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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90)화 (9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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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본 적이 있다

현재 동제의 상황에서 강신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지금도 강신인 셈이다.

황제가 경계하는 강신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정권과 병권만으로도 황제는 충분히 신경이 쓰일 것이다.

경계한다는 것은 위험을 뜻하기도 했다.

황제가 필요로 하면서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신하가 되어 황제가 함부로 살심을 품지 않게 하려면 계기가 필요했다.

‘이 계기가 정말 지금의 난처한 상황을 풀어줄 수 있을까?’

* * *

야홍릉은 능묵이 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오후 내내 그는 말을 하려다가 말기를 반복했다.

미풍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던 야홍릉은 그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나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 강해 무시할 수 없었다. 평소 공기처럼 있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야홍릉은 책을 내려놓고 능묵이 탄 차를 느긋하게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소년의 기다란 다리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상황에서 툭하면 무릎 꿇는 버릇 좀 고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소년은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찻잔을 든 야홍릉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

“어젯밤에 황제와 함께 홍수관에서 나타났다는 남자 말입니다.”

능묵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본 적 있는 사람이고 주인님도……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젯밤에 어린 황제와 함께 홍수관에 나타났던 남자?’

“아는 사람인 것 같다던 그자를 말하는 것이냐?”

야홍릉이 묻자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언제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이냐?”

“도화산에서 만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찻잔을 들고 있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와 함께 도화산에 갔던 그 날 말이냐?”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월 당시 도화산에서 일어난 일들과 만났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 그녀가 만났던 신비한 남자가 떠올라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손끝에 힘을 풀고 비단 탑에 기댄 채, 담담하게 물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지?”

“그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기도 강하고 순수하여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야홍릉은 경악했다.

능묵의 입에서 좀처럼 듣기 어려운 표현법이었다.

어영위는 오감이 뛰어나고 강한 존재였다. 무인의 세계에서는 가히 최강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능묵이 그 남자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그는 기가 순수하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느낌을 풍긴다고 했다.

이 말을 곱씹은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날 도화산에서 그 남자를 만났을 때까지도 야홍릉은 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그 사람이 대교습과 어영위의 존재를 알기에 일반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야홍릉은 그가 일부러 신비한 척 군다고 생각해 그에게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능묵이 이렇게 표현한 사람이 어떤 신분일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여태껏 어린 황제의 옆에 있는 사람은 무술을 다룰 줄 아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술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해도 기가 순수한 것과 별개였다.

무술은 사악한 술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 판단이 틀렸다는 건가? 그 사람은 무술에 능한 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다른 신분과 신비한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닐까? 능묵은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다고 하고 그 사람도 능묵의 존재를 안다고 하니…… 혹시 그에게 정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능묵이 기억을 잃은 것도 그와 연관이 있는 걸까? 이번에 동제에서 능묵의 봉인된 기억을 해지할 수 있을까?’

야홍릉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제외하고 다른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느냐?”

능묵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를 보고 적의나 경계심이 느껴지지는 않느냐?”

능묵은 고개를 저었다.

“느껴지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만약 능묵이 잃은 기억과 이 사람이 연관되어 있다면 그는 왜 동제의 황궁에 나타난 거지? 어떤 목적으로?’

그녀는 이번에 뜻밖에도 능묵에게 수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진실에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으나 갑자기 또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야홍릉은 한참 말없이 있다가 담담하게 물었다.

“어제는 왜 말하지 않은 것이냐?”

능묵이 잘못을 한 일이 있다고 한 것은 그 사람을 만난 사실을 어젯밤에 숨겼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야홍릉에게는 그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만났으면 만난 것이지, 기껏해야 그 남자의 신분을 알아보는 게 다일 것이 아닌가? 왜 숨긴 거지?’

능묵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면 그는 야홍릉의 미움을 살까 두려웠다. 그리고……

그 남자는 신분이 신비롭고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는 야홍릉이 그 사람에게서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줄까 두려웠다.

야홍릉은 그가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깐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말했다.

“혹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은 것이냐?”

능묵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을 되찾고 나면 네가 상상하던 것처럼 엉망이 아닐 수도 있음에도?”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 자연스레 흘러가는 대로 놔두자꾸나. 걱정할 것은 없어.”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것이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오후에 할 일이 없으니 그 사람의 신분에 대해 알아보아라.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야홍릉이 이번 일을 그냥 넘기기로 했으나 능묵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평화가 깨질까 두려웠다. 진실이 드러난 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될까 두려웠다. 또 비밀이 풀린 뒤에는 그가 지금처럼 순수한 충성심을 유지하지 못할까 걱정되었다.

