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멍청이들
쾅!
조기헌은 화를 내며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자 탁자 위에 놓였던 다과가 마구 튕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고 싶으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라며 하나같이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조용히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펼쳐지기를 바랐다.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능씨 소년이 무릎을 꿇고 사정하는 모습을 기대했다.
영가는 천천히 시선을 들더니 화를 내는 조기헌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자,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전하께서는 오늘 처음으로 저 능씨를 보았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자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면 전 절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조기헌이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도 이자를 감싸시려는 겁니까?”
영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느긋하게 말했다.
“제가 감싸겠다고 한다면 세자가 어찌할 건데요?”
조기헌은 주먹을 움켜쥐고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이자가 절 모욕하는 것을 전하께서도 직접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영가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조기헌은 이를 악물었다.
화청 안의 분위기는 팽팽했다.
야홍릉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여유롭게 옷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일어서며 말했다.
“전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영가는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능 공자, 지금 가시려고요?”
‘지금 떠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
“가고 싶어?”
조기헌은 야홍릉을 노려보며 냉소를 지었다.
“패기는 인정하지.”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그들은 이 능씨 소년이 순진한 건지 아둔한 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지금 떠난다고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영묘언도 따라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도 능 공자와 함께 갈 거예요.”
그녀는 섭정왕부의 호원을 육십 명이나 데려왔다.
그래서 이들이 능 공자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누가 감히 능 공자에게 손을 대는지 두고 볼 거야.’
야홍릉의 곁으로 다가간 영묘언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다시 말할게요. 능 공자는 섭정왕부에 오신 귀한 손님이에요. 능 공자에게 무례를 범한 사람은 저와 부왕에게 무례를 범한 것과 같아요. 그러니 일어날 결과를 잘 생각해 보시고 행동하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영가를 바라보며 도발적인 말을 건넸다.
“이곳의 풍경도 그저 그렇네요. 장공주 전하, 당신의 어중이떠중이들과 함께 실컷 구경하세요.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야홍릉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어갔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손을 잡은 소녀의 하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급한 발걸음까지 지켜보았다. 매섭게 쏘아붙여도 열 살이 갓 넘은 소녀인지라 마음속은 겉모습과 달리 겁을 먹은 듯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녀를 따라 연못의 화청을 나갔다.
“능 공자, 잠시만요.”
영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이 말은 불난 데 부채질하는 꼴이었다.
차갑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이 말로 불이 지펴졌다.
심운미는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조기헌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으며 실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위 공자도 매서운 눈빛으로 야홍릉을 노려보았고 후소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화청에 들어온 뒤로 조용하게 침묵을 유지했던 소저들은 숨을 죽이고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오늘은 남자들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일으킨 장공주와 영묘언을 제외하고 다른 여인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영가는 우아하게 일어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회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준비한 활동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고요.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능 공자를 바래다 드리고 금방 돌아올게요.”
후소우가 말했다.
“전하께서 직접 배웅하시는데 저희가 어찌 가만히 앉아만 있겠습니까? 저희도 함께 능 공자를 배웅하지요.”
말을 마친 그는 영가의 반응을 살피지도 않고 일어서서 따라갔다.
위 공자는 술잔을 내려놓고 옷을 툭툭 털더니 성큼성큼 화청을 나섰다.
다른 남자들도 덩달아 화청을 나갔다.
그렇게 되니 가장 먼저 일어섰던 영가가 오히려 가장 뒤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씩씩거리며 나가는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화청에 앉아 있는 남자는 심운미 밖에 없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고개를 들어 영가를 바라보았다.
영가도 심운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공주 전하, 지금 이게 무슨 뜻입니까?”
“뭐가 무슨 뜻이라는 거죠?”
영가는 차분하게 되물었다.
그리고 불안한 표정의 소저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여인들은 가지 마세요. 이따 일어날 일들은 곱게 자란 소저들이 볼 만한 게 아니니 여기에 남는 게 좋겠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화청을 떠났다.
심운미는 그녀의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따라갔다.
“능씨 소년은 곱상하게 생긴 것 말고 특별한 점이 있습니까? 공주 전하는 왜 그를 이렇게 특별하게 대우해 주시는 겁니까?”
심운미는 차가운 분위기를 지우고 한담을 하듯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이 이렇게 커지는 게 정말 전하가 바라시던 일입니까?”
영가는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심운미.”
심운미는 영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승상의 자리에 올랐는지 모르겠네요. 당신뿐만 아니라 방금 그들도…….”
그녀는 비웃으며 말했다.
“다 멍청이들이에요.”
