았다.
‘참 한결같이 평온한 사람이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영가는 그녀의 옆에 꿇어앉은 소년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이 잘생긴 소년에게서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느껴졌다.
“평양 공주가 위 국구를 쓰러뜨렸다고?”
영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무표정한 시선이 조기헌의 얼굴에 닿았다.
“짐이 잘못 기억한 게 아니라면 어제 아침에 평양 공주로 책봉한다는 성지를 내린 것 같은데. 아닌가?”
조기헌은 당황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영린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린은 웃고 있었지만 예쁘게 휘어진 눈에는 차가운 한기를 뿜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자네 셋이서 평양 공주부로 가서 평양 공주를 도발하고 심지어 말로 모욕을 주었다지?”
이 말에 조기헌과 후소우는 표정이 확 변했다.
“폐하!”
조기헌은 다급히 무릎을 꿇으며 급박한 어조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희는 그저 평양 공주께 축하를 드리러 갔을 뿐, 모욕한 적이 없습니다. 폐하,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중 분명 나쁜 마음을 먹은 자가 사실을 왜곡하고 이간질을…….”
“말을 잘하는군. 평소 글공부를 꽤 열심히 한 것 같소.”
영린은 입꼬리를 올리고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표정은 온화하기만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 아침에 평양 공주부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준 사람은 평양 공주가 아니라 궁중 암위요!”
조기헌은 얼굴이 굳었다.
조 군왕이 벌떡 일어나더니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제 아들이 철이 없어서…….”
“철이 없긴 했지.”
영린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사내 셋이서 여인 한 명을 괴롭히러 집까지 찾아가다니. 짐이 동제 귀족 공자의 성품과 수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더군.”
그 말에 조기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짐이 직접 책봉한 공주이고 섭정왕의 허락도 받았지. 그런데 거위가 봉황이 되었다며 평양 공주를 모욕하였지. 조기헌, 이렇게 말한 게 맞소?”
영린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경들은 공주 책봉에 불만이 있는 것이오? 아니면 이 핑계로 짐과 섭정왕에게 불만을 표하는 것인가?”
그의 말이 끝나자 대전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대전의 사람들은 안색이 확 바뀌었다.
장공주 영가와 군주 영묘언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며 무릎을 꿇었다.
“폐하, 부디 노기를 가라앉혀 주십시오.”
조 군왕도 무릎을 꿇고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기헌은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무기력하게 바닥에 주저앉아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사내 셋이 여인 한 명을 도발하러 갔으면서 실력이 모자라 얻어맞고는 무슨 낯짝으로 고자질을 한다는 말이오?”
차갑게 웃는 영린의 목소리는 서리가 낀 듯 차갑기만 했다.
“인품, 수양, 이 중 하나도 갖춘 게 없으면서 뻔뻔스럽게 고자질을 하는 것이오? 동제 귀족의 체면이 경들 때문에 다 깎였겠소.”
대전 내부는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흠칫 놀라 몸서리를 쳤다.
그들은 황제에게 혼나고 있어서 겁을 먹은 게 아니었다. 소년 황제에게서 전에 느껴보지 못한 압박감을 느꼈기에 당황하고 있었다.
영가도 황제가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열세 살의 소년이 언제부터 이렇게 강한 제왕의 위엄을 부릴 수 있었다는 말인가?
대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조기헌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창백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가 예상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황제가 평양 공주를 책봉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도, 평양 공주가 정말 그럴 만한 사람인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그녀를 감싸느라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 몰랐다.
심운미와 후소우, 위녕과 조기헌은 항상 황제의 오른팔이라고 자부해 왔다.
그중 후씨 가문과 조씨 가문의 아버지는 아직 조정에서 재직 중이었고 선황 시기에 신임을 받아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권신이었다.
영린이 황위에 오른 뒤, 섭정왕이 조씨 가문과 후씨 가문의 권력을 앗아갔다.
그들은 황제가 직접 정사를 본 뒤에 가문이 다시 예전의 권력을 되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들의 눈에는 섭정왕이 황제의 적이고 대세가의 적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니, 오늘이 아니고 언제부터인가 황제는 섭정왕 얘기를 할 때도 전처럼 화를 내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당장 공주 책봉의 일만 해도 그랬다. 황제와 섭정왕의 의견은 같지 않았는가?
