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알아보고 싶은 사람
“공주 전하를 궁으로 모신 것은 여쭈어볼 말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 답례로 저도 묵백에게 공주 전하가 궁금한 것을 대답하라 할 거고요.”
야홍릉은 약간 놀란 눈빛으로 묵백을 힐끗 바라보았다.
영린이 한 말을 묵백도 아까 장공주부에서 했었다.
‘영린이 정말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 보군. 이 질문 때문에 직접 장공주부까지 가서 날 데려왔다는 건데…….’
야홍릉은 이 어린 황제가 그녀에게서 뭘 알아내고 싶은지 아주 궁금했다.
그녀가 동제에 온 주요 목적은 영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영린과 동제의 황궁에 있다는 무사에 대해서도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동제에 온 그녀는 많은 일이 그녀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야홍릉은 전에 도화산에서 만났던 남자가 황제 옆의 사람일 줄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능묵은 그 사람에게서 익숙하다는 느낌과 불안하다는 느낌을 동시에 받는다고 했다.
야홍릉은 능묵의 신분이 이 사람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이 사람이 뭔가를 알고 있을 수도 있어.’
능묵이 기억을 되찾는 일에 불안함을 느끼고 싫어하니 야홍릉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에 공주부에 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오후에 동제의 제경을 떠날 계획을 했었다. 그러나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장공주부에서 궁으로 이동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영린에게서 이렇게 놀라운 말을 듣고 있었다.
잠깐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물었다.
“이건 거래인가요?”
영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말없이 차를 마셨다.
영린은 야홍릉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봉회근의 고독은 전하가 해결하셨습니까?”
야홍릉은 부인하지 않았다.
“네.”
영린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왜 봉씨 가문과 엮이게 된 것입니까?”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심문인가요? 아니면 단순한 질문인가요?”
“다 아닙니다.”
영린은 고개를 저었다.
“한담이지요.”
‘그냥 궁금하다는 건가?’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겠네요.”
영린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 나라의 황제가 이렇게 체면을 구긴 것이다.
‘역시 전쟁터에서 차갑고 무정하기로 소문난 대장군다워. 목국에서도 성격이 유별난 공주로 유명하더니.’
하지만 영린은 언짢은 표정을 짓지 않고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공주 전하는 황숙과 손을 잡고 저를 상대하실 겁니까?”
말을 마친 그는 바로 한 마디 덧붙였다.
“이것은 질문입니다. 물론,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되고요.”
찻잔을 들고 있던 야홍릉은 어린 황제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그 누구와도 손잡을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물으셨으니 저도 묻지요. 폐하는 섭정왕을 어떻게 보시나요?”
그녀가 물었다.
그녀는 동제의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영린과 영위의 다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섭정왕부에 며칠 동안 묵었으니 감사의 뜻으로 한두 마디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영린이 영위 얘기를 꺼낼 때, 아주 차분하다는 것을 느꼈다.
곧 대권을 움켜쥘 어린 황제인데 현재 대권을 쥐고 있는 섭정왕에 대한 적의나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잘못된 건가? 아니면 또 숨겨진 진실이 있는 건가?’
“황숙은 영씨 황족의 섭정왕이시자 나중에 친왕(親王)이 되실 분이시죠. 그리고 병권을 가진 대장군이시고요. 황숙이 역모를 꾀하지 않는 한, 저도 그를 어찌하지 않을 겁니다.”
영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호국 공주, 제 대답이 놀라우신가요?”
‘놀랍기는 하지.’
그러나 깨끗하고 맑게 생긴 소년을 보자 야홍릉은 크게 놀라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열네 살이 안 된 소년은 샘물처럼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눈에 속내를 들킬 정도로 단순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속내가 깊은 사람이었다.
곧 직접 정사를 보게 되는 황제는 이 시기에 자신의 현명함과 결단성을 나타내 황제다워 보이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이 황제는 앉는 자세마저 제멋대로인 것이 세상만사에 진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열세 살 된 소년이 이러는 것은 너무 이상한데. 그리고…….’
야홍릉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이상한 생각을 억누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 오늘 처음 만난 거 아닌가요?”
영린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첫 만남이죠.”
“하지만 폐하께서 저를 대하는 말투가…….”
야홍릉은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절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 같군요.”
그녀는 동제의 신하가 아니라서 동제의 황제에게 굽신거릴 필요가 없다고 하나 그녀를 대하는 영린의 말투는 너무나 제멋대로였다.
그는 제왕으로서의 위엄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섭정왕부에 묵는다고 해서 따지고 들지도 않았으며 귀한 손님을 대하듯 깍듯하지도 않았다.