심운미는 깜짝 놀랐다.
영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어중이떠중이, 멍청이…….
그들에게 꼭 맞는 말이었다.
* * *
“주인님.”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능묵이 입을 열었다.
“공주부의 앞뜰에 사람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야홍릉은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괜찮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녀가 연못을 떠난 이유는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저 아름다운 풍경을 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능묵이 대답했다.
“네.”
구불구불한 회랑을 지난 뒤, 영묘언이 물었다.
“능 공자,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바로 사람을 보내 부왕을 불러올게요. 누가 감히 부왕의 앞에서 무례를 범하는지 봐야겠어요.”
그 말을 들은 야홍릉은 발걸음을 멈추고 영묘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군주께서는 섭정왕부가 시끄러운 일에 휘말리는 것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영묘언은 깜짝 놀랐다.
“능 공자?”
“이 일은 군주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또한 섭정왕부와도 상관이 없지요.”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혼자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허나…….”
“더는 얘기하지 마십시오.”
야홍릉은 그녀의 말을 자르며 살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바로 마차를 타고 돌아가셔서 섭정왕에게 알리세요. 저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시라고.”
영묘언은 표정이 변했다.
“능 공자, 제 부왕은 그렇게 나오실 분이 아니세요…….”
“군주께서 제 뜻을 오해하셨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겁니다. 전 그 누구의 상황도 살피고 싶지 않습니다.”
야홍릉이 대답했다.
장공주부는 아주 컸다.
그들은 정원의 오솔길을 지나 앞뜰로 향했다.
야홍릉과 영묘언이 앞뜰에 도착했을 때, 커다란 정원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칼을 찬 호원들은 장공주부의 대문을 물샐틈없이 막고 있었다. 옷의 색깔이 미세하게 다른 것을 봐서 각자 다른 저택에서 온 듯했다.
왼쪽 수십 명의 호원들은 짙은 청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자락에 “조” 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조씨 가문에서 온 호원인 듯했다.
대문을 막고 있는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자락에 ‘위’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과 다른 곳에 서 있는 호원들까지 합하면 얼추 백 명은 넘는 듯했다.
야홍릉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깡마른 몸에서 남다른 패기가 흘러나왔고 그녀의 얼굴에서도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능 공자, 패기는 좋으나 오늘 너무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사서 공주부를 무사히 빠져나가긴 어려울 것 같소.”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홍릉이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해 여유를 부리는 듯했다.
“장공주 전하가 능 공자를 지켜줄 수 있으시나 능 공자는 공주 전하의 호의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소.”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말을 하는 조기헌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야홍릉을 독 안에 든 쥐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큰일도 아니지.”
위 공자도 따라오며 짐짓 너그러운 듯, 제안을 건넸다.
“오늘은 다들 장공주 전하의 연회에 참석하러 온 자리이니 전하의 기분을 잡치게 할 수는 없지 않소? 능 공자가 예의와 법도를 모른다고 해도 공주 전하를 생각해서 우리 모두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소. 능 공자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한다면 우리 모두 너그럽게 능 공자를 용서해줄 수 있소.”
후소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만약 능 공자가 신분과 출신을 밝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한다면 나한테는 고개를 조아리지 않고 사과만 하면 된다오.”
“그러게 말이오. 능 공자는 신분도 밝히지 않으면서 고귀한 장공주 전하와 한자리에서 먹고 마실 수 있다니. 그 용기가 감탄스러울 뿐이오.”
위 공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웬만하면 능 공자는 신분을 밝히는 게 좋을 것이오. 형부의 고문은 능 공자처럼 왜소한 몸집이 받아낼 수 있는 게 아니오.”
영묘언은 입술을 앙다문 채, 차가운 얼굴로 능 공자를 괴롭히는 세가 공자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능 공자와 함께 장공주부의 연회에 참가했을 뿐인데 이런 상황이 일어날 줄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후회하는 마음에 속만 끓이고 있었다.
그녀는 섭정왕부의 호원이 이미 부왕에게 알리러 갔기를, 그래서 부왕이 얼른 사람을 데리고 와 그들을 이 곤경에서 구해주기를 바랐다.
‘부왕만 온다면……. 이 백 명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지.’
굳이 섭정왕의 병권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섭정왕부의 사사들만 해도 곱게 자란 공자들을 손쉽게 혼내줄 수 있었다.
“능 공자?”
조기헌이 느릿한 어조로 재촉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시오.”
“조기헌.”
영가는 회랑의 기둥에 기댄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저택에서 일을 벌인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 모르시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