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곱상한 외모
마치 연회에 참가하러 가는 것 같지 않은 인원수였다.
하지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한 오해를 살까 두려웠던 그녀는 진작 영묘언더러 마차 두 대를 준비하라고 했다. 안 그러면 영묘언의 성격상 그녀와 같은 마차를 타겠다고 난리를 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영묘언이 앞의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야홍릉은 말없이 뒤의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능묵도 따라 오르라고 했다.
공주가 외출하는 것 같은 웅장한 무리가 장공주부로 향했다.
영묘언과 야홍릉이 탄 마차는 일찍 도착했다.
그러나 장공주부에는 더 일찍 온 공자와 소저가 꽤 있었다.
영묘언은 먼 곳의 정원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지어 있는 것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젯밤에 왔나? 영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났네. 속물들 같으니라고.”
야홍릉은 아무말 없이 시선을 들고 커다란 정원을 바라보았다.
공주부에 들어서자 입구에 손님을 맞이하는 시녀와 시위가 줄 서 있었다.
손님이 오면 집사가 그들을 시켜 길을 안내하게 했다. 영묘언처럼 섭정왕부에서 온 군주 신분은 길을 안내하는 시녀도 공주부에서 꽤 높은 자리에 오른 여관(女官, 여자 관리)이었다.
이런 사람은 대처 능력도 좋고 예의도 밝아 손님의 노여움을 살 일이 별로 없었다.
영가는 영묘언이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래서 집사는 섭정왕부의 마차를 보았을 때,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두 마차에서 차례로 영묘언과 야홍릉이 내리는 것을 보고 집사는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야홍릉을 처음 본 순간, 그녀의 미모에 놀란 듯했으나 곧이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자세히 훑어보았다.
집사는 차분하고 점잖은 사람이었다. 놀란 것도 잠시, 그는 곧 여관을 시켜 그들을 저택 안으로 안내하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뒤뜰로 향하는 회랑에 올랐다.
장공주의 저택은 아주 컸다. 저택에 들어서자 삼삼오오 무리 지은 사람들이 보였다. 여인들은 두 세 명씩 짝을 지어 꽃을 구경하며 담소를 나누었고 조금 더 가자 몇몇 남자들이 정자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장공주부의 정원은 황궁의 어화원을 제외하고 제일 커요.”
영묘언이 담담하게 말했다.
“매화꽃, 난꽃, 국화꽃, 대나무 정원이 있는 것은 물론 배꽃, 복숭아꽃, 연꽃, 모단화 등 정원도 있어요. 모두 단독으로 만든 정원인데 일 년 내내 꽃을 구경하고 연회를 열어도 부족할 만큼 꽃이 많아요.”
야홍릉은 말없이 구불구불한 회랑을 걸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풍경이 아름다웠고 지나는 곳마다 향긋한 꽃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정원에 들어서자 길을 안내하던 여관은 영묘언에게 예를 올린 뒤, 공손하게 물러갔다.
그리고 정원으로 들어가 시녀들에게 연회 준비를 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술과 다과 같은 것은 여러 번 확인해야 했다.
“바로 연못으로 가요.”
영묘언이 웃으며 말했다. 단아하고 우아한 차림을 한 그녀는 섭정왕부에서의 귀엽고 발랄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에게서는 황실 귀족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연꽃은 지금이 제일 예쁠 때예요. 먼저 둘러보면서 풍경을 감상하는 게 좋겠어요. 연회가 시작되면 지금처럼 자유롭지 못할 거니까요.”
꽃구경 연회라고는 하나 누가 진심으로 꽃구경하러 왔겠는가?
모여 앉아 가식을 떠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분위기가 좋다면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으나, 분위기가 좋지 않다면 날 서린 말로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아예 싸움이 붙을 수도 있었다.
이러하니, 진심으로 꽃구경을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야홍릉은 영묘언이 하자는 대로 따랐다.
정원에 들어서자 더욱 많은 사람이 보였다. 정자 안, 회랑 안, 화원 깊숙한 곳, 냇가에 화려한 옷차림을 한 귀족 공자와 소저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야홍릉과 영묘언이 정원에 들어서자 담소를 나누고 있던 두 여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곧바로 다가와 예를 올렸다.
“군주를 뵙습니다.”
영묘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두 여인은 열네다섯 살 되어 보이는 소녀였는데 화려한 옷차림새로 보아 어느 세가의 적녀 같았다.
“군주도 오실 줄 몰랐어요.”
짙은 빨간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영묘언 옆의 소년을 본 순간, 숨을 헉 들이쉬었다.
“이 공자는…….”
“제 친구 능 공자예요.”
영묘언이 말했다.
“섭정왕부에 오신 귀한 손님이고요.”
두 여인은 섭정왕부에 온 귀한 손님이라는 말에 바로 시선을 내리고 예를 올렸다.
“능 공자.”
둘은 인사를 올린 뒤, 자리를 피해 야홍릉과 영묘언이 먼저 지나가게 했다.
제경의 수많은 세가 귀족들이 장공주와 섭정왕부의 군주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둘 다 신분이 고귀했기에 겉으로라도 공손한 자세를 유지하며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했다.