영린의 편하고 느긋한 행동에 야홍릉은 둘이 정말 오래된 친구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상 그들은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목국에서조차 친구는 없는 야홍릉이었다.
영린은 미소를 지었다. 옅은 색의 입술이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음, 제가 붙임성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묵백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찻잔을 든 채, 찻잔의 무늬를 열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영린과 야홍릉의 대화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침묵이 한참 흐른 뒤,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저에게 물어볼 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네, 알아볼 사람이 있어서요.”
영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구인데요?”
영린은 시선을 들었다.
그는 까맣고 투명한 시선으로 야홍릉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황형은 목국에서 어떻게 지내시나요?”
‘황형?’
야홍릉은 흠칫 놀랐다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영정 말씀이신가요?”
영린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지내요.”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괴롭히는 사람은 없어요.”
잠깐 침묵을 지킨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영정은 지금 제 측부예요.”
‘뭐?’
영린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옆에서 관심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묵백도 이 말을 듣더니 고개를 번쩍 들고 물었다.
“측부 말입니까?”
그는 ‘측부’라는 말이 나오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야홍릉의 옆에 서 있는 능묵을 바라보았다.
물론, 능묵의 얼굴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묵백은 다시 시선을 야홍릉에게 돌렸다. 그리고 속으로 감탄했다.
‘이 둘은 정말 똑같이 차가운 사람들이야. 꼭 얼음 같아……. 앞으로 어떻게 지내지?’
영린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뒤,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형이 공주 전하의 측부가 된 건……. 언제입니까?”
야홍릉이 대답했다.
“얼마 전에요.”
“이유는 뭡니까?”
아무리 인질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동제의 황자였다.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의 측부로 보내졌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모르겠어요.”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원해서 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처럼 폐하의 지시를 받고 들어온 것일 수도 있죠. 전 묻지 않았어요. 알고 싶지도 않고요.”
영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처럼요?”
‘이 말은……. 측부가 한 명이 아니라는 건가?’
“잠시만요.”
묵백은 뭔가가 떠올랐는지 당황스러운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섭정왕부에 있을 때, 첩실이 여섯 명이라는 핑계를 대며 섭정왕의 사위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거절하시던데 혹시 ‘첩실 여섯 명’이 바로…….”
“맞아.”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한테 측부가 여섯 명 있어.”
이 말에 대전 안은 순식간에 이상한 정적에 잠기게 되었다.
영린과 묵백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더니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옆에 서 있는 능묵을 바라보았다. 능묵은 여전히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눈치였다.
묵백은 입가를 실룩거렸다. 그는 처음으로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영린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전 안은 정적이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영린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가 한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공주 전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시네요.”
그는 여태까지 살면서 여자도 측부를 들일 수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없이 차를 마셨다.
한참 뒤, 영린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주의 측부들은 또 어떤 사람들입니까?”
야홍릉은 그 말을 듣더니 묵백을 바라보았다.
“공주 전하, 저를 왜 보시는 겁니까? 전 동제로 돌아온 지 꽤 되었습니다.”
묵백은 야홍릉의 뜻을 이해한 듯, 웃으며 말했다.
“저번에 도화산에서 전하와 헤어진 뒤, 더 이상 공주부의 기척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목국 황실의 일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요.”
정확히 말하면 능묵이 호국 공주부에 들어간 다음부터 더 이상 지켜보지 않게 된 것이다.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제 사생활이니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묵백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사실 궁금하긴 합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제가 사람들의 이름을 댈 테니 그들 중에 전하의 측부가 있는지 보십시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백은 생각에 잠겼다.
영정은 이미 얘기가 나왔으니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
한씨 가문의 서자 한경백의 일도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목국에 있을 때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경백이 그저 야홍릉이 한씨 가문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바둑이라고 생각했다.
이 둘을 제외하고도 아직 네 명이 더 있었다.
“목국의 황궁에 단리라고 하는 악사가 있는데 쌍둥이 형제를 양자로 들였다고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보셨는지요?”
야홍릉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백의, 단홍상.
쉽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묵백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감진이라고 하는 소년도 있을 텐데…….”
“감진?”
야홍릉은 시선을 들었다. 머릿속에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우아한 몸놀림과 매혹적인 표정이 특히 인상에 남았던 소년이었다.
“맞아, 내 측부야.”
이 말에 대전의 공기는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기나긴 침묵이 지속되었다.
야홍릉은 이상함을 눈치채고 묵백을 바라보다가 또 고개를 돌려 영린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죠?”
묵백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감진이 측부라고요?”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종책에 오른 측부지.”
찻잔을 든 영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내리깐 그의 얼굴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묵백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능묵을 바라보다 또 고개를 돌려 영린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어지럽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