‘주인님은 배신과 속이는 것을 제일 싫어하시지.’

그러나 소년은 아무리 불안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야홍릉은 오후에 나가지 않고 방에서 책을 읽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 의문점에 숨겨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연관이 있는 듯한 사람을 한 데 이어놓으면 또 어떤 배후의 세력이 드러날까?’

* * *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영묘언은 정성 들여 꾸미고 영풍원으로 왔다.

소녀는 너른 소매를 가진, 파란색 긴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새하얀 피부가 더욱 투명하게 비춰졌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자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드리웠다. 거기다 맑고 커다란 눈동자까지 더해지자 더욱 아름다웠다.

남자라면 소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설레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소녀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여인이었다.

야홍릉은 세수를 마친 뒤, 검은색 옥포로 갈아입은 채, 걸어 나왔다.

준수한 얼굴과 깡마른 몸매에서는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매력이 느껴졌다.

영묘언은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흠모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능 공자.”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한 얼굴이었다.

“하실 얘기가 있다면 장공주부에서 돌아오신 다음 다시 얘기하시죠.”

그 말을 들은 영묘언은 상기된 얼굴이 차츰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네.”

그리고 곧 다시 말을 이었다.

“마차가 이미 준비되었어요. 그런데 급히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랫사람들더러 아침 식사를 준비해 영풍원에 가져오라고 했어요.”

영묘언은 고개를 손을 들어 옆에 있던 시녀들더러 정자를 치우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야홍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능 공자, 우리 정자에서 아침 먹어요. 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부에서 돌아오면 묵을 곳을 바꿔야겠어. 아니면 오후에 아예 동제를 떠날까?’

오전이면 영가가 어떤 여인인지 알아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봉회근도 황제를 만났겠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조용히 아침 식사를 마쳤다.

야홍릉은 원체 말이 없고 영묘언은 마음속에 고민이 있어 입을 열지 않았다.

영묘언이 가끔씩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오는 것만 제외하면 그들의 아침 식사는 고요한 편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아침 해가 천천히 떠올랐다. 짙은 나무 그늘 아래로 시원한 기운이 가득했고 정원에 풍겨오는 꽃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야홍릉은 차 한 잔을 다 마시고 일어나 영묘언과 함께 왕부 밖으로 걸어갔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봉회근은 둘이 함께 왕부 밖으로 나가자 깜짝 놀란 듯했다.

“장공주부로 가는 길이냐?”

영묘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시원할 때 일찍 갔다가 일찍 돌아오려고요. 그러다 날이 더워지면 능 공자와 돌아올 거예요. 더운 날에 굳이 장공주와 함께 연꽃을 구경할 필요가 있나요?”

봉회근은 옅게 웃었다.

“장공주가 설마 손님을 괴롭히겠느냐? 꽃구경 연회는 분명 시원한 곳에 준비되었을 거야.”

말을 하면서 그는 시선이 싸늘한 능 공자를 힐끗 보았다.

그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봉회근은 그의 성격을 알기에 혹시 장공주부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걱정해 몇 마디 일깨워 주려고 했다. 그러나 능 공자가 참는 성격이 아닌 것도 맞으나 괜한 시비를 일으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능 공자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봉회근은 웃으며 말했다.

“묘언이가 성격이 좀 충동적이라 능 공자가 뒤에서 좀 봐주시오. 얘가 장공주와 다투지 않게 말이오.”

영묘언은 코웃음을 쳤다.

“오라버니, 언제부터 영가의 구애자 무리에 들어갔어요? 왜 이렇게 그 여인 편을 드는데요?”

봉회근은 깜짝 놀랐다가 그녀의 말도 안 되는 말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서 대뜸 그녀에게 딱밤을 먹였다.

“뭔 소리야? 내가 언제…….”

“그만하시죠. 언제 떠날 겁니까?”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러자 둘은 바로 조용해졌다.

야홍릉이 밖으로 걸어가자 영묘언도 따라갔다. 뒤에서 시녀 여섯 명이 고개를 숙인 채, 영묘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저택 밖에는 섭정왕부에서 준비한 호위무사 수십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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