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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96)화 (9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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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내 친구입니다

조기헌은 겁을 먹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기둥에 기댄 영가를 바라보았다.

젊은 승상 역시 말없이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덤덤한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조기헌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그 생각을 지우고 미소를 지었다.

“장공주 전하의 저택이니 제가 그저 사과만 받고 끝내자는 것입니다. 만약 장공주의 저택이 아니었다면 전 저자의 목숨을 원했을 겁니다.”

영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마에 그려진 붉은 연꽃 모양의 화전에서는 요염한 아름다움이 흘렀다.

“세자는 참 용기가 가상하네요. 황숙의 귀한 손님까지 죽이려는 것을 보면요.”

조기헌은 흠칫 놀랐다가 다시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언제 죽인다고 했습니까? 위 공자 말대로 고개를 조아리고 사죄하면 그만입니다. 전 마음이 너그럽다고요.”

“그래요?”

영가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능 공자, 제 도움이 필요한가요?”

야홍릉은 대답하지 않고 영묘언의 손을 잡은 채, 회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보더니 장공주에게 도움을 청하는 줄 알고 표정이 변했다.

그들이 야홍릉을 비꼬려는 순간, 야홍릉은 영묘언을 장공주의 옆으로 떠밀었다.

“섭정왕부의 군주를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섭정왕이 이곳을 다 뒤엎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영가의 반응을 살피지도 않고 회랑 밖으로 걸어갔다.

시위들은 쫓아가며 손에 든 병기를 야홍릉에게 겨누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싸움이 곧 일어날 것 같은 팽팽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능묵.”

야홍릉이 차갑게 말했다.

“길을 막는 자는 모조리 죽여라.”

말을 마친 그녀는 허리춤에서 채찍을 꺼내 휘둘렀다.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피 세 줄기가 허공을 갈랐다.

“으악!”

“크악!”

“아악!”

비명이 연이어 들렸다. 소름이 끼치는 처참한 소리였다.

조기헌은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위 공자, 후소우와 방금 말하던 남자, 회랑에 기대어 있던 영가.

그리고 승상 심운미와 영묘언까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갑작스러운 광경에 깜짝 놀랐다.

눈앞의 소년은 사신처럼 단호하고 무정하게 검은색 채찍을 휘둘렀다.

그의 행동은 소녀가 수를 놓는 것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빨랐다.

그가 채찍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핏줄기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주변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갑자기 사신으로 변한 소년을 보자 사람들은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야홍릉은 진짜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휘두른 채찍에 맞은 사람들은 더 이상 반격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투명 인간처럼 따르는 흑의 소년은 속도가 더욱 빨랐다.

누구도 그의 행동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뼈가 빠각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다.

백 명이 넘던 호원 중 절반이 순식간에 전멸되었다. 그들은 땅에 나동그라진 채, 팔이나 목을 끌어안고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렸다.

백 명 넘는 사람 중에 일어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남은 오륙십 명도 겁먹은 표정을 지었지만 몸은 공주부의 대문을 단단히 막고 있었다.

“공주부에서 사람을 죽이다니! 능 공자, 간이 크군!”

조기헌은 소리를 지르더니 명령을 내렸다.

“궁수들을 준비시키거라. 내 이놈을 잡아서 형부에 처넣어야겠다!”

그는 화가 나기도 하고 겁을 먹기도 했다. 순간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곳이 자신의 저택이 아닌 장공주부임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갑작스럽게 난 큰 기척에 장공주부의 호원들은 병기를 들고 출동하였다.

모두가 야홍릉과 능묵을 순식간에 겹겹이 둘러쌌다.

지붕 위, 회랑 아래, 정자 뒤, 그리고 정원의 각 곳.

궁수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야홍릉과 능묵에게 활시위를 겨누었다.

영가는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말없이 자신의 호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신속하게 출동한 자신의 호원들에게 놀란 것이 아니라 능 공자라는 소년이 더욱 궁금해졌다.

“묘언, 능 공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황숙도 알고 계셔?”

그녀가 물었다.

겁을 먹었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영묘언은 한참 뒤에야 영가의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뭐, 뭐라고요?”

영가는 그녀를 흘겨보더니 고개를 돌리고 심운미를 바라보았다.

“어때 보여요?”

“무공이 뛰어나고 성격이 차가우며…….”

심운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충동적으로 행동할 아둔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영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요?”

“충분한 세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혼자서 제경의 귀족들에게 이렇게 미움을 살 행동을 하지 않겠지요. 그것도 이렇게 떠들썩하게 말입니다.”

심운미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황제가 있는 황성에서는 한두 명에게 잘못 미움을 사도 목숨을 잃을 수 있어.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많은 귀족에게 미움을 산다고? 그 이유가 도대체 뭘까?’

