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저는 전하와는 다릅니다
점심에 영묘언은 영풍원에서 식사하지 못했다.
조조가 끝나서 돌아온 섭정왕이 사람을 시켜 야홍릉을 서재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꽃이 가득 피어 아름다운 바깥 풍경과 달리 서재 안의 분위기는 아주 엄숙했다.
서재에 들어가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압박감을 느꼈다.
하인은 차를 올린 뒤, 바로 물러났다. 서재 안에는 영위와 야홍릉 둘밖에 남지 않았다.
봉회근도 없었다.
“오늘은 혼사를 의논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일을 물으려고 부른 것이네.”
홍목 탁자가 둘 사이에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영위와 야홍릉은 마주 보고 있었다.
야홍릉은 흰 바둑돌을, 영위는 검은 바둑돌을 집었다.
흑백 바둑돌이 바둑판에서 소리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조용한 서재 안은 살얼음 같은 분위기로 가득했다. 두 바둑돌은 각자 진영을 치고 서로를 공격하며 전쟁터 못지않은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었다.
“얘기하시지요.”
“회근이에게서 듣자니 능 공자가 이번에 동제의 제경에 온 것은 그를 보호하는 것 말고도 사적인 일이 있다면서?”
영위가 덤덤하게 입을 느꼈다.
평온한 그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야홍릉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바둑 한 알을 들어 내려놓았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네’라고 답했다.
“능 공자가 무슨 일을 하러 왔는지 물어도 되겠나?”
“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영위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저도 전하께 여쭈어볼 말이 있습니다.”
영위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게 조건인가?”
“그렇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영위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시게.”
야홍릉은 평온한 얼굴로 놀라운 말을 했다.
“황위에 오르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이 말이 주는 힘은 아주 컸다. 물론 언제, 어디서든, 황위를 노린다는 말은 무거운 말일 수밖에 없었다. 쉽게 해서는, 아니, 아예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소년이 한 것이다.
서재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영위는 검은 바둑돌을 든 손에 힘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능 공자, 간이 크군.”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영위는 눈을 내리깔고 바둑돌을 판에 내려놓았다.
“내가 그럴 야심이 없다고 한다면 능 공자는 믿을 것인가?”
“믿습니다.”
영위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고 야홍릉을 바라보고서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는 황위가 욕심나는 것은 아니나 지금 정권을 넘기고 싶지는 않네.”
섭정왕인 그는 어린 황제가 열네 살이 되면 반드시 섭정 대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나 영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황위를 노리는 것도 아니었다.
황위에 오르는 게 싫은 것이 아니라 황제와 틀어져서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철천지원수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또 그는 반역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싶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명성을 포기하면서까지 황위에 오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온 가족의 목숨을 가지고 모험까지 하면서 성공할지 확신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정권을 넘기고 싶지 않은 것은 권력을 넘기면 그의 운명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그를 죽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린 황제가 언젠가는 그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다.
만약 혼자였다면 생사가 두렵지 않으나 사랑하는 아내도 있고 아들딸도 있었다.
그들은 그가 가장 아끼는 가족이었다.
봉씨 가문의 운명 또한 그와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섭정왕 영위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위엄이 넘치며 표정을 숨기는 데 익숙했지만 황제가 직접 정사를 보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생각이 많아졌다.
황위를 노리자니 불가능하고, 권력을 넘기자니 내키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가끔씩 그는 스스로 친 그물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전하는 폐하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야홍릉이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
“만약 전하께서 계속 권력을 넘기지 않고 있다면 폐하에게 전하를 무너뜨릴 능력과 패기가 있다고 보십니까?”
섭정왕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린 황제 영린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영위는 시선을 들고 야홍릉을 힐끔 쳐다보았다.
‘능 공자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지.’
영위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피식 비웃었다.
스스로를 비웃는 웃음이었다.
동제의 섭정왕 영위는 사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전하께서 폐하를 무너뜨릴 자신도, 황위에 오르고 싶은 야심도 없으시다면 폐하에게 경계 대상이자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소년의 목소리는 차갑고 차분했다.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지혜가 담겨 있는 것 같아 영위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폐하에게 경계의 대상이자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능 공자의 뜻은…….”
“충성스럽고 능력 있는 강신(强臣)이 되시란 말씀입니다.”
