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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00)화 (10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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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너무 하십니다

한참 뒤.

영린은 시선을 들고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맑고 아름다웠다.

“공주 전하께서 동제에 한 번 오시기 쉽지 않으신데 며칠 동안 궁에서 묵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일 다시 자세한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 자세한 얘기를 한다고?’

그녀는 방금 둘이 나눈 대화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 모두 있는 그대로 얘기를 하다가 영린은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가 제일 처음 물은 사람이 영정이었지만 그가 진짜로 궁금한 사람은 절대 영정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돌고 돌아 진짜로 알아보고 싶은 사람은 감진이라는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섭정왕부로 돌아갈게요. 섭정왕부의 군주를 달랠 겸……. 오늘 장공주부에서 일어난 일로 아주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셔도 되고요.”

영린은 생각을 해본 뒤,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일찍 궁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때 다시 자세한 얘기를 하는 거로 하고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작별을 고했다.

그녀가 돌아서서 떠나려고 할 때, 영린이 말했다.

“전하께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관심이 있으신가요?”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무슨 제안요?”

“공주 전하와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 제가 누님으로 모셔도 될까요?”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제안 드리는 것입니다.”

영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동제 공주의 신분이 큰 이득을 가져올 것입니다. 제가 장담하지요.”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소문으로 듣자니 폐하와 장공주 영가는 사이가 좋다던데요.”

“네, 헛소문이 아닙니다.”

영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저와 누님의 사이가 좋은 것과 제가 누님을 한 분 더 모시는 것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 동생이 필요하지 않은데요.”

“황제인 동생은 없을 게 아닙니까?”

묵백이 말했다.

“황제인 동생이 있다면 공주 전하께서 앞으로 동제에서 내로라하는 인물이 되실 겁니다. 장공주 영가와 마찬가지로 위엄이 대단하실 거고요.”

야홍릉은 한참 침묵을 지켰다.

“이유가 뭐죠?”

한 나라의 황제가 아무 이유 없이 그녀를 누님으로 모실 리 없었다.

“이유는 별것 없습니다. 그저 공주 전하와 인연이 깊은 것 같아서요.”

영린이 대답했다.

“잘 생각해 보시지요. 저는 진심입니다. 절대 공주 전하를 속이려는 게 아닙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 대전 밖에서 공손하게 보고를 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섭정왕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야홍릉은 의아한 마음을 억누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영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은 돌아서서 밖으로 향했다.

대전 문을 나서자마자 포복(袍服) 차림인 영위가 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영위는 소리 없이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는 물었다.

“능 공자, 지금 왕부로 돌아가는 길인가?”

“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폐하와 얘기하실 게 있으신 것 같으니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영위는 측근 호위무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능 공자와 함께 궁을 나가거라.”

“아닙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 혼자 가면 됩니다.”

영위의 옆을 지날 때, 야홍릉은 고개를 영위 쪽에 숙이고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영씨 황족에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아서 폐하도 전하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떠났다.

영위는 고개를 돌리고 말없이 훤칠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거둔 영위는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황제의 옆에 있는 묵백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검은색 포복 차림의 그는 고귀하고 신비로운 인상을 풍겼다.

묵백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영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묵 대인.”

묵백은 대전 문을 나선 뒤, 야홍릉이 떠난 방향을 쫓아갔다.

영위는 조용한 건양궁으로 들어섰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듯한 소년의 모습을 본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혔다.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소년은 정신을 차리고 피곤에 잠긴 듯,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숙, 오셨습니까?”

영위는 흠칫 놀라며 시선을 들었다.

올해부터 그는 이 소년을 볼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영린이 깨끗한 외모와는 달리, 맑고 예쁜 눈에 검은 안개가 드리운 것처럼 그의 속생각을 짐작할 수 없었다.

“오늘 상주서도 보지 못했는데.”

소년은 손을 들어 궁인더러 영위에게 차를 따르라고 지시했다.

“황숙, 시간이 되시면 좀 봐주십시오.”

영위는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말했다.

“반년만 지나면 폐하께서 열네 살 생신을 맞이하십니다. 그러니 정사를 보는 법을 배우셔야지요.”

영린은 여전히 졸린 듯한 얼굴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영위는 침묵했다.

“정사를 보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다 그러한 일들이겠지요.”

영린이 말했다.

영위는 계속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황숙.”

소년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용 무늬가 새겨진 옥패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저는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제왕이 되고 싶습니다.”

‘기억에 남는 제왕이라고?’

영위는 이 몇 글자를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순간, 그는 소년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위대하고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오랫동안 칭송하는 황제가 아니라 사람의 기억에 남는 황제가 되고 싶다고? 어떻게 기억에 남을 것인가? 좋은 쪽으로? 아니면…… 나쁜 쪽으로?’

