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버티지 못한다고?
야홍릉은 그를 힐끗 보더니 마차에서 내렸다.
“능 공자, 괜찮으세요?”
영묘언은 야홍릉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에게서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왕께서 궁으로 들어가셨는데 보셨어요?”
“전하께서는 폐하와 정사를 논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돌아왔습니다. 군주,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야홍릉이 말했다.
“능 공자만 괜찮으시면 돼요.”
영묘언은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모두 능 공자를 걱정하고 계세요.”
이때, 화려한 마차가 왕부를 떠나 궁의 방향으로 갔다.
“이건…….”
영묘언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제야 야홍릉이 타고 온 마차가 화려하고 눈에 익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실눈을 뜨고 물었다.
“이건 묵백 대인의 마차죠?”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묘언은 입을 떡 벌리고 놀란 얼굴로 말했다.
“묵백 대인은 마차에 다른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데.”
그런데 능 공자가 그의 마차를 타고 돌아온 것이다.
만약 묵백이 능 공자에게 마차를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왕부까지 데려온 것을 영묘언이 안다면 더욱 놀랄 것이다.
그러나 야홍릉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개인적인 마차는 원래 쉽게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 법이죠.”
그리고 그녀는 한 마디 덧붙였다.
“제가 궁에 들어갈 때 저 마차를 탔기에 나올 때도 저 마차를 타게 한 것입니다.”
영묘언은 이 말을 듣더니 설득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궁에 들어갈 때도 묵백의 마차를 탔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영묘언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뭘 먼저 물어야 할지 몰라 야홍릉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부풍전으로 들어가 왕비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영묘언은 하인더러 차를 올리라고 분부했다.
“회근이가 걱정을 많이 했네. 능 공자가 괜찮은 걸 봤으니 안심할 수 있을 것이야.”
섭정왕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괴롭히지는 않던가?”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폐하께서 장공주부에서 능 공자가 자신의 친구라고 하셨잖아요?”
영묘언은 급히 입을 열더니 야홍릉을 또렷이 바라보며 물었다.
“능 공자, 전에 폐하와 알던 사이예요?”
옆에서 이 말을 들은 봉회근은 표정이 변했다.
만약 능 공자가 황제와 원래부터 아는 사이라면, 그것도 깊은 사이라면 능 공자가 그를 치료해주는 명의로 봉씨 가문에 접근한 의도가 의심스러울 수 있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처음 만난 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 이었다.
“사실 저는 동제 사람이 아니기에 폐하와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동제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데 폐하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능 공자가 자신의 친구라고 말한 거지?’
영묘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폐하께서는 능 공자를 데리고 궁으로 가셔서 뭘 하셨어요? 무슨 얘기를 하셨는데요?”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동제의 상황과는 상관이 없는 사적인 일입니다.”
영묘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적인 일이라니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폐하는 능 공자와 아는 사이도 아니라면서 사적으로 할 얘기가 뭐가 있는 거지?’
잠깐 생각을 해본 그녀는 망설이며 말을 꺼냈다.
“아침에 장공주부에서 장공주가 능 공자에게 아주 다정하게 굴던데…….”
이 말을 들은 야홍릉은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묵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어여쁜 얼굴을 가지고 계시면서 남장을 하고 순진한 소녀들을 속이시다니.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리고 아까 궁에서 황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남장을 한 것도 머지않아 들킬 것 같았다. 이제는 사실을 말할 때였다.
이렇게 생각한 야홍릉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여태껏 숨긴 게 있습니다.”
이 말에 봉완, 봉회근과 영묘언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영묘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영풍원으로 와주십시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영묘언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네.”
“능 공자, 피곤할 텐데 방으로 들어가 쉬시게.”
봉완이 입을 열었다.
“묘언아, 능 공자가 쉬게 내버려 두거라.”
영묘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야홍릉은 일어서서 봉완과 봉회근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영풍원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능묵과 함께 멀어지자 영묘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능 공자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지?”
“먼저 능 공자가 쉬시게 내버려 둬. 점심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봉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고 진지한 얼굴로 봉회근을 바라보았다.
“회근아, 넌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해?”
봉회근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능 공자가 폐하의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안 그러면 폐하께서 이렇게 대놓고 능 공자를 감쌀 리 없으시니까요.”
봉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폐하께서는 왜 능 공자를 자신의 친구라고 얘기한 거지?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네.”
철없는 아이도 아무나 친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사람은 단순한 아이가 아닌 황제이지 않은가?
봉회근은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말했다.
“능 공자가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도 아무하고나 친구로 사귈 리도 없으시고. 그리고 폐하께서 장공주부에 간 시간도 아주 절묘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연 같지는 않습니다.”