야홍릉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강신이 되어 폐하가 전하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고, 전하의 능력 때문에 신경이 쓰이나 충성심을 느낄 수 있는 강신 말입니다.”
영위는 침묵했다.
만약 다른 때에, 다른 사람의 입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그는 황당하고,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는 체면을 구기면서 어린 황제에게 굽신거릴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또 그렇게 한다고 해도 황제가 어찌 그의 충성을 쉽게 받아 주겠는가? 더하여 대체할 수 없는 신하가 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동제 황족에서 영린 세대의 다른 황자는 없었다. 목국에 인질로 보내진 황자를 제외하면 현재 어린 황제만이 성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것에 비해 영씨 종친은 사람도 많고 자제도 많았다.
종친 중, 능력이 있고 젊은 남자도 적지 않았다. 문관과 무장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그리고 어린 황제가 가장 많이 기대는 젊은 승상 심운미 역시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지금 상황에서는 강신이라 할 수 있었다.
“폐하는 아직 어립니다. 열네 살이 되어 정사를 직접 본다고 해도 서투를 것이죠.”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그가 패기 넘치는 제왕이라면 큰 포부를 품고 있을 것입니다. 제왕으로서 세울 수 있는 가장 큰 공은 백성을 잘 헤아리는 것을 제외하고 분열된 나라를 통일시키는 것이지요.”
영위는 손끝이 떨려 바둑판의 바둑돌을 헝클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놀란 얼굴로 차가운 소년을 말없이 주시했다.
서재 안은 차가운 한기만 감돌았다.
한참 뒤, 영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능 공자…… 자네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야홍릉이 답했다.
“동제의 강산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영위는 생각에 잠겼다가 복잡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능 공자의 뜻은…… 나더러 이런 방식으로 폐하께 충성심을 표하란 말인가?”
“저는 그저 제안하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실지는 전하의 선택에 달렸지요.”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물으려고 하셨던 것 말입니다……”
그녀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봉회근을 제경으로 무사히 데려오는 것을 제외하고 동제에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동제의 장공주 영가입니다.”
‘영가?’
영위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야홍릉이 영가를 만나러 왔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능 공자도 혹시…….”
야홍릉은 영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바로 부인했다.
그리고 다른 해명은 내놓지 않았다.
영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야홍릉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능 공자가 무슨 이유로 영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해도 일깨워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가는 동제의 장공주로 신분이 아주 고귀하네. 폐하는 누님을 아주 존중한다네.”
영위가 말했다.
“이 장공주는 용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순수하고 연약한 분이라 제경의 많은 세가 공자들이 좋아하고 있다네.”
‘순수하고 연약해?’
야홍릉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군주께서 저더러 내일 함께 장공주부에 가서 꽃구경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영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
딸이 각 저택의 귀족 여인들과 왕래하는 것에 대해 그는 그다지 간섭하지 않았다.
저택에서 봉완이 집안일을 도맡았기에 딸을 가르치는 것 역시 그녀가 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또 어떤 사람과는 왕래해도 되고 어떤 사람과는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영묘언 스스로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영위는 내일 영묘언이 장공주부에 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야홍릉에게서 이 말을 들은 그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물었다.
“능 공자는 영가에 대해 그저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영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야홍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일이 없으시면 전 이만…….”
“능 공자가 내 입장이라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영위도 따라서 일어서며 평온한 시선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능 공자도 한 걸음 물러서서 목숨을 보전할 것인가? 아니면 생사를 걸고 싸워 볼 텐가?”
야홍릉은 시선을 내리깔고 흑백 바둑돌이 올려져 있는 바둑판을 바라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전 전하와 다릅니다.”
“뭐가 다른가?”
“전하께서는 생각이 너무 많으시고 딸린 식구도 많습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걱정이 없지요.”
그러니 둘은 선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말을 마친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재를 나갔다.
영위는 권력이 막강하고 또 권력을 사랑하나 처자식의 안전을 우선시하여 함부로 모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난처한 상황에 빠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걱정하는 것 없이 오롯이 목표 하나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눈 부신 햇살에 야홍릉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해를 가렸다.
그때, 햇빛이 가려지며 마르고 훤칠한 몸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큰 키로 눈 부신 햇빛을 가려주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문을 나갔다. 그녀의 뒤에는 능묵이 따르고 있었다.
서재에서 영위는 뒷짐을 진 채, 창가로 걸어가 어두운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