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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93)화 (9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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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제 마음에 쏙 들어요

야홍릉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여인의 미소 어린 시선과 마주친 그녀는 뭐라고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영가는 고개를 돌리더니 사람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와 함께 저쪽에 가서 앉아 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앞으로 걸어갔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사람들의 독기 어린 시선을 받으며 장공주에게 손이 잡힌 채로 걸어갔다.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줄곧 온화하고 느긋한 모습을 유지하던 심운미도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온몸에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위 공자와 조기헌은 표정이 더욱 어두워져 야홍릉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영묘언은…….

소녀는 외롭게 홀로 서서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능 공자를 데려온 건 영가의 기를 누르려 했던 것인데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의 능 공자를 영가가 빼앗아 갔을 뿐만 아니라 이 일로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영가가 설마 일부러 이러는 건가? 능 공자가 미움받게 하려고?’

“군주.”

녹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저랑 함께 가시죠. 공주부의 연꽃이 아주 예쁘게 피었더라고요. 방금 영계(寧溪)와 함께 다녀왔는데 아주 아름다웠어요.”

영묘언은 고개를 돌리고 말을 건네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진국공부의 적녀인 소동(蘇彤)이었다.

영묘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국공부의 가주 부인과 섭정왕비는 사이가 꽤 좋았다.

조정의 일은 그녀와 상관이 없었으나 오늘 꽃구경도 정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능 공자가 다른 연적들에게 해코지당하지 않도록 지키는 거야.’

그래서 영묘언은 질투의 마음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녀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연못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장공주의 돌발행위로 다들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공자들은 우울한 표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냈다.

영묘언도 소동과 영계와 함께 구불구불한 정원 오솔길을 따라 연못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때는 여름이라 무덥기 그지없었다.

장공주부는 너르고 풍경이 독특했다.

커다란 저택에서 연못은 가장 시원한 곳이었다.

호숫가에는 끝없이 펼쳐진 버드나무가 연못을 둘러싸고 있었다. 파란 호수에 빨간색 연꽃이 떠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햇살이 호수에 비치자 맑은 호수에 금빛이 반짝거렸다. 시원한 바람이 호수에서 불어오며 향긋하고 상큼한 연꽃 향을 풍겼다.

호수에 세워진 기다란 다리에 서 있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것만 같았다.

영가는 야홍릉의 손을 잡고 다리 위에서 느긋하게 걸었다. 그녀는 등 뒤에서 칼같이 꽂히는 매서운 시선들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능 공자는 어디에서 오셨나요?”

영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처자식은 있나요?”

장공주다운 발언이었다.

그녀는 단번에 핵심을 콕 찍었다.

뒤에 서 있던 심운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우아한 여인을 노려보았다.

“자식도 없고 아내도 없습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첩실은 여섯 있습니다.”

‘첩실이 여섯 명이라고?’

영가는 눈을 깜박이며 미소를 지었다.

“능 공자는 참 복이 많네요. 허나 말라 보이는 몸으로 첩실 여섯 명을 다 거느릴 수 있겠어요?”

야홍릉은 앞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장공주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전 공주의 부마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영가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만약 제가 능 공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평생 능 공자만 좋아할 거라고 해도 싫으신가요? 저는 장공주이고 실권도 가지고 있지만, 뼛속 깊이 여인이에요. 저는 삼종사덕을 따르고 남편을 하늘로 섬기며 자식을 가르치고 시부모님을 봉양하는 게 좋아…….”

야홍릉은 입가를 실룩거렸지만 여전히 흔들림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 전하는 소문과는 많이 다르시군요.”

“그래요? 소문은 어떤데요?”

영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야홍릉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공주 전하께서 그저 평범한 아내가 되고 싶으시다면 오늘 저택에 오신 여러 귀공자가 그 소원을 들어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능 공자가 아닌걸요.”

영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러자 능 공자와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그녀의 빨간 입술은 야홍릉의 귀에 닿을 정도였다.

“세상의 남자들은 다 별로예요. 유독 능 공자만 깨끗하고 고결하여 제 마음에 쏙 들어요.”

참 이상한 공주였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제가 장공주의 부마가 되고 싶은지 차치하더라도 전하의 이런 행위는 제가 모든 사람의 적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고도 절 좋아하신다고요?”

야홍릉은 입꼬리를 쓰윽 올리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공주 전하가 저에게 첫눈에 반한 줄 알겠지만 저는 공주 전하가 절 사지로 모는 걸로 보입니다.”

“그럴 리가요?”

