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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98)화 (9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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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잘 보이려 하다

묵백은 생각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정’이라는 것이 사람을 깊게 해친다고 생각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피식 웃는 묵백이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마차는 평온하게 황궁으로 가고 있었다.

“능묵은 신은전 출신입니다. 호국 공주부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전하께 단단한 충성심을 보여드렸겠죠…….”

묵백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표정을 풀며 말했다.

“전하께서 그동안 능묵의 비밀이 점점 궁금해지셨겠군요?”

‘해독단을 복용한 뒤로 숨겨졌던 능묵의 수많은 능력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을 텐데 야홍릉이 그의 출신을 의심하지 않을 리 없지.’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능묵이 공주 전하를 위해 하신 일은 전하가 아시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영위가 주인을 위해 할 수 있는 범주를 훨씬 뛰어넘었지요.”

묵백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나중에 세상의 모든 이들이 공주 전하를 배신해도 단 한 사람, 능묵만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공주 전하, 혹시 세상의 사람들을 모두 등지는 날이 오더라도 능묵만은 버리지 마십시오. 공주님께서 그를 버리신다면 그는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야홍릉은 차가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백의 말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전하께서 제 말에 의심을 품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능묵에 연관된 일에서는 절대 음모나 술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묵백이 말했다.

“다른 것은 궁으로 가서 얘기하시지요.”

시선을 능묵의 얼굴에 돌린 묵백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그는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백은 조용히 눈을 내리깐 채, 탑에 기대앉아 있었다.

귀티 나는 얼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마차는 곧 궁 문 입구에 도착했다.

궁 문의 금위군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며 황제가 궁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묵백의 마차도 황제의 가마를 따라 궁 문으로 들어갔다. 길에서 그들을 막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잠시 뒤.

마차가 천천히 세워졌다.

능묵은 먼저 마차에서 내린 뒤, 공손하게 문발을 젖히며 야홍릉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뒤에서 내리는 묵백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들고 있던 문발을 내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야홍릉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묵백은 청색 문발을 바라보며 입가를 실룩거렸다.

곧 눈치 빠른 궁인이 앞으로 나서서 문발을 젖히고 묵백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황제도 가마에서 내린 뒤, 고개를 돌려 묵백과 야홍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건양궁(乾陽宮)으로 가시죠.”

* * *

영위는 호원이 전해온 소식을 듣고 야홍릉이 장공주부에서 시끄러운 일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바로 배도를 시켜 사람들을 데리고 장공주부에 가라고 했다.

그러나 가는 길에 배도는 멀리서 황제가 행차하는 것을 보았다. 황제가 가는 방향도 장공주부의 방향인 것을 알아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자신의 신분으로 황제와 맞설 수 없음을 깨닫고 다급히 섭정왕부로 돌아와 이 일을 섭정왕에게 알렸다.

“폐하께서도 장공주부에 갔다는 말이냐?”

영위는 이렇게 작은 일로 황제까지 왔을 줄 생각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렸다.

“능 공자 때문에 가신 것이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직접 가보시겠습니까?”

배도가 물었다.

영위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서 보아야겠다.”

배도의 속도는 아주 빠른 편이었다.

황제가 행차하는 방향을 본 다음 그는 바로 섭정왕부에 돌아가 보고를 올렸으니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영위가 직접 장공주부에 가려고 준비하는 순간, 밖에서 또 새로운 소식이 전해왔다. 황제가 능 공자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한 사람은 영묘언이었다.

영묘언은 넋이 나간 얼굴로 섭정왕부에 돌아온 뒤, 이 소식을 급급히 부왕에게 전했다.

영위도 영묘언의 말을 들은 뒤,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바로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폐하께서 능 공자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가셨다는 말씀입니까?”

배도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하신 거죠?”

배도의 질문에 영묘언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라요.”

말을 마친 그녀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

“폐하께서 능 공자는 자신의 친구라고 하셨어요. 장공주부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직접 말을 했으니 많은 사람이 들었을 거예요.”

‘친구라고?’

배도는 의아한 얼굴로 섭정왕을 바라보았다.

영위도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그를 어찌하실 생각은 없나 보군.”

“하지만 폐하가 능 공자를 괴롭히면 어떡해요?”

영묘언이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부왕, 폐하께서 능 공자의 경계를 늦추느라고 일부러 이렇게 말해서 궁으로 데려가신 건 아닐까요?”

‘상상력이 참 풍부하시군.’

