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날카로운 시선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양옆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시선을 바라보았다.
좀 멀리 떨어진 귀족 소저들을 제외하고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적의로 가득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충동적인 성격을 가진 조기헌의 눈빛이 가장 매서웠다.
젊은 승상 심운미는 영가의 하석 첫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입술을 깨문 채, 술잔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야홍릉은 갑자기 예전에 한경백을 데리고 도화산에 갔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상황도 이것과 비슷했었지.’
야홍릉은 줄곧 옥신각신하고 톡톡 쏘아붙이는 것이 여인들만 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여인들은 체질적으로 유약하여 칼부림하거나 몸을 쓰는 경우가 적어서 말다툼하고 꼼수를 쓰는 게 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비단 여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이제 보니 사내들도 여인 못지않았다.
야홍릉은 입꼬리를 슬쩍 올린 채, 영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통쾌하게 그녀와 술잔을 부딪쳤다.
“공주 전하께서 매일 오늘처럼 기분이 좋으시기를 바랍니다.”
순간, 화청의 공기가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조기헌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저도 그러고 싶네요.”
영가는 술을 홀짝이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제 눈앞에서 알짱거리니 기분이 어떻게 좋아지겠어요? 능 공자, 내일에 혹시 시간 되세요? 제 저택에 놀러 오실래요?”
‘약속을 잡아? 난 아예 안 보이는 건가?’
영묘언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영가를 바라보았다.
다른 남자들은 모두 차가운 눈빛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그녀더러 주제 파악을 하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만약 그녀가 정말 영가의 초대에 응한다면 그들은 오늘 밤에 바로 그를 해코지할 생각이었다.
“죄송하지만 내일은 시간이 없습니다.”
야홍릉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공주 전하의 초대에는 감사드립니다.”
야홍릉은 그녀에게 전혀 겁을 주지 못한 시선 때문에 영가의 초대를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그녀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오늘 오후에 동제의 제경을 떠날 생각이었다. 더는 이곳에서 할 일이 없었다.
질투로 가득한 남자들이 어여쁜 장공주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기루에서 남자들이 기녀 한 명을 두고 아웅다웅 다투는 것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다른 점이라면 주인공 여인이 기녀보다 신분이 높을 뿐이었다.
‘장공주 영가는…….’
야홍릉은 영가가 이들의 다툼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우아하고 고귀한 장공주는 그녀의 관심을 받으려고 아웅다웅 다투는 세가 공자들이 꼬리털을 자랑하는 공작새처럼 전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 공작새들은 제경의 반수 이상의 권력과 세력을 대표했다.
“주제 파악은 하는군.”
연회석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표정이 어두운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능 공자께서는 섭정왕부의 귀한 손님이라고 하셨는데 섭정왕과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오?”
영묘언은 드디어 말할 기회를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코웃음을 치며 끼어들었다.
“능 공자가 우리 부왕과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공자에게 보고라도 드려야 하나요?”
말을 꺼낸 사람은 안국공부(安國公府)의 세자 후소우(侯少宇)로, 그는 올해 스물다섯 살이었으며 아주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 년 전, 과거 시험에서 선황이 직접 그를 합격자로 찍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호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안국공은 예전에 조정에서 실권을 움켜쥔 사람이었다.
선황이 황위에 있을 당시 안국공과 조씨 가문은 모두 호황을 누렸던 권신이었다.
하지만 선황이 죽고 섭정왕이 집권하게 되면서 조씨 가문과 안국공은 실권을 잃게 되었다. 지금 그들에게 남아있는 직책은 그저 이름뿐이었다.
그래서 안국공과 군왕 가문에서는 섭정왕을 아주 미워했다.
어린 황제가 곧 실권을 되찾게 되자 그들은 최선을 다해 황제를 도우며 예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 권력을 움켜쥔다면 어린 황제의 눈엣가시인 섭정왕부가 무사할 리 있겠는가?
그래서 후소우는 영묘언의 비꼬는 말에도 코웃음만 칠 뿐, 굳이 따지지 않았다.
“능 공자는 집이 어디십니까?”
젊은 승상이 시선을 들고 물었다.
그는 원래의 점잖고 느긋하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능 공자의 가문은 뭘 하는 집안이오?”
야홍릉은 술잔을 들고 시선을 내리깐 채, 말했다.
“미안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소.”
담담한 그녀의 말에서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영가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다들 그녀가 왜 웃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하얀 손가락으로 탁자 위의 대나무 꼬지를 들고서 접시에 놓인 배 한 조각을 찍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실눈을 뜬 채, 느긋하게 달콤한 배 맛을 즐겼다.
