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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04)화 (10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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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운명을 바꾸다

잠시 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비밀을 들으시고도 전하께서 흔쾌히 동제의 공주가 되는 제안을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야홍릉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큰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직접 듣지 않았다면 그녀는 세상에서 그녀가 다시 태어난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야홍릉에게 이 비밀은 공주로 책봉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이 비밀은 순식간에 그녀의 모든 마음을 다잡았다.

‘운명을…… 바꿨다고? 누가 대가를 치러서 운명을 바꿀 기회를 가져온 거야? 그래서 누구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거지?’

야홍릉이 눈을 뜨고 자신이 열일곱 살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그녀도 그때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 그 의문점이 풀렸다.

그녀가 다시 태어난 것은 인위적인 것이었다.

평소에 차분하기만 하던 그녀도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오후에 궁에서 전하께 옷을 지어드리러 올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곳에서 푹 쉬시면서 새 신분에 적응하시지요.”

묵백은 일어나며 소매를 툭툭 털었다.

그의 목소리는 온화하기만 했다.

“내일 아침, 폐하께서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공주 전하는 그 사람과 함께 공주부에 가서 보십시오. 저녁에는 궁에서 조정 관리들에게 공주 전하를 소개하는 연회를 열 거고요.”

그는 야홍릉이 이런 얘기들에 집중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방금 한 얘기가 야홍릉에게 얼마나 큰 충격일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잘 놀라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기묘하고 황당한 일에 마주치면 평정심을 잃게 될 것이다.

그녀에게는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묵백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영풍원을 떠났다. 야홍릉이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자리를 비운 것이다.

방을 나선 묵백은 정원에 서 있는 능묵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능묵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 이르고 의미도 없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난 남성 대제사(大祭司) 묵백이오.”

그가 말했다.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면 가서 알아보시오.”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묵백이 떠난 뒤,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 앞에 앉아 있는 야홍릉의 가냘픈 몸을 본 순간, 그의 시선에 알 수 없는 희미한 표정이 드리웠다.

능묵은 입술을 꾹 다문 뒤, 말없이 탁자 옆으로 가 차를 따랐다.

그리고 찻잔을 야홍릉의 옆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다시 말없이 그녀의 뒤로 걸어가 세심하게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야홍릉은 혼자서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능묵의 두 손이 어깨의 혈위부터 귀밑머리까지 세밀하게 주무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능묵이 애써 자신의 기분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서 능묵의 시중을 받던 그녀는 머릿속으로 죽기 전에 겪었던 화면을 다시 떠올렸다.

야홍릉은 미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살아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이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깨어난 뒤, 그녀는 이것이 운명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인지 생각하지 않고 평온하게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이번 생에 해야 할 일들을 계획했다.

그녀가 다시 태어난 것이 하늘이 정한 운명이 아니었다니.

스물한 살에 죽는 것이야말로 원래의 운명이었다. 그녀가 다시 태어난 것은 누군가 대가를 치러 운명을 바꾼 것이라고 했다.

‘엄청나게 큰 대가라…… 하늘이 정한 운명을 바꾸는 대가는 당연히 작은 것이 아닐 테니. 그런데…… 왜?’

야홍릉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영린이 왜 그녀에게 이렇게 호의를 보이는지도 알 수 없었다.

‘왜 내 운명을 바꾸려고 한 거지? 그 사람이 혹시 능묵인가? 묵백이 나더러 능묵에게 잘해주라고 한 것도 이것 때문인가?’

진실이 가까워질수록 야홍릉은 안개에 휩싸인 비밀이 궁금해졌다.

‘만약 정말 운명을 바꾼 거라면 묵백은 여기서 어떤 역할일까?’

“주인님.”

한동안 침묵이 지난 뒤, 능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묵백이 자신은 남성의 대제사라고 했습니다.”

‘남성 대제사?’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섯 개의 나라를 제외하고 가장 신비롭다는 남성국(南聖國) 헌원씨(軒轅氏) 일족을 말하는 것이냐?”

현재 중원(中原) 대륙에는 여섯 개의 나라가 공존했다.

그 나라는 금국, 동제, 남제, 목국, 서릉(西陵).

그리고 가장 신비롭다는 남성국이었다.

남성국은 중원에서 유일하게 신을 모시고 제사전(祭司殿)을 설치한 나라였다.

대륙의 가장 남쪽에 있는 남성국은 신비롭기로 소문난 곤륜산맥(昆侖山脈)과 가까이 있었다.

평화를 바라기에 남성국은 강한 병력을 가지고 있어도 먼저 전쟁을 일으키는 법이 없었다. 다른 나라들도 감히 남성국을 건드리지 못했다.

이렇게 되니 남성국은 평화롭고 백성들은 부유하며 살기 좋은 곳이었다.

묵백의 신분에 대하여 야홍릉은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가 남성의 대제사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제사전은 신을 모시는 신성한 일을 하고 있었다. 남성국의 사람들은 신을 모시고 운명을 믿었다. 묵백이 말한 말도 운명에 연관된 것이었다.

