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걱정하지마
야홍릉의 그 말에 능묵은 표정이 바뀌며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꿇고 사죄하려고 했다.
“무릎 꿇지 말거라.”
야홍릉이 말하고 침대 머리에 기댔다.
“파편을 빼낸 뒤 깨끗하게 닦고 싸매면 된다.”
능묵은 이 말을 듣고도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기만 했다.
야홍릉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은전 출신의 능묵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처도 봐 왔을 텐데 왜 이리 호들갑일까?
‘왜 이러지?’
“물을 좀 떠 왔어요.”
영묘언이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언니, 좀 괜찮으세요? 제가 의원을 불러올까요?”
능묵이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 야홍릉이 말했다.
“괜찮아요, 이만한 상처로 시끄럽게 굴 건 없으니.”
영묘언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야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돌리다 야홍릉의 피투성이가 된 손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그, 그래도 의원을 부르는 게 낫겠어요.”
“괜찮아요.”
야홍릉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를 보는 게 힘들면 나가 계세요.”
영묘언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적신 다음 꼭 짜서 능묵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써요.”
그녀는 사실 직접 야홍릉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능묵이 막을까 걱정되어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능묵은 말없이 손수건을 받아 든 뒤, 조심스럽게 야홍릉의 손바닥을 닦아주었다.
야홍릉이 아플까 아주 걱정하는 눈치였다.
영묘언은 옆에 서서 말없이 그의 행동은 눈여겨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언니.”
그녀는 야홍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는 여인인데 옆에 시중을 들 사람이 시위 한 명밖에 없다면…… 좀 불편하지 않아요?”
사실 그녀는 이런 일이 경우에 맞는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능묵 시위는 매일같이 야홍릉과 함께 있었다. 적어도 영묘언이 볼 때마다 항상 그랬다.
심지어 영묘언은 능묵이 야홍릉의 어깨를 주무르는 것을 보았고 야홍릉이 씻을 때 시중을 드는 것도 보았다.
‘수행 하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야홍릉이 남자인 줄 알았을 때야 문제될 게 없었지만 지금은……
야홍릉이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능묵은 평범한 시위가 아닙니다.”
‘평범한 시위가 아니라고? 그러면 역시 남장한 건가?’
영묘언은 저도 모르게 능묵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남장을 한 여인 같지 않았다. 지나치게 평범한 외모를 제외하고도 야홍릉보다 훨씬 큰 키를 보니 여인은 아닌 것 같았다.
야홍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묵은 야홍릉의 상처를 닦는 데 정신이 팔려 영묘언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손바닥의 피를 다 닦은 그는 파편이 더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배낭에서 약병을 꺼냈다. 그리고 야홍릉의 손바닥에 발라준 다음 깨끗한 천을 찢어 꼼꼼하게 상처를 싸맸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야홍릉은 창밖을 보더니 일어섰다.
“먼저 식사하러 가시죠. 왕비가 오래 기다리게 하시면 안 되니.”
영묘언은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잘 싸매진 야홍릉의 상처에 돌렸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니, 방금 전에 기분 나쁜 일이 떠오른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언니가 맨손으로 찻잔을 으스러뜨린 거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야홍릉은 고개를 젓고 능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능묵은 시선을 들었다. 야홍릉의 검고 차분한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품을 것 같은 깊이가 담겨 있었다. 빠져들 것만 같은 눈동자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길고 뼈마디가 굵은 손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손은 사람을 공격할 때 실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손바닥이 퉁퉁 붓도록 맞아도 목국 황궁의 제일 고수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러나 방금 전에는……
그조차도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 *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의 분위기는 아주 이상했다.
야홍릉이 섭정왕부로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섭정왕 부부와 봉회근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였다.
봉여희도 봉회근의 옆에 앉아 있었다.
능묵은 말없이 야홍릉의 옆에 서 있었다.
섭정왕 왕비는 야홍릉의 손을 싸맨 천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일인지 다급히 물었다. 봉회근도 놀란 눈치였다.
방금까지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다쳤다는 말인가?
“아. 찻잔이 깨지면서 파편에 다쳤어요.”
영묘언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야홍릉이 스스로 찻잔을 으스러뜨려 다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능묵 시위가 언니의 상처를 싸맸으니 오라버니는 걱정하지 마세요.”
봉회근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다음 펼쳐진 광경에 사람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야홍릉이 다친 게 오른손이라서 능묵은 줄곧 옆에서 그녀에게 음식을 집어 주었다. 심지어 그녀의 입가로 가져가기까지 했다.
방에서 둘이서 하는 식사 자리라면 문제 될 게 없었겠지만 사람이 많으니 자연스레 시선이 능묵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들 야홍릉이 엄살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 시위의 존재감이 너무 뚜렷하다고 느꼈다.
