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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05)화 (10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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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제왕의 마음

영린이 느긋하게 입을 열어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섭정왕이 된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섭정왕이 한 말이라면 다 옳습니까?”

태후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에게서 더 이상 온화한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황상, 반년 뒤면 직접 정무를 보시게 됩니다. 그때 가서 섭정왕이 흔쾌히 대권을 내놓을 것 같습니까? 조정 대신들이 황상을 지지하실 것 같습니까? 대신들이 황상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지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고집스레 신분도 확실치 않은 여인을 공주로 세울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영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다음 일어서서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볼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허리를 살짝 굽혔다.

“잠깐.”

태후가 위엄이 서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여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녀는 어떤 여인이기에 황제가 귀신에 홀린 것처럼 황당한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했다.

“그분은 아주 바쁩니다. 요새 저택도 봐야 하고 새 옷도 지어야 하고 새 신분에 적응도 해야 하지요. 그래서 당분간 시간이 없으실 듯합니다.”

영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마마마께서 정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내일 저녁 제가 장희궁(長喜宮)에서 연회를 열 예정이니, 그곳에서 보시면 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태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태후는 멍하니 앉아서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떠나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소년은 변한 게 없었다.

열세 살의 소년은 준수한 용모에 훤칠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우아한 행동은 그림에서 걸어 나온 귀공자를 방불케 했다. 그는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권세와 명리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고 고결하기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위엄이 넘치는 제왕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 어린아이가 언제 벌써 열세 살의 소년이 되었지…….’

문득 태후는 흠칫 놀랐다.

고작 열세 살밖에 되지 않는 아이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아들의 속내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항상 편한 자세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심지어 그가 짓고 있는 미소도 기뻐서 웃는 웃음인지, 화가 나서 웃는 실소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제왕 같지 않은 제왕이지만 역대 여느 제왕보다도 더욱 섬뜩한 느낌을 풍겼다.

태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는 중이었다.

* * *

건양궁으로 돌아온 영린은 그를 만나려고 찾아온 대신들을 피해 침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궁인들을 모두 내보낸 뒤, 탑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자마자 머릿속에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사람을 본 순간, 그는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큰 후회가 몰려들었다.

커다란 침궁에서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고요한 정적뿐이었다.

세상에 그만 혼자 남겨진 듯, 지독한 외로움은 그를 공포와 무기력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매일 이런 외로움과 정적을 느끼며 자신의 죄를 씻으려고 애썼다.

한참 뒤, 누군가 조용히 건양궁에 들어왔다.

그는 탑 위에서 악몽을 꾸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장포를 입은 사람은 조용히 서 있다가 떠나려고 했다.

이때, 소년이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보석같이 어두운 눈에는 싸늘함과 차분함이 담겨 있었으나 목소리는 기지개를 켜듯 늘어져 있었다.

“허락했어?”

묵백은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됐어.”

영린은 일어나 앉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늘은 참 공평하다니까. 가끔씩 사람을 울고 싶게 만들어.”

“폐하는 아직 어리시니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우십시오. 누구도 비웃지 못할 것입니다.”

묵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영린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황제인 나더러 울라고? 사람들이 보면 당연히 비웃지.”

묵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그리고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남제의 일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이미 섭정왕과 합의를 봤다.”

영린은 차를 마시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날 도와 남제를 쓰러뜨리고 제국을 통일하기로 했어. 난 그가 평생 부귀하게 살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했지. 그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절대 섭정왕부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이야.”

이건 절대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섭정왕이 병사를 발동해 역모를 꾀하지 않는 한, 앞으로 군공을 얼마나 쌓든, 권력이 얼마나 강해지든 영린은 절대 그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심지어 그가 제국의 병권을 영원히 소유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게다가 친왕의 작위뿐만 아니라 권력이 대단한 대장군으로 세우겠다고 했다.

이런 조건을 듣는다면 그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이 제안은 영위가 가장 걱정하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다들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매정하다고 하지만 영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권력을 좋아하고 부귀영화를 포기하기 싫었지만 동시에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 정에 약한 사람이었다.

그가 최근 반년 동안 가장 골머리를 앓은 문제는 바로 어떻게 평화롭게 황제에게 정권을 넘겨줄 수 있는가였다.

그는 권력을 넘긴 뒤에 황제가 그를 없애버리고 처자식도 해할까 두려웠었다.

그러나 정권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와 황제는 계속해서 암투할 것이고 결국 병사를 발동해 내전을 일으키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발전할 기회를 놓치고 결국 국력이 손해 보게 될 것이다.

영위는 절대로 영린과 적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충동적인 결정을 하는 이유는 불확실함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

이 시점에 영린은 영위에게 확실하게 말을 해두어 그를 안심시켰다.