영가는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제가 일부러 유도한 것도 있지만 능 공자도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든 것 같아요.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고 싶은 걸까요?”

심운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듯합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는 것은 귀족들에게 잘 보여 중용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능 공자의 차갑고 도도한 성격상, 귀족들에게 빌붙으려고 이러는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이건 실력을 드러내는 정도가 아니라 살수를 뻗는 것이 아닌가?

심운미는 시선을 돌려 바닥에 드러누운 호원들을 바라보았다.

죽은 사람은 없으나 하나같이 중상을 입어 싸울 힘이 없었다.

적어도 침대에 몇 달은 누워 있어야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높은 공격 수위를 보니 절대 실력을 드러내고 싶은 정도가 아니었다.

영가는 시선을 들고 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소년을 바라보았다.

깡마른 몸과 아름다운 옆 모습이 어우러지자 날카롭고 차가운 살기가 느껴졌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매혹적으로 보였다.

영가는 입꼬리를 올리며 느긋하게 말했다.

“난 아직 저자를 이렇게 죽이기 아쉬운데…….”

심운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바로 이때, 내관의 목소리가 저택 밖에서 들려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러자 살기로 가득했던 저택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심운미는 경악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영가와 눈을 마주쳤다.

둘 다 놀란 표정이었다.

공주부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들은 급히 병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말이 끝나자 주변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야홍릉을 둘러싼 장공주부의 호원들과 대문을 막은 다른 호원들은 물론이고 야홍릉을 사지로 몰기에 바빴던 조기헌, 위 공자, 후소우, 그리고 다른 남자들도 모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심운미도 회랑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수십 명이 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무릎을 꿇었다.

커다란 저택에서 유독 깡마른 몸매의 소년만 채찍을 든 채, 우뚝 서 있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은 듯한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방향은 같지 않으나 멀리서 보면 소년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소년은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발밑에 거느린 것 같은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영가는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까지 소년의 성격과 능력을 추측하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소년은 멍청할 정도로 거만한 거야? 아니면 정말 대단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사이에 용포를 입은 소년 황제가 내관과 고수의 보호를 받으며 저택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

들어오는 소년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젊은 황제는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수묵화처럼 아름답게 생겼는데 맑고 검은 눈동자에서는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영가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회랑을 내려갔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왜 궁 밖으로 나오셨나요?”

날씨가 아주 무더웠다.

곧 정오가 되자 뜨거운 햇볕에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더위를 느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곱게 자란 세가 공자들과 소저들은 방문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용포를 입은 고귀한 황제가 무더위를 무릅쓰고 아무런 언질 없이 장공주부에 도착한 것이다.

‘왜 오셨지?’

“누님 저택에서 연꽃 감상회가 열린다 들어 구경하러 왔습니다.”

황제가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니…….”

황제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시선을 야홍릉의 얼굴에 돌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야홍릉은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고요하고 차가운 시선이 소년의 맑은 눈동자와 부딪혔다.

그녀는 말없이 서 있다가 시선을 옆에 서 있는, 성숙한 얼굴의 남자에게 돌렸다.

“당신이었어?”

우아하고 준수하며 훤칠한 키를 가진 남자.

온몸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뿜던 남자.

그는 바로 저번에 도화산에서 만났던 남자였다.

그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린 채, 흥미진진한 얼굴로 야홍릉을 훑어보았다.

잠시 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접니다.”

영가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아는 사이라고?’

“폐하께 아룁니다.”

조기헌은 고개를 쳐들고 이를 악물며 보고했다.

“신분을 알 수 없는 능씨 놈이 장공주부에서 사람을 마구 죽이고 있습니다. 이는 필히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게…….”

“폐하께 아룁니다.”

영묘언은 치마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뛰어왔다.

그리고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능 공자가 나쁜 마음을 품은 게 아니라 조 세자와 위 공자가 연합하여 능 공자를 몰아붙여서 어쩔 수 없이 반격한 거예요. 폐하께서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소녀의 말을 들은 황제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능 공자?”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 공자,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물었다.

“혼자서 오신 것도 모자라 동제의 제경에서 이렇게 떠들썩하게 일을 벌이시다니요. 패기가 대단하시군요.”

그 말에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기헌은 표정이 굳었다.

“폐하, 이놈은…….”

“이놈이라고?”

소년은 시선을 돌리고 그의 말을 잘랐다.

“능 공자는 내 친우요.”

‘뭐라고? 폐, 폐하의 친우?’

조기헌과 영묘언은 모두 당황했다.

영가는 눈썹을 치켜세웠고 다른 사람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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