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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08)화 (10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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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새 저택으로 들어가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지나 화청에 쏟아져 내렸다.

영묘언은 화청으로 들어가 난간 앞에 앉고는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절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서 씻고 옷 갈아입으세요. 전 여기서 보기만 해도 돼요.”

그녀는 섭정왕부로 돌아가도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이곳에서 능 낭자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능묵과 함께 랑교(廊橋)를 지나 침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뒤에는 계 어멈이 따르고 있었다.

침실 밖의 정원은 꽃이 가득 핀 화원이었다.

화원에는 상큼한 꽃향기가 솔솔 풍겨왔다.

야홍릉이 화원 사이의 길을 가로질러 침전으로 가자 시녀가 허리를 굽힌 채,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모두 물러가거라…… 아니, 깨끗한 물을 떠 오너라.”

야홍릉은 말을 바꾸어 지시를 내리고는 환하고 널찍한 방으로 들어갔다.

침실의 가구는 간단했지만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탁자와 의자, 탑 모두 비싼 이화목으로 만든 것이었고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을 풍겼다.

여인의 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따뜻한 느낌은 아니었다.

다소 귀티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공주 전하.”

계 어멈은 방으로 들어가 문발을 젖혔다. 그리고 맞은편의 문을 열며 말했다.

“이곳에는 욕지(浴池, 대형 욕조)가 있습니다. 냉탕과 온탕이 다 있지요. 모두 산에서 끌어온 활수라서 언제든지 목욕하실 수 있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 어멈은 또 병풍 뒤로 걸어가 옷장을 열었다.

“여기에는 모두 제가 준비한 옷이니 마음에 드시는 것으로 골라서 입으세요. 궁의 사상방(司裳坊)에서 지금 전하의 옷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니 당분간은 이것을 입으셔야 할 것입니다. 옷이 다 지어지면 가져오겠숩니다.”

공주의 요구라면 그 무엇이라도 들어주라고 황제가 특별히 지시했었다.

그 말을 듣고 계 어멈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평양 공주의 대우는 역대 사랑받는 후궁들 못지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이 공주가 도대체 누구기에 황제가 이렇게 떠받드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공주는 황제의 이런 환대에도 전혀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고 평온하기만 했다.

마치 이런 일을 평소에도 많이 겪어 본 듯한 느낌이었다.

계 어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가 보아라.”

계 어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차가운 분이야.’

“네, 알겠습니다.”

방에는 다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야홍릉은 말없이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능묵, 이곳이 익숙하지 않아?”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의 공주부 내 침전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저 우연일까?’

야홍릉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내 옷을 가져오너라.”

“네.”

시녀는 곧 물을 길어왔다.

야홍릉은 그녀더러 대야를 올려놓으라고 한 뒤 말했다.

“나가 보아라.”

“네.”

시녀가 물러갔다.

“난 좀 씻어야겠다.”

야홍릉은 옆에 있는 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이제 얼굴에 묻힌 역용액을 씻으려무나.”

시간이 지나자 햇살이 더욱 뜨거워졌다.

화청으로 불어오는 바람 덕에 아주 덥지는 않았다.

영묘언은 미인탑에 기대어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호수면에는 이따금씩 미풍이 만든 물보라가 일었다.

한참 지켜보던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난 영씨 가문의 적자 혈통이고 부왕은 섭정 대권까지 가지고 있는 분이시지만, 그런 나도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데.”

황제들은 피서를 할 수 있는 집을 짓고는 했다.

그러나 그녀는 유영수사야말로 더위를 피하기 딱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바람이 호수를 지나 불어오면 약간의 습기와 시원함을 담고 있어 상쾌하기만 했다.

‘언니가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면 여름 무더위에 시달릴 걱정은 없겠네.’

화청의 모퉁이에서 시녀가 선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영묘언의 한탄 섞인 투덜거림을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여기는 너무 조용해. 이사하는 분위기도 하나도 안 나고.”

영묘언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언니는 참 이상해. 이런 날에 연회를 열어 사람들을 부르면 얼마나 좋아?”

계 어멈이 걸어오다가 이 말을 듣고 맞장구를 쳤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공주 전하께서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듯합니다.”

‘어디 좋아하지 않는 것뿐이겠어? 언니는 자신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랑은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귀족 공자든, 소저라도 다 관심이 없다고.’

여기까지 생각한 영묘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니는 참 특별한 사람이야. 나도 왕부에서 태어나 여태까지 많은 사람을 봐왔는데 언니는 달라. 그런 사람들은 명예와 이익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또 어떤 사람은 권세를 믿고 잘난 척을 하거나 약자를 괴롭히려고 하고. 윗사람들에게는 비굴하게 아부하는데…….”

하지만 그녀는 야홍릉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비굴하지도 않고 거만하지도 않았다.

