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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88)화 (8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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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남녀가 단둘이 한 방에

묵백은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저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폐하께서 물어볼 사람을 잘못 찾으셨습니다.”

‘사람을 잘못 찾았다고?’

영린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그래. 그런데 이 질문을 누구에게 해야 하지?’

누구도 이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머릿속에 남녀를 구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소년의 맑고 깨끗한 눈은 점차 외로움이 쌓이기 시작했다.

* * *

능묵은 야홍릉이 목욕을 마칠 때쯤에 돌아왔다. 아주 빠른 속도였다.

섭정왕부에는 감시하는 눈이 많았지만 황족의 어영위인 능묵은 실력이 각 나라의 모든 영위와 암위보다도 월등히 뛰어났다. 그래서 그를 미행하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방으로 들어온 능묵은 탑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주인님.”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책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욕조의 물을 이미 깨끗한 것으로 바꾸었다. 먼저 몸을 담그거라. 얘기는 이따 하자꾸나.”

능묵은 당황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네’라고 했다.

그리고 병풍 뒤로 사라졌다.

찰랑이는 물소리가 들린 뒤,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야홍릉은 바깥방에 앉아 책을 읽었다.

병풍 뒤의 욕조에 앉아 있는 능묵은 입을 꾹 다문 채,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에 대해 생각하는 듯했다.

의문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속을 맴돌았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병풍을 바라보았다. 병풍에는 소년의 단단한 몸이 흐릿하게 그림자로 나타났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탑에 기댄 채, 물었다.

“장공주는 자더냐?”

능묵은 정신을 차리고 공손하게 말했다.

“아직 자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보았어?”

능묵은 병풍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떻게 생겼더냐?”

야홍릉은 한담을 하는 말투로 물었다.

방금 목욕을 마친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풀어져 있었다.

“예쁘더냐?”

병풍 뒤에서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소년 어영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주인님께서 더 아름다우십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병풍 뒤를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이런 대답을 듣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공주부에 지금 또 누가 있더냐?”

“동제의 승상이라던 심운미가 있었습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심운미?’

동제의 장공주 영가는 신분이 고귀하고 소문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그녀는 저택에 부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낮이라 해도 공주가 홀로 남자와 한방에 있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밤이 아닌가?

‘남녀가 단둘이 한 방에 있다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이 생각을 떨쳤다.

그녀도 예법을 중히 여기지 않는 여인이었다. 천성적으로 성미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지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지금 성격은 남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가끔씩 핑계로 대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녀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동제의 장공주가 진심으로 황제를 위해 대사를 도모하고 있다면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규칙이란 지킬 때 지키는 것이지 필요 없을 때는 무시해도 되었다.

안 그러면 불편할 뿐이었다.

게다가 심운미는 황제에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심운미는 아까 홍수관에 있더니 지금은 또 장공주부에 나타났다고…… 정사를 의논하는 모양이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병풍 뒤에서 능묵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운미가 영가를 침대에 던지더군요.”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두 남녀가 단둘이 한 방에 있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닌 듯했다.

* * *

다음날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일어난 야홍릉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정원에서 무공을 수련하며 몸을 풀었다.

진시에 시녀가 아침을 차렸다. 야홍릉과 능묵은 영풍원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능묵은 야홍릉에게 차를 타 주었다.

오늘은 별다르게 할 일이 없었다.

야홍릉은 창가에 앉아서 말없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내일 장공주부로 연꽃 감상회에 참가하러 가기에 그녀는 급히 무언가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한 손에 능묵이 타 준 차를 들고 우아하게 마셨다. 차 한 잔을 다 마신 뒤, 야홍릉은 능묵더러 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창가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 시진이 지나자, 아니나 다를까 영묘언이 찾아왔다.

“능 공자, 아침 드셨어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먹었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책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 영묘언과 함께 영풍원 밖의 정자에 앉았다.

능묵은 옆에 서 있었다.

시녀는 그들에게 차를 따른 뒤, 맛있어 보이는 다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정자 밖에서 대기했다.

“능 공자, 여기서 묵기 불편하지 않으세요?”

영묘언은 차를 마신 뒤, 시선을 들고 검은색 장포를 입은 능 공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담겨 있었다.

“능 공자,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이곳을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하시고 편히 지내시고요.”

야홍릉은 그녀의 시선을 못 본 척하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 감사합니다. 아주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어제 그녀가 직접 영묘언더러 놀러 오라고 했기에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난 뒤, 야홍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공주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일 장공주부에 갈 때 어떤 선물을 준비해서 가면 좋을까요?”