배도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 나라의 황제가 사람들 앞에서 능 공자가 자신의 친구라고 말한 게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황제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인가?

황자들도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나 동무가 있다고 해도 황제로 등극한 순간부터는 황제와 신하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아내이자 나라의 국모인 황후도 황제 앞에서는 무릎을 구부리며 ‘신첩’이라고 자신을 지칭하지 않는가?

소년 황제의 삼촌이자 대권을 움켜쥐고 있는 섭정왕 영위도 황제 앞에서 자신을 ‘신’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폐하께서 직접 친구라고 말씀하셨다는 말이지?’

배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능 공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폐하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이지? 아니면 이 모든 게 폐하의 계책인가?’

“대인.”

배도는 고개를 들고 영위를 바라보았다.

“저도 이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궁에 들어가서 보시지 않겠습니까?”

영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왕…….”

영묘언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봉회근이 급급히 뛰어 들어왔다.

“고모부, 능 공자가 정말 폐하와 함께 궁으로 들어갔습니까?”

말을 마치자마자 방안에 배도와 영묘언이 있는 것을 보고 봉회근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속도를 늦추며 초조한 표정을 숨겼다.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봉회근은 말없이 앞으로 걸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부, 폐하께서 뭘 알게 되신 건 아닐까요?”

영묘언은 이 말을 듣고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폐하께서 뭘 알게 되셨다는 거예요?”

봉회근이 말하는 것은 능 공자가 바로 자신의 몸에 있던 고독을 푼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봉회근은 영위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섭정왕부에서 봉회근의 독을 치료한 사람이 능 공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섭정왕과 왕비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알아내신 거면…….’

영위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아직 섣불리 판단하지 말거라. 내가 궁에 들어가서 알아보겠다.”

어린 황제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든 언젠가 마주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어린 황제와 사이가 좀 더 일찍 틀어져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말을 마친 영위는 시선을 들고 봉회근을 바라보았다.

“능 공자의 신분에 대해서 넌 정말 아는 게 없느냐?”

봉회근은 고개를 저었다.

영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말을 준비하라고 한 뒤, 궁으로 들어갔다.

* * *

현재 건양궁은 조용하기만 했다.

궁인이 차를 올리자 측근 총관이 궁인을 데리고 물러갔다.

그들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목국의 호국 공주께서 오셨으니 제가 주인 된 도리를 제대로 행해야지요.”

소년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 전하, 앉으시지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제의 좌석 왼쪽 하석에 자리한 의자에 앉았다.

묵백이 그녀의 신분을 알고 또 그녀가 동제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황제가 알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야홍릉은 묵백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묵백은 동제에서 무슨 신분으로 황제의 옆에 있는 거지?’

영린은 용 무늬가 새겨진 병풍 앞으로 걸어가더니 비싼 동물 가죽이 씌워진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맥없이 축 늘어져 의자에 기댄 그의 모습에서는 황제다운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검은색 장포를 입은 묵백은 아무 의자나 찾아 앉았다. 자신의 집처럼 편한 모습이었다.

야홍릉은 찻잔을 들고 뚜껑으로 차 위의 거품을 살살 긁었다.

황제가 순진하고 안전한 인물로 보였지만 그녀는 영린이 정말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일수록 속내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동제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사실대로 말했다.

“별일은 아니에요. 그저 영가 장공주를 만나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누님을 만나보고 싶었다고?’

영린은 의아했다.

이런 대답을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저는 전하께서 저와 야소숙이 왕래한 증거를 찾으러 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는 영린의 말에 야홍릉도 흠칫 놀랐다.

속이 깊어 보이는 둘이었지만 대화를 할 때는 전혀 숨기거나 감추는 것 없이 털어놓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한담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 같기도 하고 두 아이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깊게 생각하거나 숨기지 않고 속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었다.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말했다.

“둘이서 왕래한 소식도 알아보고 있었으나 그것이 이번 동제 행의 주요 목적은 아니에요.”

영린이 솔직하게 터놓자 그녀도 굳이 숨길 필요를 찾지 못했다.

영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름다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말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증거를 원하신다면 제가 드려도 됩니다.”

‘뭐라고?’

야홍릉은 깜짝 놀랐다.

소년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고작 야소숙일 뿐입니다. 그는 제가 굳이 숨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아니지요. 그가 없어도 제가 원하는 일을 성사할 수 있으니까요.”

영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러면서 왜 몰래 왕래한 건데?’

“예전에는 그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영린은 야홍릉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그녀가 궁금한 부분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지금 야홍릉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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