* * *

“제 마차로 전하를 모셔다드리지요.”

묵백은 건양궁을 나서더니 순식간에 야홍릉을 따라잡았다.

“공주 전하께는 마차가 없으시잖습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걸어가면 된다.”

묵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주께서 제 마차를 타고 궁에 들어오셨으니 제가 공주 전하를 밖에까지 모셔야지요. 전 할 일도 없는데요.”

이때, 묵백의 화려한 마차가 멀리서 다가오더니 둘의 옆에 멈춰 섰다.

묵백은 야홍릉더러 마차에 오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능묵도 마차에 올랐다.

궁에 들어온 뒤, 능묵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덤덤한 얼굴에는 표정도 없었다.

“섭정왕부로 가서 얼굴에 칠한 그것을 지우지 그러오?”

묵백은 능묵의 얼굴을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볼수록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원래의 얼굴이 잘생겼으면서 왜 굳이 감추는 것이오?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까 그러오?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얼굴을 바꿔도 알 것이고 모르는 사람들은 원래의 얼굴을 드러내도 알 것이 아니오?”

물론, 이 말도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능묵은 그를 그저 공기처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묵백은 입가를 실룩이며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공주 전하께 여쭈어볼 말이 있습니다.”

‘물어볼 게 또 있다고?’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참 물어볼 것도 많구나.”

묵백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 질문은 방금 떠오른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하께 측부가 여섯 명 있다는 것을 방금 알았으니까요.”

‘도대체 누구의 생각인 거지? 공주에게 측부를 여섯 명이나 붙인 것 말이야.’

전에 야홍릉이 한씨 가문의 서자를 측부로 들였을 때만 해도 묵백은 야홍릉이 한경백을 이용해 한씨 가문을 상대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두려워 말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측부의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번에 여섯 명……. 아니지, 다섯 명을 들이는 것은 좀 이상한데. 공주의 생각은 아닐 테고? 게다가 측부의 이름을 모두 황실 종책에 올렸다니…….’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주 전하의 측부들은 나중에 자유를 되찾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들을 풀어준다고?’

야홍릉은 입꼬리를 올리고 차갑게 웃었다.

“내 사람이 되었는데 자유를 바란다고?”

묵백은 말문이 막혔다.

“내 저택에 들어온 이상 마음대로 나갈 수 없지.”

야홍릉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그들은 죽더라도 호국 공주부의 사람들이야.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지.”

묵백은 입가를 올린 채, 고개를 저었다.

“전하, 너무 빨리 장담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들의 존재가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을 테니까요.”

‘좋아하는 사람?’

야홍릉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전생에 한옥금에게 배신당해 마음을 다쳤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까지 하룻밤 사이에 목숨을 잃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녀의 예쁜 눈에 한기가 서렸다.

“나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묵백은 침묵했다.

남녀를 막론하고 정이라는 것을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처받은 기억은 아픔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그 뒤로 더 이상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곧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에 진지한 편입니다. 사람 한 명 잘못 보았다 해서 마음을 닫고 다른 사람의 진심까지 묵살해서는 안되죠. 전하,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예를 들면…….”

그는 시선을 흑의 소년에게 돌렸다.

묵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홍릉도 그의 시선을 따라 능묵을 보고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사실 저는 사랑 때문에 울고불고 난리 치며 멍청한 일을 하는 사람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묵백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이 알 수 없게 변했다.

“하지만 제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세상 사람 대다수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정에 눈이 멀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하죠.”

야홍릉이 말했다.

“지금 나와 말장난하자는 건가?”

묵백은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단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뿐입니다.”

“그럼 얘기하지 마.”

묵백은 말문이 막혔다.

“공주 전하, 말을 좀 부드럽게 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까?”

‘부드럽게 말하라고?’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폐하는 왜 나를 누님으로 모시겠다고 하는 거지?”

“전하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으니까요. 전하도 느끼셨을 것 아닙니까?”

야홍릉이 물었다.

“고귀한 황제가 왜 굳이 나와 친해지려는 건가?”

“그건…….”

묵백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쩌면……. 폐하께서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돌이키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야홍릉은 깜짝 놀랐다.

* * *

“능 공자께서 돌아오셨어요!”

이 소식이 섭정왕부에 전해지자마자 군주 영묘언은 치마를 들고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그녀는 섭정왕부의 대문 밖에 세워진 마차를 보더니 야홍릉의 앞으로 다가갔다.

“능 공자!”

마차가 멈추자 널찍한 마차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묵백은 비단 탑에 기댄 채, 야홍릉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어여쁜 얼굴을 가지고 계시면서 남장을 하고 순진한 소녀들을 속이시다니. 정말 너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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