게다가 지금은 황제가 곧 정권을 돌려받게 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들이 뒤에서 몰래 누구의 편을 들든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능 공자?”
이때, 의미심장하고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가문의 공자인가요? 어디서 오셨지요? 배경은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왜 이 능 공자라는 분이 낯설게만 느껴지는지요?”
이 말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야홍릉과 영묘언을 발견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이 목소리를 듣고 일제히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영묘언의 옆에 서 있는 아름다운 용모의 소년을 본 순간, 모두 표정이 변했다.
여인들은 수줍은 표정을 지었고 남자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적의가 드러났다.
‘좋아.’
얼굴 하나만으로 야홍릉은 자신이 여기에 있는 남자들의 적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을 한 남자는 스무 살 넘은 청년이었는데 파란색 장삼을 입고 허리춤에는 고급 옥패를 달고 있었다. 부채를 흔드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풍류스러운 사내 같았다.
그는 야홍릉을 깐깐히 훑어보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능 공자의 생김새를 보니 기생오라비가 딱이군.”
이 말에 영묘언은 발끈했다.
그녀는 남자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헌(軒) 세자, 지금 무슨 막말을 하는 거예요?”
“군주, 화내지 마십시오.”
조기헌(趙其軒)은 웃어 보였지만 그가 입을 열자 악의적인 조롱이 쏟아져 나왔다.
“저도 있는 그대로 얘기한 것입니다. 능 공자가 곱상하게 생겨서 칭찬한 것뿐인데요.”
야홍릉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상대방의 말에 전혀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기헌은 야홍릉이 반박하지 않자 더욱 신이 나서 말했다.
“능 공자, 아직 제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야홍릉은 그를 힐끗 보더니 가소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능 공자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어느 가문의 공자이신가요?”
조기헌은 히죽거리며 물었다.
“강호 인사? 상인? 그것도 아니면 섭정왕부의 데릴사위?”
“조기헌!”
영묘언이 차갑게 외쳤다. 예쁜 얼굴은 서리라도 낀 듯 차가워졌다.
“너무 무례하시네요!”
말을 마친 그녀는 야홍릉이 화를 낼까 걱정되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능 공자, 이 사람과 얘기하지…….”
“내 신분에 대해서 당신은 알 자격이 없소.”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의 곱상한 외모가 못생긴 당신보다는 낫지.”
조기헌은 그 말을 듣고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분명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잘생겼지만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능 공자가 헌 세자에게 밉보일 용기가 없을 텐데…….’
“내 신분을 당신은 알 자격이 없다고 했소.”
야홍릉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 나이에 귀라도 먹은 것이오?”
사람들은 경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들 자신의 귀가 잘못된 줄로 안 것이다.
오늘 장공주부의 초대를 받고 연회에 온 사람 중, 누가 진정한 귀족이 아니겠는가?
다들 손가락을 까닥하기만 해도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는 막강한 인물들이었다.
‘능 공자라는 사람, 참 간도 크구나.’
그러나 놀라움은 잠시였다.
사람들은 당황했으나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했다.
만약 능 공자가 권력도 세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저 그가 간이 부어서 헌 세자와 이런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섭정왕부의 군주와 함께 연회에 왔다.
그의 신분이나 출신이 어떻든 영묘언이 말한 ‘섭정왕부의 귀한 손님’이라는 말 한마디면 자격이 충분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능씨 소년이 헌 세자와 맞설 수 있는 것은 섭정왕부의 세력을 믿고 까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래?’
조기헌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그는 여유롭던 표정을 거두고 시퍼레진 얼굴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다시 말해보시지!”
야홍릉이 다시 말할 리 없었다. 그녀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차가운 얼굴로 무덤덤하게 조기헌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조기헌을 포함한 사람들 모두가 야홍릉이 겁을 먹어서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가소로워서 안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조기헌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봐라!”
“조기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영묘언은 안색이 변하며 야홍릉을 자신의 뒤에 숨겼다.
“지금 경고하는데…….”
조기헌이 차가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이건 저와 능 공자 사이의 일이니 군주는 개입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능 공자는 섭정왕부의 귀한 손님이에요. 그런데 왜 저와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영묘언은 냉소를 하였다.
“헌 세자는 이 말이 아주 우습게 느껴지나 봐요?”
조기헌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능 공자가 무슨 용기로 이런 말을 하나 했더니 여인의 치마폭에 숨어든 것이었나 보군.”
옆에서 다른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조기헌보다 침착하고 차분했다.
그러나 말투에 담긴 조롱은 숨길 수가 없었다.
“저렇게 무능력한 사내라니.”
그의 말 속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능 공자가 잘생긴 얼굴로 영묘언의 호감을 샀고 또 그녀에게 빌붙으려고 한다고 비꼬는 것이었다.
영묘언은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위(魏) 공자는 말씀을 삼가해주세요.”
“그래요, 능 공자는 딱 여인들이 좋아할 얼굴이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말을 잘해 여인들의 환심을 사는 데 능하니 군주, 절대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 말에 사람들 사이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비웃는 소리도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