불확실한 일을 솔직히 얘기한다면 오히려 서로 믿음이 생길 수 있었다.

영위가 제왕의 약속을 믿을 것인지. 영린이 뒤통수를 칠까 걱정하지 않는지는 삼촌과 조카 사이에 판단할 일이었다.

묵백이 낮게 웃었다.

“세상에 폐하보다 더 생각이 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영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왕의 마음이라?

특별한 경험이 그가 빨리 성장하도록 떠민 것이었다.

열세 살 된 소년이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면 누가 그처럼 생각이 깊겠는가?

“밖의 사람들은 다 갔어?”

묵백은 고개를 저었다.

“폐하를 뵙지 못했는데 그들이 그렇게 쉽게 떠날 리 있겠습니까?”

영린은 입꼬리를 올리고 차갑게 웃었다.

“문관들은 모두다 나한테 결탁해 섭정왕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지. 하지만 내가 책봉한 공주가 섭정왕부에 묵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섭정왕이 일부러 나한테 붙인 첩자가 아닌가 의심하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묵백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신분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런 의심을 했겠지요.”

“됐어.”

영린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지시를 내렸다.

“여봐라, 심운미를 들이거라.”

내관은 지시를 받은 뒤, 다급히 나가 말을 전했다.

“폐하께서 승상 대인더러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근정전(勤政殿) 밖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대신들은 드디어 황제가 신하를 만나려고 하자 정신이 번쩍 들어 심운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선으로 이렇게 말했다.

‘승상 대인, 대인만 믿겠습니다.’

심운미는 입가를 실룩이더니 옷을 정리하고 사람들의 기대에 찬 시선을 받으며 건양궁으로 들어갔다.

그는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신하 심운미가 폐하를 뵙습니다.”

대전 안에서 소년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경이 다른 대신들과 함께 급히 날 만나려고 한 게 아침에 내린 공주 책봉 성지에 불만이 있는 것이오?”

심운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감히 그런다고 해도 소용없소.”

맑고 평온한 목소리가 들렸다.

“군자는 헛소리를 하지 않는 법이오. 게다가 성지까지 내렸으니 이미 정해진 일이오. 이 일은 내가 되돌이키고 싶어도 되돌이킬 수 없는데 자네들이라고 어쩌겠소?”

“폐하께 아룁니다.”

심운미의 목소리는 공손했다.

“전 그냥 이 새 공주의 신분이 궁금할 뿐입니다.”

영린은 그에게 야홍릉의 신분을 말해 주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누님은 뭐라고 하셨소?”

심운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님의 공주부에서 나온 것 아니오? 누님은 뭐라고 하셨소?”

영린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심운미는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장공주 전하는 폐하께 그럴 만한 생각이 있으실 거라고 저희더러 달리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달리 생각하지 마시오.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정사에나 힘쓰시오.”

‘공주를 책봉하는 게 정사가 아니고 뭐야?’

심운미는 또 말없이 있다가 담담하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한 나라의 황제이십니다. 이렇게 제멋대로…….”

“음?”

영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경은 지금 나를 가르치는 것이오? 어떻게 해야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는지?”

심운미는 흠칫 놀랐다.

“제, 제가 어찌 감히.”

“나는 설교를 듣고 싶지 않소.”

대전 안에서는 책을 펼치는 사락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여전히 평온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상은 권력이 강한 만큼 책임도 막중하오. 앞으로 별일이 없으면 공주부로 가지 말고 일을 하시오. 안 그러면 난 경이 승상이 아닌 부마가 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할 테니.”

이 말을 들은 심운미는 안색이 확 바뀌었다.

곧 직접 정사를 보는 황제가 문관들의 우두머리이자 그의 한쪽 팔이 되어줄 승상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심운미에게 날 선 말로 몰아붙이는 황제는 예전에 그들이 알던 온화하고 조용하던 소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심운미는 들어오기 전까지 황제가 생각을 바꾸지는 않더라도 그를 달래주거나 책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할 줄 알았다.

예를 들면 능 낭자가 정말 대단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거나 섭정왕의 핍박을 못 이겨 잠시 타협했다거나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강경하고 단호한 경고를 듣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온화한 말에 숨겨진 것은 열세 살 소년답지 않은 제왕의 위엄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심운미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또 얘기할 것이 있소?”

심운미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없습니다.”

“그럼 물러가시오.”

영린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귀찮은 표정이 역력했다.

“아, 위녕(魏寧)에게 전해 주시오. 어마마마께서 오늘 기분이 좋지 않으시니 괜히 인수궁에 가서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말이오.”

심운미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일어서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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