그들은 처음에 황제가 섭정왕의 협박을 받아 하는 수 없이 평양 공주를 책봉한 줄 알았으나, 오늘 얘기를 들어 보니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제왕의 위엄으로 무장한 소년은 사람들을 겁에 질려 떨게 했다.
이런 소년이 다른 사람의 협박을 받고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폐하.”
심운미가 정적을 깨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위 국구가 다친 것은 큰일이라 조 세자와 후 세자가 급한 마음에 그렇게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아침에 그들 셋이 평양 공주를 찾아가 도발한 것은 그들이 잘못한 것이 맞으나 신은 이 일 또한 그저 젊은이들 사이의 말다툼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양 공주께서는 처음에 남장을 하고 다니셔서 그들도 공주 전하를 바로 연약한 여인으로 의식하지 못해 이런 일이 생긴 듯하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위쪽에 앉아 있는 야홍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위 국구도 제대로 혼났을 것입니다. 평양 공주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화를 푸시고 지금처럼 넘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화를 풀라고?”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난 그들에게 화를 낼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오. 승상이 괜한 생각을 하는군.”
야홍릉은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에게 도발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상대해 주지만 그들에게 화를 낼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심운미는 말문이 막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공주 전하, 참으로 마음이 너그러우십니다.”
‘마음이 너그럽다고?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 위 국구를 그 지경이 되게 패?’
신하들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야홍릉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겠지만 입으로는 한 글자도 내뱉지 못했다.
다시 황제의 분노를 불러일으킬까 두려웠다.
영가는 시녀에게서 젖은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은 뒤, 입을 열어 분위기를 돌렸다.
“폐하, 오늘은 평양 공주를 위한 연회이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괜히 분위기만 흐리겠어요. 위 국구가 먼저 잘못한 거니 다친 것도 본인이 자초한 거죠. 그러나 앞으로는 다들 평화롭게 지내길 바라요.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두고 오늘 뒤로 다들 친구가 되면 되지요.”
영린은 입술을 실룩거렸다.
‘친구라고? 원수가 아닌 것만 해도 어디야? 친구는 무슨.’
그러나 그도 이 대신들과 대신들의 아들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몇 마디의 말로 자신의 위엄을 보여주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 직접 정사를 보지 않았지만 이들이 함부로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그 상대가 외삼촌이면 또 어떤가?
외삼촌이면 어른답게 굴어야지 사고를 쳤으면서 외조카더러 뒷수습해 달라는 게 말이 되는가?
“됐소. 다들 일어나시오.”
영린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오덕해(吳德海), 잠시 뒤에 태의원에 가서 국구의 상황이 어떤가 물어보고 태의더러 잘 치료하라고 하거라. 몸에 좋은 약재는 아끼지 말고 다 가져다주라고 하고.”
이는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함이었다.
무섭게 호통을 쳐 대신들의 기를 누르고 제왕의 위엄을 보여줘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뒤, 작은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하여 갈등을 풀고 조씨 가문과 후씨 가문의 불만을 묵살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장난으로 평양 공주를 책봉한 게 아니며 황제가 그녀를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황제를 제외하고도 섭정왕 역시 신임 공주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러니 앞으로 그 누구도 평양 공주를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의미였다.
대신들은 황제의 뜻을 파악하고 평양 공주와 그녀를 감싸는 황제에게 불만이 많았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은 감사를 표한 뒤, 자리에 앉았다.
황제가 곧 정사를 보게 될 텐데, 그와 섭정왕 사이의 관계는 점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그들은 정력을 조정 대사에 돌려야지 여인 한 명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평양 공주는 다들 알게 되었으니 폐하께서 평양 공주의 옆에 앉은 분을 소개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영가는 시선을 들고 야홍릉의 옆에 앉은 청년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얼굴이 낯서나 외모가 출중하고 분위기가 뛰어난 분이시네요. 평양 공주와는 어떤 사이인지 궁금한데요.”
그녀의 말에 대전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고개를 들고 하얀색 장포를 입은 청년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