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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97)화 (98/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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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참 말을 잘 들어

영린은 시선을 돌리더니 야홍릉의 옆에 서 있는 흑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와 함께 궁으로 들어갑시다. 능 공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그의 자태는 늠름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장공주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따질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영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의미심장한 얼굴로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능 공자.”

묵백은 웃고 있어도 사람을 꿰뚫어 보는 시선을 숨길 수 없었다.

“가시죠, 폐하께서 능 공자께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물론, 그 대가로 능 공자가 궁금해하시는 걸 저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능묵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공주부를 나선 야홍릉은 묵백의 마차에 올랐다.

“능묵……. 공자.”

마지막 두 글자가 입안에서 맴돌다 겨우 뱉어졌다. 묵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르시지요.”

능묵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야홍릉이 말했다.

“올라와.”

그제야 능묵은 대답하고 마차에 올랐다.

묵백은 투덜거렸다.

“참, 말을 잘 들어.”

능묵은 덤덤한 표정으로 마차에 탄 뒤, 야홍릉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으려고 했다.

그런데 묵백이 말했다.

“내 마차는 능묵 공자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오.”

능묵은 여전히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야홍릉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지만 눈을 내리까는 순간, 양쪽에 드리운 손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눈빛에 담긴 불안한 표정을 숨기려고 했다.

내관이 불진(佛塵, 내관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물건)을 휘두르며 높이 외쳤다.

“폐하께서 가신다.”

대내 시위는 가마를 들고 웅장한 기세로 걸어갔다.

공주부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정적에 잠겼다.

영가는 저택 밖에서 떠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이때, 심운미가 그녀의 옆으로 걸어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폐하께서 왜…….”

영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친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마지막에 남은 대내 시위마저 시야에서 멀어지자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영가는 고개를 돌리고 멍한 표정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가셨으니 그만 일어나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육청(陸靑), 호원들더러 모두 물러나라고 하거라.”

장공주부의 일등 시위장 육청이 고개를 숙이고 지시를 받았다.

그가 돌아서서 손을 내젓자 호원들이 모두 신속하게 물러났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던 정원이 순식간에 평온을 되찾았다.

“청월(晴月), 연못에 가서 알려. 오늘 꽃구경 연회는 여기서 끝났으니 알아서 집으로 가라고. 난 피곤하니 이만 방으로 들어가 쉴래.”

영가가 말했다.

장공주부의 일등 시녀 청월이 무릎을 구부리며 지시를 받았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다른 시녀들은 영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영가는 몇 걸음 걷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더 이상 따라오지 말거라.”

시녀들은 제자리에서 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심운미는 말없이 영가와 함께 떠났다.

그는 구불구불한 회랑을 지나 공주부의 주원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세가 공자들은 서로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갑작스러운 반전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폐하께서 다녀가시면서 능씨를 데려갔다고? 그리고 능 공자와 친구라고 직접 말씀하셨지. 말도 안 돼! 정말 능 공자가 폐하의 친구라고?’

조기헌은 굳은 얼굴로 중상을 입은 채, 바닥에 누워 있는 호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누가 말 좀 해주시오.”

위 공자가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그는 방금 벌어진 일로 당황한 모습이었다.

“능씨 놈이 섭정왕부의 손님이라고 하지 않았소? 왜 폐하도 아는 사이라고 하는 거지? 그것도 친구라고?”

‘신분이 얼마나 고귀해야 폐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지? 그래서 폐하를 보고도 무릎을 안 꿇은 거구나…….’

“나도 모르겠소.”

후소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장공주 전하도 어찌 된 일인지 잘 모르는 눈치였소. 폐하께서 전하와 얘기도 몇 마디 안 나누지 않았소? 폐하는 능 공자를 보러 오신 게 분명하오.”

저택에 들어와서 떠날 때까지 황제는 얼마 있지도 않았다.

평소 황제와 장공주는 사이가 좋다고 소문났지만 이번에 황제는 장공주와 두어 마디 한 게 다였다.

“우리는 이제 어떡하지?”

조기헌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차갑게 말했다.

“오늘 당한 분노는 그냥 참으라는 건가?”

“안 그러면 어쩌겠소?”

후소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폐하가 친구라고 했는데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소?”

조기헌은 당황했다.

“지금 우리는 폐하가 능 공자의 고자질을 듣고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지 걱정해야 한다오.”

후소우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이상하네.”

‘폐하가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조기헌은 표정이 변했다.

“그럴 일이 있겠소? 모욕을 당한 건 우리지 않소? 능씨 그 녀석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고.”

* * *

“능씨는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영가를 따라 널따란 공주 방에 들어온 심운미가 물었다.

“왜 폐하께서도 오신 겁니까?”

시녀가 다가와 영가의 피견을 가져갔다.

영가는 귀비탑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느긋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심운미는 탑 앞에 서서 영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무슨 말이요?”

심운미는 미간을 찌푸렸다.

“멍청이라고 한 것 말입니다.”

