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공주의 운명
서재에는 영위를 제외하고도 젊은 남자가 여러 명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키가 크고 늠름해 보였는데, 모두 세가 귀공자다운 화려한 옷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들을 훑어보고는 다시 시선을 영위에게 돌렸다.
“전하.”
젊은 남자들은 조용히 야홍릉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볼수록 그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눈앞의 소년은 곱상하고 몸매가 마른 것 말고 여인다운 구석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싸늘한 표정으로 날카로운 분위기를 내뿜는 야홍릉은 한눈에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연약한 여인이라는 말인가?
‘평양 공주? 평양 공자면 모를까. 그것도 차가운 인상의 공자!’
야홍릉을 바라보는 영위의 눈빛은 어딘가 복잡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능 공자를 사위로 삼고 싶었는데 갑자기 여인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궁에서 황제와 나눈 대화를 떠올린 영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에게서 능 낭자를 공주로 책봉하라는 지시를 받았네. 오후에 궁에서 내관이 책인(冊印, 친왕을 책봉하는 첫날에 전하는 책자)을 가져올 걸세. 그리고 옷도 맞춤 제작…….”
“전하.”
야홍릉이 평온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폐하께서 공주로 봉하겠다고 저에게 얘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말에 서재 안은 조용해졌다.
젊은 남자들은 놀라고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위는 침묵을 지켰다.
“자네 말은…….”
“폐하와 좀 더 얘기를 해봐야겠습니다. 이렇게 동제의 공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야홍릉이 말했다.
영위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황제가 직접 책봉한다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었다.
이렇게 좋은 일을 거절할 사람은 없었다.
물론, 감히 거절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황제가 하사한다는데 명을 어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능 낭자는 달랐다. 겉보기엔 평온한 어조로 말을 돌려서 했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분명했다. 황제가 그녀를 공주로 책봉하는 일을 그녀가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능 공자…… 음, 능 낭자.”
옆에 서 있던 청색 장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는 어딘가 어색했다.
“보천지하, 막비왕토(普天之下,莫非王土, 세상의 땅은 다 황제의 것이다). 솔토지빈, 막비왕신(率土之濱,莫非王臣, 모든 사람은 다 황제의 신하이다). 뇌정우로, 개시군언(雷霆雨露, 皆是君恩, 벌과 상 모두 황제가 하사하신 은혜이다)…… 폐하께서 누구를 책봉하든, 누구에게 하사하시든, 또는 누구를 벌하시든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런가요?”
‘그런가요는 무슨. 당연한 말을.’
야홍릉은 영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제 신분이 어떤지 모르시면서도 폐하께서 이렇게 무모한 결정을 하시게 내버려 두셨다는 겁니까?”
“폐하께서는 무모한 결정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과 함께 검은색 옷을 입은 묵백이 걸어 들어왔다.
“공주 전하, 폐하께서 깊이 생각해 보시고 내린 결정이십니다.”
그가 갑자기 나타나자 서재의 사람들은 모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몇몇 젊은 남자는 그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묵백 대인을 뵙습니다.”
누구도 그가 섭정왕의 서재에 왜 제멋대로 들어왔는지 묻지 않았고 또 갑작스러운 그의 출현에도 놀라지 않았다.
“깊이 생각을 해봤다고?”
야홍릉은 코웃음을 쳤다.
“이건 오리를 몰아 홰에 오르게 하는 것처럼 강요하는 것 같은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뭘 깊이 생각했다는 거야?’
묵백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공주 전하가 오리라는 말씀이십니까?”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묵백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귓가에 소곤거렸다. 그러자 야홍릉의 표정이 확 변했다. 싸늘하고 무표정한 얼굴에 놀란 기색이 나타났다.
영위도 묵백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야홍릉의 표정이 이렇게 변한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면 공주 전하께서 책봉을 받아들이시는 거지요?”
묵백은 한 걸음 물러서더니 야홍릉의 싸늘한 표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이해가 안 가시는 점이 있다면 제가 천천히 답해 드리겠습니다.”
옆에 있던 남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들은 문득 능 낭자의 신분이 궁금해졌다.
궁을 쉽게 나서지 않는 묵백 대인이 의논하는 말투로 능 낭자가 공주 책봉의 성지를 받아들이기를 제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섭정왕부까지 찾아온 것을 보니 능 낭자가 화를 낼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황제가 성이 다른 여인을 공주로 책봉한다는 것은 어찌 세상 모든 여자에게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섭정왕도 허락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능 낭자를 공주로 책봉하면서도 그녀가 이 일로 화를 낼까 두려워 묵백 대인을 보내 그녀를 조심스럽게 다독이라고 지시를 내렸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은 묵백이 진정한 적공주 영가의 앞에서도 이렇게 굽신거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 능 낭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영위를 바라보며 물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영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묵백과 함께 영위의 서재를 나왔다.