평소에 차갑고 싸늘해 보이나 어떤 때는 너그럽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자신만의 품격을 고수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계 어멈은 그녀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군주가 평양 공주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군. 공주와 사이가 좋은 것 같은데…… 자신의 여식이 공주와 왕래하게 놔둔 것을 보면 섭정왕도 평양 공주와 사이가 좋은 걸까? 아……, 평양 공주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 섭정왕부에 있었지. 사이가 나쁘지는 않겠네. 그런데 평양 공주에 대한 폐하의 은총은…….’

“군주, 계 어멈.”

저택의 새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말했다.

“위 국구와 조 세자, 후 세자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영묘언은 미간을 찌푸리고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오라고 한 사람도 없는데 왜 왔대? 다 쫓아내.”

“군주,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누가 보면 이곳의 주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청색 장삼을 입은 위녕이 부채를 흔들며 걸어왔다. 그의 행동은 풍류스럽고 멋스러웠다.

“평양 공주의 집들이 날에 어찌 저희를 부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영묘언은 속으로 야홍릉의 생각이 맞았다고 감탄했다.

그녀는 이들이 그녀가 초대장을 보내기를 기다릴 거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야홍릉이 초대장을 보내기도 전에 스스로 찾아온 것이다.

만약 야홍릉이 초대장을 보냈다면 이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오지 않으려고 했을 수 있었다.

영묘언은 앉아서 차분하게 물었다.

“전 이곳의 주인은 아니지만 주인이 부르지도 않은 손님을 반기지 않을 것은 알고 있어요.”

위녕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모르죠.”

“평양 공주에게 잘 보이는 게 그렇게 급하신가요, 군주?”

조기헌이 화청으로 들어오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갑자기 봉황이 된 거위가 진짜 봉황보다 더 큰 은총을 입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요.”

‘봉황이 된 거위라고?’

영묘언은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조기헌, 당신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진실한 신분조차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거위라고 한 것도 높이 쳐준 겁니다. 아니면 장공주 급으로 예우해 주기를 바라나요?”

위녕이 코웃음을 치며 영묘언을 노려보았다.

“폐하께서 섭정왕의 핍박을 받은 건 아닐까요?”

영묘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씀이 심하시네요!”

계 어멈은 긴장한 얼굴로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겨우 끼어들었다.

“공자들, 이러시면…….”

“그 입 다물라!”

조기헌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말을 하고 있는데 어디 감히 노복 따위가 끼어들어?”

영묘언은 그 말을 듣더니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계 어멈, 내 말 맞지? 어떤 사람들은 신분이 좀 뛰어나다고 거만하고 잘난 척하며 약한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했잖아. 어제 아침에 언니에게 혼날 때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벌벌 떨더니.”

이 말에 조기헌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창피한 나머지 화를 버럭 냈다.

“영묘언!”

“폐하께서 언니를 공주로 책봉하신 일이 제 부왕의 핍박 때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부왕께 가서 물어보시던가요.”

영묘언은 다시 의자에 앉으며 차갑게 말했다.

“그럴 용기가 없다면 궁에 들어가 폐하께 여쭈시든지.”

‘폐하께?’

위녕은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어제 수많은 조정 대신들이 황제를 만나려고 했지만 모두 건양궁 밖에서 들어가지도 못한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승상 심운미가 황제를 만나고 나온 뒤로 안색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태후를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심운미가 태후의 기분이 좋지 않으니 찾아가지 말라고 했다. 물론 이것이 황제의 뜻이라는 것을 그는 눈치챌 수 있었다.

위녕의 기분도 덩달아 울적해지기 시작했다.

‘신분도 알 수 없는 한낱 계집이잖아? 설마 그 계집 때문에 세상이 바뀌겠어? 정말 웃기는 말이지.’

능 낭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황제는 문관들을 아주 의지하며 믿었다.

그러나 능 낭자가 나타난 뒤로 그들이 찾아가도 황제는 만나 주지 않았다.

위녕은 능 낭자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황제가 왜 아무 이유 없이 권신들을 멀리하겠는가?

사실 영린은 다른 이유에서 신하를 만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위녕은 화가 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황제를 만나려고 청을 올렸으나 거절을 당하자 크게 서운함을 느끼고 이윽고 화풀이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가 온 지도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주인이 나와서 맞아주지도 않고 이게 바로 평양 공주가 손님을 접대하는 예의인가?”

후소우도 질세라 입을 열었다.

“조 세자가 그녀더러 봉황이 된 거위라고 했는데 내 생각에도 그 말이 맞는 것 같소.”

“어제 아침의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지 못했나 보군. 오늘 여기까지 찾아와 입방정을 떠는 걸 보면.”

차가운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야홍릉 특유의 서늘함에 사람들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제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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