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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86)화 (8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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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숨기는 게 있느냐

말을 마친 야홍릉은 봉여희를 보더니 말했다.

“화청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시오. 능 공자란 자가 백접 낭자를 하룻밤 빌려야겠으니 그들더러…….”

“공자!”

금슬이 다급히 제지했다.

“공자, 안 됩니다!”

야홍릉은 차가운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 돌렸다.

별실에는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봉회근과 봉여희는 능 공자가 왜 이러는지 알지 못해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방금까지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던 네 미인은 지금 당황하여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야홍릉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능 형, 됐소.”

봉회근이 온화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에나 규칙이 있는 법이오. 오늘 우리가 처음 와서 규칙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곳의 규칙을 따라야 하지 않겠소? 능 형, 이들을 난처하게 굴지 마시오.”

이 말에 네 미인은 능 공자를 바라보았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넷은 공자의 잘생긴 얼굴에 흠모의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공자가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때는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감돌아 겁이 날 정도였다.

야홍릉은 기분이 상한 것인지 차갑게 말했다.

“다 꺼지거라.”

이 세 글자에 네 미인은 기분이 언짢아하기는커녕 안도하며 망설임없이 별실을 나갔다.

봉회근과 봉여희는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야홍릉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같은 담담하고 차분했다. 그녀는 병풍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능 형.”

봉회근이 입을 열어 정적을 깼다.

“백접 낭자는 중요한 인물이오?”

‘어쩌면 그럴 수도.’

야홍릉은 말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방문이 열리자 봉회근과 봉여희는 고개를 돌리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능묵이 걸어 들어와 고개를 숙인 채, 옆에 섰다. 입을 꾹 다문 그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싸늘하여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야홍릉은 뭔가를 발견하고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옷을 정리한 뒤, 말했다.

“가지.”

봉회근은 술잔을 내려놓고 따라서 일어났다.

별실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런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도 건드리지 않았고 조용히 끝이 났다.

노보는 열정적으로 둘을 배웅했다. 홍수관에서는 이 일을 아는 사람도 없었고 다들 관심도 없었다.

세상에 잘난 척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돈이 좀 있다고 뭐든 제멋대로 하며 멍청하여 사고를 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특히 기루처럼 돈을 쓰는 곳에서는 질투로 인해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방금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셈이었다.

노보는 두 공자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금슬이 올린 보고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 두 손님은 제경의 사람이 아니었으나 분위기를 봐서는 신분이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용도 그 지방의 뱀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밖에서 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이라도 현지에서 권력이 강한 사람에게는 상대가 아니었다.

‘둘이 그것을 알고 떠났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오늘 밤에 정말 좋게 끝나지 못했을 거야.’

화청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홍수관을 떠난 야홍릉은 길가를 걸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봉 공자, 먼저 돌아가겠소? 난 밖에서 좀 더 있다 가고 싶군.”

봉회근은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능 공자가 동제에 볼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가 계속해서 눈치 없이 따라다닌다면 능 공자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능 공자, 안전에 조심하시오.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멀리서 봉회근의 뒤를 따르는 봉씨 가문의 호위와 몰래 숨어 있는 섭정왕부의 암위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봉회근은 무사하겠지.’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길을 따라 걸었다.

느긋한 발걸음을 보니 갈 곳을 정하지 않은 듯했다.

능묵은 그녀의 왼쪽으로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뒤따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하인 같았다.

봉회근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다가 곧 섭정왕부로 돌아갔다.

밤의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멀리서 보면 번쩍이는 등불에 번화하기 그지없었다.

야홍릉은 뒷짐을 진 채, 걸어가며 능묵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말했다.

“뭘 발견했느냐?”

능묵은 평온한 얼굴로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동제의 황제도 홍수관에 있었습니다.”

‘영린이 지금 홍수관에 있다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수수한 차림으로 궁을 나갔다고? 섭정왕은 모르는 건가? 영위가 권력이 하늘을 찌른다는 말은 과장이었나? 쥐고 있는 병권을 제외하고 동제의 문무백관 중에 그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몇이나 되지?’

“그 뒤에는 검은색 옷차림을 한 남자가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뭔가…… 아는 사람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능묵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는 사람인 것 같다고?”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느냐?”

“네.”

“몇 살이더냐?”

“스무 살에서 스물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였습니다.”

야홍릉은 생각에 잠겼다 물었다.

“뭘 하고 있더냐?”

“……밀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능묵은 고개를 숙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게도 밀담의 내용은 영위와 상관없는 남제의 얘기였습니다.”

