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철없이 굴지마
영묘언은 화가 나 안색이 퍼레졌다.
“입 다물어요! 무슨 막말을 하는 거예요?”
“군주.”
야홍릉이 느긋하게 영묘언을 제지하며 말했다.
“화낼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영묘언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가 덜 풀린 그녀의 얼굴에는 미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야홍릉은 시선을 돌리고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가득 몰려들었다.
대다수가 화려한 옷차림의 공자들과 우아하고 단아한 귀족 소저들이었다.
방금 말을 한 사람은 현 태후 위씨의 남동생이었다.
황제는 이제 열세 살이 되었고 태후 위씨도 올해 서른이 갓 넘은 나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늘그막에 아들을 보았다. 그래서 태후의 남동생은 올해 스무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위씨 가문에서 애지중지하며 키운 인물이었다.
가장 먼저 시비를 건 조기헌은 선황의 의동생 조 군왕의 유일한 적자였다. 조씨 가문은 선황 시기에 총애를 받은 가문이라서 수십만 명의 병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곱게 큰 조기헌은 겁 없고 잘난 척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선왕이 세상을 뜨고 섭정왕이 권력을 쥐면서 조씨 가문의 병사들은 모두 영위의 손에 넘겨졌다. 이 일은 조 군왕의 한이 되었다.
결국 그들은 자연스럽게 섭정왕부와 사이가 나빠졌다.
그래서 조기헌이 영묘언의 체면도 봐주지 않았던 것이다.
세 번째로 입을 연 사람은 연퍼런색 장포를 입고 있는 열일곱 살 소년이었다. 피부가 하얀 그는 아주 곱상하게 생겼다.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능 공자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뚜렷한 악의가 담겨 있었다.
야홍릉은 소매를 툭툭 턴 뒤, 앞으로 두어 걸음 나서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겨냥하는 세 남자와 구경하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잠시 뒤,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오?”
그녀의 말투는 싸늘하나 무심하게 느껴졌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하는 게 뭐냐고? 자신의 분수도 모르네.’
“오늘은 장공주가 개최한 연꽃 감상회요. 우리는 모두 공주의 손님이니 공주를 봐서라도 일을 크게 벌이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위 공자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능 공자가 헌 세자에게 진심으로 사죄하시오. 앞으로 헌 세자를 보면 멀리서부터 피해 다녀 헌 세자의 기분을 더럽히지 말고, 또 헌 세자의 길을 막지 않…….”
“하하하하!”
이때, 차가운 웃음소리가 위 공자의 말을 잘랐다.
주변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영묘언이 차갑게 말했다.
“위 공자, 지금 공적인 장소에서 섭정왕부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건가요? 제가 부왕을 모셔올 테니 직접 얘기해 보실 건가요?”
위 공자는 미소를 지었다.
“군주, 오해십니다. 능 공자가 먼저 우리에게 뭘 원하냐고 물어봐서 원하는 것을 말한 것뿐입니다.”
“오해고 말고 중요하지 않소.”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차가운 목소리는 만년설처럼 차가웠다.
“나더러 사과하라고? 그럴 자격이 있는지 거울이나 보시오.”
그 말에 공기가 다시금 얼어붙었다.
위 공자는 표정이 굳었다. 방금 전의 여유롭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영묘언은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를 올렸다.
‘능 공자, 역시 패기 넘쳐.’
“오늘 온 사람들이 모두 장공주의 손님이긴 하나 능 공자도 그럼 가문을 밝히시오. 당신의 배경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들 알 수 있게.”
조기헌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안 그러면 하루 사이에 귀족 두 명에게 밉보인 것이오. 그 죄를 감당할 수나 있겠소?”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방금 말했다시피 내 신분을 당신은 알 자격이 없소.”
조기헌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너…….”
“장공주 납시오!”
커다란 목소리에 구경하던 사람들도 흠칫 놀랐다.
팽팽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지며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걸어오는 장공주를 바라보았다.
야홍릉은 수많은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흠모와 아련함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곧 그들은 눈을 내리깔고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장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공주 전하 만수무강 하십시오!”
사람들이 예를 올렸다.
야홍릉도 눈을 내리깐 채, 영묘언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야에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걸어오는 여인이 보였다.
바로 장공주 영가였다.
장공주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열예닐곱 살 되는 그녀는 청순하고 빼어난 용모를 가지고 있어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바닥에 닿는 하얀색 궁장을 입고 있었는데, 긴 치마가 그녀를 더욱 늘씬하게 부각시켜 주었다. 겉에 면사 피견(披肩)을 두른 그녀는 새하얗고 가는 목과 쇄골을 드러낸 채였다.
이마에는 연꽃 모양의 빨간색 화전이 찍혀 있어 청순한 가운데 요염한 기운도 풍겼다.
그녀는 비단결 같은 머리를 흩날리며 사뿐사뿐 걸어왔다.
햇빛에 드러난 그녀의 말쑥한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고, 마치 속세에 내려온 선녀라고 해도 과하지 않았다.