봉완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말은 폐하께서 계속 장공주부를 지켜보고 계셨단 말이냐?”
“어쩌면 능 공자를 지켜보고 계셨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에는 능 공자 때문에 장공주부에 가신 거니까요.”
봉회근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때, 영묘언이 불쑥 끼어들었다.
“능 공자는 폐하를 모른다고 했지만 폐하 옆의 묵백 대인과는 아는 사이인 것 같았어요.”
‘뭐라고?’
봉회근은 흠칫 놀랐다.
“묵백 대인?”
봉완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네.”
영묘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묵백 대인은 폐하와 가장 가까운 분이시잖아요. 누구도 그의 신분을 몰라 신비롭기도 하고요. 그러나 묵백 대인은 천문학에서 지리까지 모르는 게 없으신 대단한 분이시라 폐하께서도 아주 신임하고 계시고요.”
“묘언의 말이 맞아.”
봉완이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묵백 대인은 아주 신비로운 사람이지. 심지어 대인도 그의 신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신다고.”
봉회근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모부께서 대권을 쥐고 계시는데 어찌 신분조차 알 수 없는 사람이 폐하의 옆에 머물도록 하는 겁니까?”
“궁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가 알겠어?”
봉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영묘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방금 능 공자가 묵백 대인을 아는 것 같다고 했어?”
영묘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공주부에서 묵백 대인은 능 공자와 얘기를 나누셨어요. 능 공자도 묵백 대인을 아는 것 같았고요.”
“그것 참 이상한데.”
봉완은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동제의 귀족 전체에서 묵백이 먼저 인사를 건넨 사람은 없었지. 능 공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부풍전에서 돌아온 야홍릉은 탑에 기대 쉬고 있었다.
능묵은 한결같이 조용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에게서 불안한 기운이 흘렀다.
야홍릉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무시할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쉬고 있을 때, 그녀는 묵백과 영린이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 말을 모두 머릿속으로 한 번 떠올려 본 것이다.
영린이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의 반응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장공주부에 있을 때나, 궁에 들어간 뒤나, 그녀를 바라보는 영린의 시선은 관찰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녀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말하는 어조도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어색하고 예의 바르지 않았다.
황제다운 거만함도 없었다. 오히려 한담하는 듯 편하고 느긋하기만 했다.
그리고 묵백과 영린이 능묵을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이 신경에 쓰였다.
영린과 묵백의 신분으로 어영위에게 관심을 쏟는 것이 이상했다. 능묵이 좀 특별하고 실력이 강하며 좀 남다른 출신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 나라의 황제가 그를 유심히 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묵백이 능묵을 마차에 초대할 때, ‘능묵 공자’라고 불렀다.
능묵의 이름은 야홍릉이 지어준 것이었는데 묵백도 이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능묵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묵백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영린과 묵백은 오래전부터 능묵을 알고 있었다는 거지? 그리고 ‘공자’라고 부른 것도 능묵의 원래 신분이 아주 특별하고 고귀하다는 거고. 능묵의 본명을 말하면 그의 신분을 알 수 있어서 묵백이 숨기고 있는 건가?’
능묵이 역용술을 사용했다는 것을 묵백이 알아본 것은 큰일이 아니었다.
‘능묵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능묵의 진짜 얼굴도 아는 거겠지.’
게다가 궁으로 들어가는 길에 묵백은 그녀더러 능묵에게 잘해주라고 했다.
그리고 능묵이 그녀를 위해 한 일이 그녀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고 그녀에 대한 마음도 어영위로서 가져야 할 충성심을 훨씬 넘어선다고 했다.
이 말은 듣기만 해도 참으로 이상한 말이었다.
하지만 야홍릉은 이 속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열일곱 살 되는 해에 다시 태어났다.
그녀는 전생의 기억까지 모두 가지고 있으나.
능묵이라는 어영위가 전생에 나타난 적이 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생에는…….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능묵이 갑자기 공주부로 온 것이었다.
묵백의 말에서 야홍릉은 능묵이 바로 영린이 보낸 첩자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었다. 첩자의 신분을 이렇게 빨리 드러낼 사람은 없으니까.
능묵이 동제 황실이 보낸 첩자가 아닐 경우, 그가 다른 나라의 첩자일 가능성은 더욱 없었다. 만약 능묵이 다른 나라의 첩자라면 묵백이 이렇게 그를 감쌀 리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나중 세상의 모든 이들이 공주 전하를 배신해도 단 한 사람, 능묵만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공주 전하, 혹시 세상의 사람들을 모두 등지는 날이 오더라도 능묵만은 버리지 마십시오. 그는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버티지 못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