그녀가 나오자마자 진국공부의 적장자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갑자기 공주를 책봉하시는 중요한 결정을 하셨는데 대인께서 정말 능 낭자의 신분을 조사해 보지 않으실 겁니까?”
영위는 넓은 의자에 앉은 채, 어두운 얼굴로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 * *
영풍원으로 돌아온 야홍릉은 능묵더러 밖을 지키면서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공주 전하, 신분이 노출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묵백이 평온한 어조로 말하며 야홍릉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의자를 찾아 앉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동제가 이렇게 시끄러워져도 전하에 관한 말은 목국에 전혀 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켰다.
이것은 그녀가 어린 황제의 결정에 화가 난 이유이기도 했다.
목국을 떠난 뒤, 그녀는 자신의 행적이 누구도 알 수 없게 하려고 남장까지 했다.
하지만 나라마다 첩자가 많고 황족의 첩자는 더욱 많았다. 그녀가 다시 여인의 차림으로 돌아간다면, 또 동제에 성이 다른 공주가 책봉된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묵백과 영린을 제외하고 그녀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나중에도 그럴 거라는 것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신은전의 영위는 모두 황제의 명을 듣는다고 했지? 네가 이것을 잊었을 리는 없고.”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동제는 목국과 다른 나라이지만 신은전의 영위에게 이것을 들킨다면 자연스레 황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것이다.
묵백이 담담하게 웃으며 물었다.
“대교습의 신분에 대해 아십니까?”
야홍릉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교습?’
“목국에서 정보를 알아 오라고 보낸 첩자들은 대부분 신은전 출신입니다. 그러니 신은전은 공주 전하에 대한 모든 소식을 숨길 것이고 목국의 황제에게 조금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묵백은 싱긋 웃었다.
“대교습은 공주 전하의 사람이라고 제가 예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야홍릉은 말없이 창문 앞에 앉았다.
“원래도 귀하신 공주 전하이신데 동제에서 책봉을 받으시면 앞으로 다니시면서 뭔가를 하시기 더 편하겠지요. 심각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묵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야홍릉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공주로 책봉되었다고 해서 기쁜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난 그저 영린이 왜 이렇게 하는지 궁금하구나.”
그저 잘 보이려고 한다고 하기엔 너무 과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제멋대로 공주를 책봉하는 황제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친왕, 공주와 군주의 책봉은 예로부터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제멋대로 책봉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성이 다른 왕은 큰 공을 세워야만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성이 다른 공주는 그 경우가 더욱 적었다. 역사 기록에 화친(和親, 황족이 다른 나라나 외족과 맺는 정치적 혼인)하러 가는 사람을 특별히 공주로 책봉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이유 없이 성이 다른 여인을 공주로 책봉한 경우가 없었다. 심지어 이런 경우조차 극히 적었다.
그런데 아직 직접 정사를 보지도 않는 황제가 어떻게 섭정왕을 설득하여 이렇게 말도 안되는 성지를 내렸다는 말인가?
“섭정왕과 폐하가 어떤 합의를 보았는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묵백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삼촌과 조카 사이의 일이니 다른 사람과는 상관이 없지요.”
‘폐하가 왜 이렇게 했느냐면…….’
묵백은 웃으며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폐하께서 강요하시는 거라고 말입니다.”
영린이 야홍릉을 강요하며 몰아붙이는 게 맞았다.
그는 만약 야홍릉에게 제안한다면 야홍릉이 거절할 것을 알고 있었다.
황족 출신인 그녀가 동제의 공주 봉호에 관심을 가질 리 없었다.
그녀는 목국에서도 문무에 뛰어난 금지옥엽과 같은 존재기 때문이다.
어린 황제가 그녀에게 영광을 하사한다고 하기보다 영린이 급히 그녀의 동생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게 더 맞았다.
야홍릉은 탑에 비스듬히 기대서는 턱을 괸 채,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까 서재에서 한 말은 무슨 뜻이지?”
[‘공주 전하께서는 스물한 살에 죽을 운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묵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던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야홍릉은 깜짝 놀랐다. 머릿속에서 뭔가 팍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묵백은 눈을 내리깔고 옅게 웃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운명을 믿으십니까?”
묵백이 물었다.
‘운명?’
야홍릉이 대답했다.
“아니.”
스물한 살에 죽게 된 것은 전생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 생에 그 같은 운명이 다시 반복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믿으셔야 할 텐데.”
묵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말로 하면 몸소 겪는 것보다 설득력이 없지요.”
‘몸소 겪은 거라고?’
야홍릉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묵백의 말은 무슨 뜻이지? 내가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안다는 건가?’
“공주 전하께서는 스물한 살에 죽게 될 운명이십니다. 그것도 전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손에 말입니다.”
묵백의 평온한 말에는 파격적인 정보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엄청나게 큰 대가를 치러서 운명을 바꾸었지요.”
말을 마친 묵백은 고개를 저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