과연 남자들의 혼을 쏙 빼놓을 만한 미모였다.
야홍릉이 영가를 보는 순간, 영가의 맑고 깨끗한 눈동자도 영묘언을 스쳐 야홍릉의 얼굴에 닿았다.
두 쌍의 눈이 마주치자 주변의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조용해졌다.
곧 여인은 입꼬리를 올리고 옅게 미소를 지었다.
“묘언아, 나에게 이 공자를 소개해줘야지.”
영묘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능 공자는 섭정왕부에 오신 귀한 손님이에요.”
단 한 마디뿐이었다.
그러나 영가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여전히 부드러운 시선으로 야홍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능 공자, 참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계시네요.”
이 말에 다른 남자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야홍릉은 곁눈질로 주변 남자들의 반응을 지켜보고는 감정을 숨긴 채, 담담하게 말했다.
“공주야말로 선녀 같으십니다.”
영가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전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능 공자는 다른 남자들과 비하면 외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분위기가 달랐다.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는 천성적인 것이지 억지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성적인 것이야말로 고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야홍릉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문은 역시 믿을 것이 못 되는군.’
왕기주루의 사장은 영가가 여린 미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직접 보니 영가는 여린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절세미인들은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영가 같은 미인은 미간만 살짝 찌푸려도 남자들은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몰랐다.
그러니 여리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영묘언의 말도 맞지 않아.’
영가는 잘난 척, 으스대지도 않았다. 혹시 그런 점이 있더라도 뼛속 깊이 새겨진 도도함이자 부드러운 외모에 감춰진 황실 공주의 자부심이었다.
그것은 속되게 잘난 척하고 으스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방금 영묘언과의 짧은 대화에서 영묘언은 기질로는 완패했다 볼 수 있었다. 영가는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또는 그녀와 다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분위기였다.
“군주와 능 공자는 장공주를 뵙고도 예를 올리지 않는 것입니까?”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영가의 옆에 서 있는 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시녀들을 제외하고 영가의 옆에는 한 남자가 함께 있었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저께 밤에 홍수관에서 본 동제의 승상 심운미였다.
우아한 용모와 달리 차가운 기운을 풍기는 남자였다.
그는 말없이 조용히 서 있기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을 내뿜어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숨죽이게 했다.
그런 그가 입이라도 연다면 공기마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야홍릉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공자는 어찌 군주를 뵙고도 예를 올리지 않소?”
심운미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하시죠.”
영가는 생긋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예를 올리지 말아요. 연못가에 연회석이 준비되어 있으니 저와 함께 가시죠.”
사람들은 감사를 표한 뒤, 공손하게 일어났다.
흠모의 시선이 또다시 장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에 쏟아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영가는 다들 놀랄 만한 일을 저질렀다.
그녀는 우아한 걸음으로 야홍릉의 앞에 걸어와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능 공자.”
심운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퍼레졌다.
소저들은 경악했고 영묘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시비를 걸던 조기헌, 위 공자를 포함한 남자들은 모두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잠시 뒤, 화살같이 차가운 눈빛들이 야홍릉에게 쏟아졌고 공기 중에는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
햇살이 뜨거운 여름이지만 이곳은 춥기만 했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말없이 아름다운 손을 내려다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녀가 뭔가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장공주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능 공자, 사양하지 마세요.”
영가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영가는 야홍릉이 뭐라고 하기 전에 그녀의 팔짱을 꼈다.
“능 공자가 섭정왕부의 귀한 손님이라고 하셨으니 저의 귀한 손님이기도 해요. 그러니 제가 능 공자를 홀대할 수는 없죠.”
여인의 몸에는 풍겨오는 향긋한 코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간질이고 있었다.
야홍릉은 팔을 빼지도, 그녀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주변 남자들의 표정을 조용히 살폈다.
영가가 야홍릉의 팔짱을 끼는 순간부터 차갑던 남자들의 시선이 더더욱 차가워졌다. 그들의 시선은 음울하고 음산하며 살기로 넘쳤다. 남자들은 이미 야홍릉을 원수로 보기 시작했다.
공공의 적이란 말이 꼭 맞는 상황이었다.
“장공주, 지금 뭐 하시는 거지요?”
영묘언은 정신을 차리고 화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영가의 팔을 풀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능 공자를 놔주세요.”
영가는 미소를 지었다.
“묘언아, 철없이 굴지 마. 오늘 세가의 공자들과 소저들이 다 모였는데 섭정왕부의 위엄을 지켜야지. 안 그래? 황숙의 체면을 깎으면 안 되잖아.”
영묘언이 차갑게 말했다.
“언니야말로 장공주로서 황실의 존엄과 체통을 지키세요! 사람들이 다 있는 곳에서 남자와 이렇게 가깝게 붙어 있으면 뭐가 돼요? 황족의 예법과 규율을 무시하는 행위잖아요!”
영가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고개를 돌려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옅은 웃음이 담긴 그녀의 눈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능 공자의 생각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