‘그런데 남성의 대제사가 왜 동제에 있지? 지금 보니 이 문제는 답이 없겠군.’

오후가 되어도 야홍릉은 문을 나서지 않았다. 그녀는 묵백이 말한 대로 조용히, 황당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일을 생각했다.

결국 마음속으로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같은 시각, 동제의 조정 권신들이 황제를 설득하러 궁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간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군왕부, 승상부, 국구(國舅)부, 안국공부, 태부(太傅)를 비롯한 각 상서와 내각 신하들은 모두 한꺼번에 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설득하려고 했다.

영린은 그들을 상대하기 귀찮은지 사람을 시켜 달랑 한 마디만 전했다.

“폐하께서 이 일은 이미 섭정왕의 동의를 거쳤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불만이 있으시면 섭정왕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린은 이렇게 한 마디만 던진 후 태후의 인수궁(仁壽宮)으로 자리를 옮겼다.

태후 위씨는 아주 운이 좋은 여인이었다. 명문가 출신인 그녀는 외모가 출중하여 열네 살에 황태자의 비로 시집왔다. 그러다 이 년 뒤 황제가 죽고 황태자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그녀도 자연스레 황후가 되었다.

위씨가 태자비가 되기 전부터 태자부에는 총애를 받는 첩실이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태자가 황제로 등극한 다음 달, 그 첩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갓 황위에 오른 황제는 아주 기뻐하며 큰 상을 내렸다.

각종 비단과 보석을 하사했지만 유독 신분을 높여주지 않고 재인(才人)의 봉호만 주었다. 그래서 장자인 영정은 어머니의 덕을 보지 못했다.

그는 장자지만 신분이 높지 않았다.

황후는 젊고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학식, 온화한 성격과 똑똑한 수완으로 오랫동안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장공주 영가를 낳았다.

황후의 내조를 받으며 황제는 정신을 조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몇 해 동안 동제는 조정이 안정되고 병력과 경제가 강하게 발전했다.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황후가 내조를 잘한다고 칭송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적자 영린이 태어난 뒤로 황제의 몸은 점점 나빠졌고 잠자리도 점점 줄어들었다. 태의원에서 정성 들여 약을 지어 황제에게 바쳤지만 선황은 결국 장수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삼 년 전, 선황이 승하한 나이는 마흔이 좀 넘는 정도였다. 그는 병이 위독할 때, 지시를 내려 열 살 된 적자 영린에게 황위를 물려주었고 황숙 영위를 섭정왕으로 명했다.

그렇게 갓 서른이 된 황후는 태후가 되었다.

영린은 당시 나이가 어렸다. 매일 들어야 하는 수업도 많았고 황제가 될 준비를 해야 하기에 아침에 문안 인사를 올리는 일 외에 태후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다. 삼 년이 지난 지금, 모자의 사이는 많이 멀어진 채였다.

최근 반년 동안 황제는 문안 인사를 올릴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는 종종 사람을 보내 말 한마디를 전하는 게 다였다. 태후도 그저 궁인들에게 황제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를 하는 것 말고 달리 간섭하지 않았다.

황제의 가마가 인수궁 문밖에 세워지자 내관이 높게 외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인수궁 안팎에 있던 궁녀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영린은 궁문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던 태후는 고개를 들었다.

빛을 등진 채, 입구로 들어오는 소년은 훤칠하고 준수하여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어마마마를 뵙습니다.”

소년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태후는 시선을 거두었다. 관리를 잘한 덕에 그녀의 얼굴은 스무 살의 처녀처럼 주름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하얗고 가는 손으로 품에 안은 흰색 고양이를 어루만지며 담담하게 말했다.

“황상 눈에 이 어미가 있기는 한가 봅니다?”

“어마마마, 무슨 그런 말씀을.”

소년은 입꼬리를 올린 채, 태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시녀가 다가와 차를 따랐다.

“전 그저 정무를 보느라 바쁠 뿐이지 어마마마께 일부러 소홀한 게 아닙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그는 말을 마치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자 시선이 자연스레 맞은편 탁자에 놓였다.

그곳에는 바삭하게 튀겨 말린 물고기가 있었다.

태후는 손으로 말린 물고기를 집어 들어 고양이에게 주었다. 그 행동은 사랑하는 정인을 대하듯 아주 부드럽고 우아했다.

“오늘 제가 공주를 한 명 책봉했습니다.”

영린이 차를 마시더니 약간 언짢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고작 공주를 책봉한 것뿐인데 제가 황제로서 이 정도 권력도 없다는 말입니까? 나이 든 신하들이 울며불며 저더러 고집을 피우지 말라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설득을 하는데 정말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그들을 피해서 어마마마가 계신 이곳으로 왔지요.”

태후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던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저한테는 이미 딸이 있고 황상께도 누님이 있습니다. 능 낭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폐하께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굳이 그녀를 공주로 책봉하시는 겁니까?”

영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고 그냥 제가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태후는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황상은 한 나라의 황제이신데 어찌 이렇게 제멋대로 구시는 겁니까?”

“황숙도 허락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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