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태후 납시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묵백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황자가 다른 나라의 영위로 들어가는 걸 원했다고?”
‘이 무슨 황당한 소리야?’
“맞습니다. 제가 입증할 수 있지요.”
영린이 씩 웃으며 말했다.
“황당하게 들리는 것은 이해하나 사실입니다. 이유는…”
영린은 멈칫하더니 시선에 드리운 감정을 숨기고 다시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씩 웃으며 말했다.
“이유는 공주 전하께서 직접 생각해 보시죠.”
말을 마치자 영린은 능묵의 얼굴에서 긴장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평소의 무덤덤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발견했다.
능묵은 겉보기에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으나 그래도 나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스스로 원한 거라고?’
이 말 한마디에 수많은 가능성이 떠올랐다.
아까 야홍릉이 생각한 것처럼 황위를 다투려고 황자들이 서로 음모를 꾸미며 형제를 해친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황자가 어떤 목적에 이루기 위해 직접 다른 나라에 잠적한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능묵이 한 행동으로 판단하면 능묵이 다른 마음을 품고 그녀에게 일부러 접근한 것 같지 않았다.
‘이 이유도 아니라면…….’
야홍릉은 한참 침묵을 지켰다.
마음속으로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자 그녀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능묵이 신은전으로 들어간 진짜 이유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들은 게 아니니 그녀는 믿기 어려웠다.
“능묵.”
그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연회가 끝난 뒤, 궁에서 며칠 묵고 오너라.”
능묵은 안색이 확 변했다.
“난 더 생각하고 싶지 않고 또 궁금증에 시달리며 지내고 싶지 않구나.”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밝혀질 일인데 미리 알면 좋잖느냐.”
능묵은 굳은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다 한참 뒤에 물었다.
“그…… 그럼 주인님도 이곳에 계시면 안 됩니까?”
묵백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영린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전 안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직 후궁이 없어 궁에 빈 궁전이 많거든요. 지낼 곳은 충분합니다.”
능묵이 야홍릉더러 함께 궁에서 지내자고 한 것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녀가 궁 밖에서 위험에 처할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가라앉힐 수 없는 그의 불안감 때문도 있었다.
야홍릉이 옆에 있다면 그는 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는 야홍릉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야홍릉에게 기대게 되었다.
그는 호국 공주부에 들어간 뒤로 야홍릉과 떨어진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야홍릉과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매일 야홍릉과 함께 붙어 있고만 싶었다.
야홍릉은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돌리고 묵백을 바라보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건 공주 전하의 뜻에 달렸지요. 공주가 원하시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궁에 며칠 묵…….”
“태후마마 납시오!”
바로 이때, 음을 길게 빼는 내관 특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넷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궁문 밖에서 시녀들이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렸다.
“태후마마를 뵙습니다! 마마, 만수무강 하십시오!”
영린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묵백을 바라보았다.
“어마마마가 왜 오셨지?”
묵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도 모르는 눈치였다.
위녕이 중상을 입은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겠으나 황제의 친어머니인 태후는 이 황궁에서 어서방과 근정전을 제외한 곳은 모두 갈 수 있었다.
딱히 황제가 감금령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오신 것은 무슨 소식을 들으신 듯한데.’
화려한 옷차림을 한 태후는 가마에서 내린 뒤, 손톱을 예쁘게 다듬은 손을 측근 총관 이해(李海)의 손등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황제가 아직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면 태후의 모습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비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전혀 서른 살이 넘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마침 황제가 안에서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용모를 가진 그는 공손하고 평온하게 미소를 띤 채,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마마마께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황제의 옆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묵백이 서 있었다.
그는 태후를 보더니 우아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태후마마, 만수무강하십시오.”
태후는 계단 위에 서서 고개를 들고 영린과 묵백을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갓 책봉하신 평양 공주를 궁에 들이셨다고 하니 보러 왔어요.”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공주로 책봉했으니 저도 그 공주의 어른 되겠죠? 폐하께서는 그녀에게 황실 공주로서 지켜야 하는 예의 법도를 가르치지 않으셨나요?”
영린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어마마마, 양해해 주십시오. 이 누님은 성격이 좋지 않고 말도 직설적으로 하여 어마마마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소개해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성격이 좋지 않고 말도 직설적으로 한다고요?”
태후가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어른이고 뭐고 없이 궁의 규칙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에요?”
이때, 야홍릉이 대전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태후의 말을 듣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태후께서 저와 피가 섞인 것도 아닌데 왜 제 어른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말에 묵백은 남몰래 입을 떡 벌렸다.
‘맙소사, 역시 야홍릉다워.’