후소우는 고개를 들고 평온한 시선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그는 야홍릉이 심운미의 신분을 몰라서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짐짓 엄숙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말씀을 물으신 분은 재상 대인이시네.”
야홍릉은 조용히 술을 마신 뒤, 시선을 내리깔 뿐.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후소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심운미와 시선을 교환했다.
‘능 공자……. 단지 장공주의 관심을 받았다고 거만하게 구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원래부터 이렇게 건방진 사람인건가?’
“능 공자, 배 드세요.”
영가는 자신이 쓰던 꼬지로 배를 찍어 야홍릉의 입가에 가져갔다.
“아주 달아요. 제가 방금 먹어 봤어요.”
심운미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쓰던 것을 쓰지 않습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영가는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누가 봐도 그녀가 무안을 당한 상황이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능 공자처럼 기품 있는 사람이 왜 다른 사람이 사용하던 꼬지를 쓰겠어요?”
영묘언은 고소한 얼굴로 영가를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능 공자가 공주 전하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던 어중이떠중이들과 같은 사람인 줄 아세요?”
그러자 영묘언에게 어중이떠중이라는 말을 들은 공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조용해졌다.
영가는 느긋하게 꼬지를 가져와 배를 자신의 입에 넣었다.
그리고 빨간 입술을 오물거리며 배를 먹었다.
야홍릉은 여전히 술잔을 든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싸늘했다.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상큼한 연꽃 향이 바람과 함께 불어왔다.
심운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팔꿈치를 다리 위에 놓았다.
그리고 턱을 괸 채, 평온한 시선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야홍릉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더 깊어졌다.
“난 동제 백관의 우두머리로 항상 동제의 강산을 지키고 폐하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오. 또 제경에 적이 들어오지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오.”
담담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아주 듣기 좋았으나 싸늘하고 위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만약 능 공자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면 오늘 이 공주부를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오.”
이 말에 연회에 참가한 공자들은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역시 승상 대인이시군. 입을 열자마자 허를 찌르셨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섭정왕부와 가깝게 왕래하고 있다.
그 사람에게 반역심을 품은 적이거나 적국의 첩자라는 죄명을 씌운다면 섭정왕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섭정왕에게 능 공자의 신분과 그의 결백을 입증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 말이다.
안 그러면…….
위 공자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승상 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운미.”
영가가 고개를 천천히 들며 말했다.
“내 저택에서…….”
“공주 전하, 오해하셨습니다.”
심운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능 공자는 공주부에서 묵고 가지는 않겠지요. 제가 능 공자에게 말을 묻는다 해도 연회가 끝난 다음에 행할 것이니 전하의 기분을 망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영가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깐 채, 술만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심운미의 말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반응에 놀랍기만 했다.
‘정말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안 그러면 이렇게 침착할 수가 없잖아?’
야홍릉은 현재 동제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었다.
장공주의 저택에 들어온 뒤에 본 상황으로 판단하면 동제의 현재 상황은 어린 황제와 섭정왕이 권력을 놓고 싸운다고 하기보다는 문관과 무장의 세력 다툼이었다.
장공주의 연회에 온 사람들 중 귀족 여인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출신이 대단하거나 예전에 출신이 대단했던 세가의 공자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야홍릉은 그들이 대부분이 문관 가문의 출신이고 그들도 문인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야홍릉이 동제의 제경에 처음 온 날에 보았던 배 장군은 섭정왕 휘하의 무장이었다.
무장은 무장의 분위기가, 문관은 문관의 분위기가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야홍릉도 무장이어서 문관, 무장 사이에 대한 정보에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사람들의 말속에서 중요한 정보를 잡아내고 상황을 판단했다.
“능 공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조기헌은 아까의 우울한 표정 대신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어떻게 빠져나갈까 생각하는 것이오? 아니면 어떻게 적국의 첩자라는 죄명을 반박할까 생각하는 것이오?”
“조기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영묘언은 화난 얼굴로 노려보며 말했다.
“능 공자는 섭정왕부의…….”
“능 공자는 섭정왕부의 귀한 손님이시죠. 군주께서 이미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조기헌은 한 마디 덧붙였다.
“제 귀가 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영묘언은 화를 버럭 냈다.
“조기헌!”
“군주, 화내지 마십시오.”
야홍릉이 느긋하게 시선을 들며 말했다.
“개가 짖는 것에 굳이 대꾸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뭐라고?’
조기헌은 고개를 돌렸다. 가까스로 돌아왔던 안색이 다시 어둡게 변했다.
그는 독기로 가득한 눈빛으로 야홍릉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야홍릉은 차가운 시선에 살기를 담고 되물었다.
“못 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