봉여희는 계속해서 능묵을 주시하며 평범한 그의 얼굴에서 특별한 것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내가 알아서 먹을게.”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하고 능묵의 손에서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왼손을 사용하며 말했다.
“앉거라.”
이 말에 다른 사람들은 또다시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 시위는 위장이 좋지 않아 밥을 먹는 것을 지켜봐야 합니다.”
영위는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사람들도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들은 이 시위가 무슨 특별한 구석이 있어서 능 낭자가 이토록 특별 대우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능 낭자가 특별 대우하는 사람이라면 섭정왕부의 손님이기도 했다.
게다가 능 낭자는 지금 동제의 공주가 되었다. 또 남자의 신분임에도 그녀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이면 능 낭자에게도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같이 식사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능묵은 말없이 야홍릉의 옆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밥을 먹었다.
식사 자리는 말하는 사람이 없어 조용하기만 했다.
어떤 일은 속으로 알고만 있으면 되지 굳이 입 밖에 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섭정왕부와 평양 공주는 남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섭정왕이 역모를 꾀하거나 능 낭자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 이상, 이 관계는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다음날 아침.
능묵은 짐을 챙기고 야홍릉, 영묘언과 함께 마차를 타고 평양 공주부로 향했다.
어제 만났던 계씨 어멈은 궁에서 보낸 궁녀, 시위와 함께 앞뜰에서 두 줄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홍릉이 마차에서 내려 대문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공주 전하, 만수무강하세요!”
야홍릉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영묘언은 그녀의 옆에서 말없이 저택을 둘러보았다.
능묵은 야홍릉의 왼쪽에서 반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눈을 내리깐 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야홍릉 일행이 지나간 뒤에야 계 어멈을 일어서서 그들을 따라갔다.
그리고 공손하게 물었다.
“전하께서 공주로 책봉된 데다 새 저택에 들어오셨으니 젊은 공자와 소저들을 축하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야홍릉이 대답했다.
“필요 없다.”
계 어멈은 당황했다.
‘필요 없다고?’
공주의 신분은 고귀하나 능 낭자가 동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에 대해 잘 모를 게 아닌가?
그러니 제경의 귀족 공자와 소저들을 불러 친해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야홍릉의 침실은 공주부 동쪽의 유영수사에 마련되어 있었다.
능묵은 가져온 짐을 안방에 들여간 뒤, 야홍릉과 함께 저택을 빙 둘러보았다.
저택의 분포는 일반적인 공주부나 친왕부와 다를 게 없었다. 정자, 누각, 인조산과 정원, 있을 게 다 있었고 구불구불한 회랑이 앞뜰에서 뒤뜰까지 이어졌다.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요.”
영묘언은 다 둘러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폐하께서 언니에게 마음을 쓴 것 같아요.”
계 어멈도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베푸신 은혜입니다.”
그녀는 황제가 이 공주에게 무슨 마음을 품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좋은 쪽으로 말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정원에는 제철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조잘거리며 흐르는 물소리와 향긋한 꽃향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목국의 황족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호국 공주로 존경을 받으며 이러한 저택에서 지내왔다. 그래서 놀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영린이 그녀에게 준 저택은 목국에 있는 호국 공주부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야홍릉의 침전으로 마련한 유영수사 밖의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언니, 정말 집들이를 하지 않으려고요?”
영묘언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녀는 장공주부에서 조기헌과 다른 공자들이 그들을 괴롭히던 장면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었다.
“조 세자, 위 공자와 후소우 그 인간들을 불러 실컷 괴롭혀요. 사람들 앞에서 언니에게 한 짓을 사과하게 하고요.”
야홍릉은 그 말을 듣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러다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싫다고?’
영묘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언니 혹시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런 사람인가요?”
“그들도 지금 군주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죠.”
뒷짐을 진 야홍릉은 차가운 눈길로 말했다.
“전 보살이 아니라서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요. 그러나 저와 능묵도 어제 그들의 사람들을 많이 다치게 했으니 그 정도면 그들도 뼛속 깊이 교훈을 새겼을 거예요. 그들이 똑똑한 인간이라면 앞으로 절 멀리하겠죠.”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녀는 영묘언이 말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고귀한 신분이 되었으니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을 불러 혼내주는 게 맞았다.
그들이 예전에 한 짓을 후회하게 말이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갑자기 신분이 급상승한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원래도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야홍릉은 지금도 특별한 우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나라가 바뀌었을 뿐, 공주 신분이라는 건 같았다.
게다가 그녀가 동제의 공주가 되었다고 해서 그녀가 하고 싶은 일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쓸데없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영묘언이 이런 생각을 이해할 리 없었다.
영묘언이 이런 것을 모르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영묘언이 야홍릉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궁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계 어멈은 이해했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능 낭자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