영가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능 공자가 제 부마가 되어준다고 하면 그 누구도 감히 능 공자를 괴롭히지 못할 거예요.”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제가 싫다고 하면요?”

영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능 공자는 왜 싫으신데요? 제가 예쁘지 않나요?”

“아름다우십니다.”

“그럼 됐죠. 능 공자는 제가 독한 사람으로 보이세요?”

영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새하얀 얼굴에 아련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는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야홍릉은 표정이 살짝 굳어졌으나, 곧바로 담담하게 말했다.

“세상에는 독하지 않은 미인은 많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들을 모두 아내로 맞이하겠습니까?”

“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요.”

영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 미인들은 충분히 아름답지 않다거나 마음씨가 충분히 착하지 않겠지요. 아니면 아름답고 마음씨도 착하나 능 공자에게 이런 요구를 꺼내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그들이 능 공자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감히 말을 못 꺼낸 거겠네요.”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말했다.

“말을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능 공자는 받아들이지 않으신 건가요?”

영가가 웃으며 말했다.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능 공자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아름답지 않았나 보네요.”

야홍릉이 말했다.

“장공주의 아름다움도 제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거짓말.”

영가는 콧방귀를 뀌더니 도도하게 말했다.

“뒤에서 저를 늑대처럼 노려보는 사람들 좀 보세요. 침이라도 흘릴 기세잖아요.”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화청에는 연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족히 서른 장 정도 되는 좌석은 오늘 온 귀공자와 소저들이 앉기에 충분했다.

화청 중앙에 융단이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서 열예닐곱 살 된 소녀가 앉아서 눈을 내리깐 채, 금을 타고 있었다.

은은한 금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분홍색 옷을 입은 소녀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느긋하게 차를 끓이고 있었다. 그 자태는 우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향긋한 차향이 사람들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영가는 야홍릉을 데리고 다리를 건너 화청에 들어왔다.

금을 타던 소녀와 차를 끓이던 소녀는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공손히 무릎을 굽힌 뒤, 예를 올렸다.

영가가 담담하게 말했다.

“계속하여라.”

소녀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무릎을 꿇은 채, 금을 타고 차를 끓였다.

아름다운 곳에 아름다운 사람까지 더해지자 보는 사람들의 기분이 좋아졌다.

영가는 야홍릉의 팔을 잡은 손을 풀고 하인더러 상석 옆에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하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야홍릉을 자신의 옆자리에 초대했다. 그 행위에 야홍릉은 또 칼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눈총에 시달려야 했다.

“전하, 이것은 법도에 어긋난 듯합니다.”

위 공자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귀하신 전하께서 어찌 신분도 확실치 않은 소년과 함께 앉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공주 전하를 욕보이는…….”

“이건 제 저택이니 제 마음대로 하려고요.”

영가는 시선을 들고 그를 바라보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위 공자께서는 혹시 불만이신가요?”

위 공자는 그 말을 듣더니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깐 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씩씩거렸다.

영가는 모른 척했고 야홍릉도 담담하게 영가의 뜻에 따랐다.

그녀는 장공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지 보고 싶었을 뿐, 다른 사람들의 적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두 시녀는 높이가 일 척에 이르는 황리목(黃梨木) 탁자를 가져와 공주 탁자의 옆에 놓았다.

탁자 위에는 신선한 과일과 다과, 그리고 술이 있었다.

“능 공자, 드시지요.”

영가는 고개를 돌리고 능 공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애틋한 눈빛에 다른 사람들은 질투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영가는 자신의 행위가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고개를 들고 화청에 들어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평온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앉으시지요.”

말을 마친 그녀는 먼저 착석했다.

다른 사람들은 장공주의 특별 대우를 받는 소년을 칼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난도질했다. 사람들은 질투와 불만을 품은 채, 자리에 앉았다.

연못의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화청의 공기도 아주 좋았다.

연못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는 연꽃의 상큼한 향이 묻어 있어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웬 얄미운 소년이 장공주의 모든 시선과 관심을 독차지했으니.

남자들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그들의 눈에 들어오지 못했다.

“능 공자께서 제 저택에 오시니 며칠 동안 우울했던 기분이 확 풀리네요.”

영가는 몸을 옆으로 돌리고 직접 야홍릉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제가 술 한 잔을 권할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또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면서 야홍릉에게 눈치를 주었다.

“장공주 전하는 신분이 고귀하신 분이니 능 공자가 정말 주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전하와 술잔을 부딪힐 수 없을 겁니다.”

조기헌이 싸늘하게 말했다.

“어디에서 온 것인지도 모르는 잡놈이 곱상한 외모로 전하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루아침에 고귀해질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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