태후는 안색이 확 바뀌며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얼굴의 여인을 본 그녀는 흠칫 놀랐으나 곧바로 그녀의 말에 차갑게 반박했다.
“무엄하다!”
‘무엄하다고?’
만약 이 말을 한 사람이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영린은 태후의 용기에 손뼉이라도 쳤을 것이다.
여태까지 목국과 동제를 막론하고 야홍릉의 앞에서 ‘무엄하다’를 외치며 호통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야홍릉의 친아버지인 목국 황제도 그녀를 이렇게 꾸짖은 적이 없었다.
물론 야홍릉의 신분을 모르는 태후이기에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태후의 자리에 앉은 그녀는 동제에서 신분이 가장 고귀한 여인이니 언제 이런 도발을 당해보았겠는가?
“어마마마, 화를 푸십시오.”
영린이 말했다.
“제 누님이 성격이 좋지 않고 말도 직설적으로 하여 미움을 사기 쉽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악의는 없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아들로서 그는 항상 태후 앞에서 공손한 자세를 유지하며 어머니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야홍릉을 언급할 때 그는 ‘제 누님’이라고 했다.
그 뜻은 새 공주는 황제의 누님일 뿐.
태후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태후에게 어른 대접을 할 필요도, 궁의 규칙이나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묵백은 영린이 야홍릉을 달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야홍릉이 화가 난 나머지 ‘난 이런 공주 따위 하고 싶지 않아’ 같은 말을 할까 두려웠다.
야홍릉도 영린의 말뜻을 알아듣고 눈에 담긴 노기를 서서히 풀었다.
그녀는 덤덤하고 싸늘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상황이라는 얼굴이었다.
태후도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영린이 왜 이러는지 알지 못했지만 영린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그가 누구의 편에 서서 얘기하는지 눈치챘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
그녀는 예쁜 호갑을 낀 손을 꽉 움켜쥐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
“황상을 낳은 이 어미가 폐하에게는 갓 책봉한 누님보다 못하다는 말입니까? 방계실 황족 규칙은 황상께 제멋대로 굴어도 되고 무시해도 되는 것이란 말입니까? 너무 실망이군요!”
영린은 한숨을 내쉬고 야홍릉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를 봐서라도 어마마마께 사과해 수 있겠습니까?”
태후는 얼굴이 살짝 풀렸으나 여전히 불만 어린 시선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사과하면 호되게 혼낼 생각이었다.
아무리 황제의 누님이라고 해도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안 되지 않는가?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분은 당신의 어머니지 제 어머니가 아닙니다. 사과를 하려면 폐하께서 직접 하세요. 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
이 말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태후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녀의 눈에 분노가 쌓이더니 폭풍 전야 같은 징조가 나타났다. 주먹에 힘을 준 나머지 호갑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너……”
야홍릉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태후가 거드름을 피우는 것을 보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껴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태후는 안색이 시퍼렇게 변하더니 아름다운 얼굴에 서리가 끼었다. 그녀는 야홍릉의 깡마르고 도도한 뒷모습을 불을 뿜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어제 인수궁에서 보았던 여유롭고 차분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태후가 화난 나머지 야홍릉을 죽이라고 지시를 내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묵백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태후가 친동생이 지금 중상을 입고 집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범인이 바로 야홍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마마마도 보셨다시피 저 누님은 제 말도 듣지 않습니다. 성격이 참 나쁘지요.”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태후의 옆으로 다가갔다.
태후의 아리따운 화장이 번진 것을 보고 그는 태후가 화를 못 이겨 기절할까 두려웠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어마마마 화 푸십시오. 제가 저 사람에게서 받아낼 것이 있어 이렇게 비위를 맞춰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만 손에 넣으면…….”
태후와 눈을 마주친 영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 사람을 어마마마께 넘기겠으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태후는 잠깐 침묵하다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낀 서리는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받아낼 거라고요? 그게 뭔데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영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목숨처럼 귀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태후는 고개를 돌려 묵백을 바라보았다.
묵백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참 조용히 있었다. 얼굴에 가득하던 노기가 서서히 가시며 그녀는 다시 원래의 우아하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걸 왜 어제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어제 말했다면 그녀는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는 그만 깜박하고 말았습니다.”
영린이 사과했다. 그리고 온화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어마마마께서 오셨으니 하는 말인데 저와 함께 장희궁으로 가시죠. 이때면 대신들도 다 도착했을 테니…….”
“오늘 연회는 폐하께서 폐하의 누님을 위해 마련한 것이니 저와는 상관이 없죠.”
태후가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전 가서 괜히 화를 참고 싶지 않군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