영가는 여전히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들이 멍청이라는 뜻이지요.”

심운미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영가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그 사람이 사내인지 여인인지도 못 알아보는데 멍청이가 아니면 뭐예요?”

심운미는 그 말을 듣더니 표정이 변했다.

“그럼…….”

차가운 얼굴의 소년이 어디를 봐서 여인이란 말인가?

영가는 탑 위에서 돌아누우며 가느다란 등을 내밀었다.

“피곤하니 좀 주물러 줘요.”

심운미는 생각을 거두고 눈을 내리깐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언제 저한테 시집올 겁니까?”

영가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제가 언제 혼인한다고 했나요?”

심운미의 행동이 멈칫했다.

그는 영가의 옆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 열일곱 살이십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실 겁니까?”

“전 혼인할 생각이 없는데요. 그 생각은 접으세요.”

영가가 웃으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심운미는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는 서리가 낀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영가.”

“부르지 마세요. 불러도 소용없어요.”

영가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심운미, 제가 진작 말했잖아요. 전 평생 혼인하지 않겠다고요. 만약 아내를 맞이하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전 간섭하지 않을게요. 원하는 사람과 혼인해도 좋으니 저를 넘보지만 마세요.”

* * *

묵백의 마차는 아주 컸다.

금사남목(金絲楠木)으로 짜인 마차는 이동하는 침실처럼 호화로웠다.

안에는 누울 수 있는 탑과 앉을 수 있는 탑, 기다란 탁자 등 부족한 것이 없었다.

탁자 위에는 향로, 찻잔, 과일 접시 등이 놓여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먼 길을 떠나는 마차인 줄 알겠지만 사실상 황궁에서 장공주부를 오가는 데 사용한 게 다였다.

마차를 타고 장공주부를 떠난 순간부터 묵백은 시선을 능묵에게 고정했다.

몸을 비단 탑에 기댄 채, 턱을 괴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년 영위를 바라보는 모습은 아주 이상했다.

그러나 능묵은 침묵을 지킬 뿐,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참 뒤.

묵백은 시선을 야홍릉에게 돌리고 물었다.

“공주 전하는 목국에 계시지 않고 동제에는 어쩐 일이신지요?”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넌 누구냐?”

묵백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난번에 도화산에서 제 신분을 묻지 않으시기에 공주 전하께서 제 신분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야홍릉은 그의 신분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동제의 황제와 엮여 있고 또 능묵이 아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만 하지 않았다면 야홍릉은 그가 누군지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능묵 공자의 역용술이 괜찮군. 신은전에서 배운 거요?”

묵백은 시선을 돌리고 꼼짝하지 않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떠오른 건지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 전하, 능묵에게 좀 잘해 주십시오. 이 자는…….”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능묵의 신분을 아느냐?”

묵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묵도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꽉 다문 입술과 무표정한 얼굴에서 희미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불안한가?’

묵백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능묵이 불안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혹시 우리가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보는 것이오?”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입술을 꽉 다문 채, 미간을 찌푸리고 경계 어린 눈빛으로 묵백을 바라보았다.

이를 본 묵백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야홍릉을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능묵의 기억은 이중으로 뒤덮여 있었다.

잠재의식 속의 기억을 되찾은 게 아니라면 묵백에게 익숙한 느낌을 받을 리 없었다.

기억을 봉인 당한 능묵은 지금 글도 모르는데 신은전 밖의 인물에게 익숙한 느낌을 받을 리 없었다.

‘날 알아본다는 것은 잠재의식 속의 기억이 돌아온 건가?’

능묵은 묵백과 아는 사이일 뿐만 아니라 아주 익숙한 사이였다.

야홍릉은 그가 묻는 것이 뭘 뜻하는지 알고 담담하게 말했다.

“위성 봉씨 가문에서 구전해독단을 한 알 먹였다.”

묵백은 그 말을 듣더니 감탄하며 말했다.

“그 비싼 해독단을 먹였단 말씀입니까? 공주 전하, 참으로 통이 크십니다.”

일반적인 해독단은 그에 대응하는 독만 칠 수 있지만 구전해독단은 달랐다.

해독단 중의 성약이라고 불리는 구전해독단은 세상에 존재하는 독의 반수 이상을 칠 수 있었다. 구전해독단을 먹으면 적어도 반년 안에는 독에 당할 리가 없어 한 알이라고 해도 아주 비쌌다.

‘이 호국 공주는 자신의 영위에게 정말 아끼지 않고 베푸는군.’

여기까지 생각한 묵백은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터뜨렸다.

“능묵, 넌 이번 생에……. 휴, 참 머리가 아프군.”

말을 마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집념이 강한 아이였는데……. 지금 보니 야홍릉도 그에게 꽤 잘해주는 것 같군. 신은전처럼 무정한 곳에서 몇 년 동안 따스함이라고는 못 느껴 봤을 텐데 주인이 조금이라도 정을 베풀면 깊게 빠져들겠지. 나중에 기억을 되찾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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