“선물이요?”

영묘언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아요. 능 공자가 정말 선물을 준다면 제경의 눈먼 세가 공자들이 아주 죽일 듯이 노려볼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능 공자의 질문에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별로 줄 것도 없어요. 영가는 신분이 고귀해서 뭐든 다 있다고요. 세가 공자들이 매일 그녀의 곁을 맴돌며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기세라니까요. 능 공자가 선물을 주면 영가의 손에 들어가기도 전에 호수에 버려질 수도 있어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묘언은 자신의 발언이 지나쳤다는 것을 느꼈는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싫어하는 티를 숨기지 못했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 공자들은 영가를 좋아해서 질투심이 많아요. 다른 남자가 준 선물을 그 자리에서 버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능 공자에게 적의를 품을 거예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선물을 따로 준비하지는 말아야겠네요.”

“네, 제가 섭정왕부의 명의로 선물을 드리면 돼요.”

영묘언은 말을 하며 입을 삐죽였다.

“안 주면 또 어때요? 원래 갈 생각도 없었는데. 누가 보면 제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줄 알겠어요.”

영묘언은 영가를 아주 미워하는 듯했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았다. 영묘언과 왕기주루의 사장에게서 들은 평가를 종합해 보아도 장공주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았다.

여린 것과 잘난 척하는 것.

둘은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야홍릉은 현재까지 영가가 자신의 연약함을 무기로 삼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묘언과 대화를 하기로 했으니 서로가 관심이 있는 화제를 얘기하는 것이 좋았다.

야홍릉은 차를 마시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장공주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아직 혼인할 나이가 안되었습니까?”

“열일곱 살이에요.”

영묘언은 턱을 괸 채, 싸늘하게 말했다.

“나이로 따지면 혼인할 나이가 한참 지났죠. 그런데 눈이 높아서 제경의 남자들을 다 성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시간을 끈 것 같아요.”

그러다 그녀는 또 입을 삐죽였다.

“제가 보기에는 그녀가 눈이 높은 것도 있지만 인기 많은 우월감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남자들이 그녀 때문에 질투하고 그녀를 극진히 보살피는 것을 보면서 큰 만족감을 느끼는 거죠. 그게 진정한 이유인 것 같아요.”

야홍릉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묘언이 장공주를 아주 싫어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심지어 하찮게 여기기까지 했다. 물론 주관적인 생각이 담긴 평가는 신빙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럴 만도 했다.

장공주 영가는 황제의 친누나로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장공주로 봉해졌다. 일반 공주보다도 더 고귀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영묘언은 섭정왕의 딸로 작위가 군주밖에 안 되니 신분으로는 장공주보다 한 단계 아래였다.

황제와 섭정왕은 겉보기에는 평화로웠지만 둘이 대립각에 서서 서로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가 순조롭게 정권을 돌려받거나 섭정왕이 계속해서 정권을 움켜쥐고 황제는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것 둘 중 하나였다.

그러니 영묘언과 영가는 영원히 서로 대립각에 설 수밖에 없었다.

영묘언의 말이 신빙성이 떨어져도 영가는 아름답고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이 연약함은 영묘언에게 연기로만 보일 것이다.

영묘언은 성격이 직설적이라 연약한 성미의 영가와는 달랐다.

그래서 서로 싫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야홍릉은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곧 찻잔을 들고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대화를 어떻게 계속할지 고민했다.

그녀는 대화를 나누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영묘언과 영가에 대해 몇 마디 나눈 뒤, 도저히 할 얘기가 없었다. 그러나 정자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영묘언은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기쁘기만 했다.

영풍원에서 식사 시간까지 머무른 영묘언은 여전히 떠나기 아쉬운 얼굴이었다.

“점심 식사를 능 공자와 함께해도 되나요?”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군주의 집입니다. 군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어제 아침에 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예의 바르고 우아한 말이었으나 낯선 사람처럼 거리를 두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는 능 공자의 생각을 존중한다고요.”

영묘언은 말을 하다 불현듯 어제 야홍릉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혀를 홀랑 내밀었다.

“능 공자,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전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아요.”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조용히 말했다.

“신경을 쓰셔야지요.”

영묘언은 당황했다.

“군주께서 신분이 고귀하시기에 감히 이걸 두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으나 나중에는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낭군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지금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나중을 생각하셔야지요.”

야홍릉이 말했다.

“저는 이곳에 오래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군주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쓸데없이 소녀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둘 다 여인이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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