‘남제?’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 영린이 이 시기에 홍수관에 나타나서 하는 얘기가 섭정왕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남제의 얘기를 하는 거라고? 참 이해가 안 되는군.’

잠깐 생각을 해본 야홍릉은 전생의 기억에서 무언가를 들추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도 쓸만한 것이 없었다.

동제는 제국에서 분할해 나온 땅이기는 하나 현재 경제와 병력 모두 남제의 황족보다 강했다.

영린이 만약 야심이 큰 사람이라면 남제를 활용할 수 있었다.

직접 정권을 돌려받은 뒤 황위를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 남제를 삼켜서 제국을 통일한다면 천하를 뒤흔드는 공적을 이루는 셈이었다.

남제의 황제와 동제의 황제는 모두 용씨 황족의 혈통이었다. 마지막에 누가 제국 통일을 실현해 강산을 통제하든 다 한 가문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용씨 가문의 혈통이 이어지는 것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영린에게 그만한 능력과 패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하에 능력이 뛰어난 신하와 부유한 국고가 있어야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너무 멀리 생각한 것은 아닐까?’

야홍릉은 다시 능묵이 보았다던 흑의 남자를 떠올렸다.

‘영린의 옆에 있는 능묵이 아는 사이라는 그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무술을 한다는 신비한 남자인가?’

야홍릉은 길을 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보았던 모든 이상한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실이 이 단서들을 다 이어놓아 사건의 진실이 곧 드러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듯한 추측이 떠오를까 하면 또 바로 부정당했다.

이렇게 수없이 생각이 반복되었지만 야홍릉은 결론을 내지 못했다.

한 주루를 지나자 술 향기가 코끝을 간질거렸다.

야홍릉은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왕기주루(王記酒樓)였다.

말없이 서 있던 야홍릉은 안으로 들어갔다. 때는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난 뒤라 주루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야홍릉이 가게에 들어서자 싸늘하고 아름다운 용모에 몇 명 없던 손님들은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들 남자인 탓에 야홍릉이 아무리 예쁘게 생겨도 그들은 곧 시선을 돌렸다.

대청에 앉아 밥을 먹던 남자들은 시선을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내가 참 예쁘게도 생겼네.”

그러고는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청에서 드실 겁니까? 아니면 위층으로 올라가실 겁니까?”

점잖아 보이는 주루의 사장이 나오며 예의 바르게 물었다.

“뭘 드시겠습니까?”

“위층으로 가겠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곳의 간판 요리 두 가지와 차 한 주전자를 올리게. 그리고 또 고기 요리 두 가지와 야채 요리 두 가지, 밥 두 공기 주시게.”

젊은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먼저 위로 올라가 계십시오. 음식을 곧 올려보내겠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위층으로 걸어갔다.

“낯선 얼굴인데.”

벽 쪽의 탁자에 앉은 중년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야홍릉이 사라진 계단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잘생기기는 했지만 좀 차가워 보이네.”

“타지인이겠지.”

다른 젊은 남자는 땅콩을 으스러뜨린 뒤,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차분했다.

“황성에는 귀족이 많아. 눈에 익든, 어쩌든, 성미가 차갑든 말든 괜한 호기심을 보이지 마. 잘못 건드리면 죽음뿐이니까.”

“양(楊)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차분한 인상의 사장이 주방에 음식을 시키고 차를 타며 말했다.

“괜한 호기심은 화를 불러오는 법이지요. 낯설고 또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며 방금 보았던 소년의 예쁘고 차가운 얼굴을 떠올렸다. 낯설기도 하고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일반 가문의 공자 중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차가워 보이는 인상을 보니 성격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 곧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나마 사람이 좀 있던 아래층과는 달리, 위층에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

고요했지만 환경은 좋았다.

야홍릉은 창가에 가까운 자리를 골라 고개를 돌리고 길을 오가는 행인들과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능묵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겼다.

“뭔가를 생각해도 풀리지 않을 때는 잠깐 생각하지 말거라.”

야홍릉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한 밤에 들으니 더욱 차가웠다.

“널 믿는다고 했으니 믿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널 의심할 거라고 걱정하지는 말거라.”

능묵은 시선을 들고 야홍릉을 바라보며 망설이는 어조로 말했다.

“만약…….”

그러나 두 글자만 말하고 바로 입을 닫았다.

“만약 뭐?”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번쩍였다.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나한테 숨기는 것이라도 있느냐?”

능묵은 고개를 젓고 모기소리만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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