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그게 누구란 말이냐
“공자님들, 안으로 드시지요.”
청순한 얼굴의 소녀가 둘을 단아한 별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허리를 숙인 채, 물러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차와 술을 준비해 올릴게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별실로 들어갔다.
별실 안은 넓고 환했다.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은 방을 두 공간으로 나누고 있었다.
바깥방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어 시야가 탁 트였다. 꽃무늬가 새겨진 탁자와 방석이 놓여 있었고 중앙의 빨간 융단 위에는 검은 나무로 된 칠현금이 놓여 있었다.
병풍 뒤는 내실이었는데 운우지정을 나눌 수 있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봉회근은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에서는 홍수관의 넓은 정원을 볼 수 있었다. 정원 안은 등불이 환하게 걸려 있어 호수 가까이에 지어진 구불구불한 회랑과 회랑 끝의 커다란 화청까지 한눈에 보였다.
화청 옆에는 인조산과 작은 시내가 있었다.
정원의 설계는 아주 아름답고 시적이었다. 커다란 화청 안은 떠들썩하기 그지없었다. 비단 옥포를 입을 젊은 남자들이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아서는 술잔을 들고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화청의 중간에는 부드러운 융단이 깔려 있었는데 얇은 면사 무의(舞衣)를 입은 여인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미인들은 요염한 몸놀림으로 춤을 추었는데 팔을 들 때마다 가는 허리가 드러나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화청의 옆쪽에는 화려하게 생긴 백의 여인이 앉아서 금(琴)을 타고 있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현을 어루만지자 듣기 좋은 금 소리가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무희들의 춤까지 더해지자 더없이 풍류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봉회근은 미간을 찌푸린 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야홍릉은 창가에 서서 잠깐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정원의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정원 곳곳에 흑의 차림을 한 시위가 빽빽이 서 있었다. 족히 사오십 명은 되는 듯했다.
봉회근은 화청 안의 화려한 옷차림을 한 공자들을 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저들은 동제 황실 종친 가문의 자제들이오. 하나같이 가문이 대단하고 신분이 고귀하지. 연보라색 장삼을 입은 자는 동제의 젊은 승상 심운미(沈雲微)로, 재능이 넘치고 능력이 뛰어나 폐하의 가장 강한 오른팔로 불립니다.”
봉회근은 전에 제경에 자주 왔었다. 황제를 직접 만난 적은 별로 없지만 제경의 종친 귀족에 대해서는 낯설지 않았다.
야홍릉은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화청에 있는 귀공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평온한 시선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잠시 뒤, 그녀는 문발을 치고 바깥의 야경을 차단했다. 또 별실 안의 모습도 가렸다.
“저 귀공자들은 모여서 풍류를 즐기는 것 같지만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나누는 얘기만으로도 쉽게 조정의 상황을 좌지우지할 수 있소.”
야홍릉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문발 사이의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오늘 만난 자들이 모두 진심으로 황제에게 충성하는 자들이라면 반년 후, 황제가 직접 정사를 보게 될 때 섭정왕이 얼마나 큰 압박감을 느끼겠소?”
이 귀공자들은 그들 배후의 가문을 대표했다.
그들의 가문은 모두 뿌리가 깊고 권세가 강한 가문으로 섭정왕의 강적이었다.
이 말을 들은 봉회근은 표정이 변했다.
“능 공자는 고모부가 반드시 패할 거라 생각하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탁자 옆에 앉았다.
그녀의 몸은 느긋하게 병풍을 기대고 있었다.
바로 이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름이 방방인 시녀가 별실의 정교한 나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리는 그녀의 뒤로 면사 옷을 입은 네 미인이 걸어 들어왔다.
그들은 각각 청순하고 요염하거나 매혹적이고 어여뻤다.
미인 네 명은 각각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청순한 분홍 옷 미인은 손에 다과를, 파란색 면사 차림의 여인은 술을, 빨간 옷의 미인은 부채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부채로 우아하게 아름다운 얼굴을 살짝 가리고 요염한 눈빛을 보냈다. 예를 올리는 자태마저 매혹적이었다.
“귀한 분들을 뵙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은 야홍릉에게 고정된 채,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공자, 정말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계시네요.”
소년은 그들의 미모가 빛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물론 이 말은 할 수 없었다.
귀족 가문의 귀공자가 어찌 이렇게 어지러운 곳의 기녀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말을 하여 손님의 노여움을 산다면 결말은 죽음뿐일 것이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문 쪽에 서 있는 두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서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둘러보아라.”
능묵은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봉여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 능묵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능묵은 바로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고개를 돌리고 봉여희를 보았다.
봉여희는 고개를 숙인 채, 옆에 서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능 공자가 이곳에 있어서 봉회근을 지켜줄 수 있지만 봉여희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가 제경에 온 것은 형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형의 안위는 그의 책임이다. 만약 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의 아버지는 그를 찢어 죽일 수도 있었다.
“나가기 싫으면 이리 와서 앉으시오.”
야홍릉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봉여희는 놀란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와서 앉으라고? 나는 형님을 보호하기 위해 온 것인데……’
이때, 부드러운 금소리가 들려왔다. 야홍릉, 봉회근과 봉여희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금 앞에 앉아 있는 짙은 빨간색 치마를 입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천산설련(天山雪蓮) 같은 차가운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녀가 연주하는 금에서도 차가운 음색이 들렸다.
금소리와 함께 다른 소리는 모두 종적을 감춘 듯했다.
별실 안은 귓가를 맴도는 금소리밖에 안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야홍릉은 병풍에 기대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옆에 앉은 빨간색 옷의 여인이 따른 술을 입가에 가져가 마셨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자태는 평소 보여준 차갑고 딱딱한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봉회근과 봉여희는 능 공자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 첩실이 여섯 명 있다는 것은 혹시 진짜 아닐까?’
“공자, 왜 서 계세요?”
파란색 면사차림의 미인은 봉여희를 바라보더니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공자도 어서 앉으세요. 제가 술을 따라 드릴게요.”
봉여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능 공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빨간색 옷의 미인은 야홍릉의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손톱에 색을 칠한 하얀 손으로 술잔을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술의 시원한 향이 코끝에서 맴돌고 미인의 몸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하며 부드러운 금 소리는 귀를 간지럽혔다. 기루 안은 곳곳에 어지럽고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인간 세상의 향락을 실컷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느낌을 못 잊고 자꾸 찾아오며 돈도 아낌없이 퍼붓는 것인가 보다.
봉회근은 미인을 감상할 기분이 전혀 없었다.
동제의 현재 상황을 떠올리면 그는 말할 수 없이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얼굴이 늘 그늘졌다.
야홍릉도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지막한 금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는 봉회근이 아까 한 질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섭정왕이 반드시 패배하냐고?’
그녀는 전까지 전생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 영위가 왜 패배했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황제는 나이가 어리지만 제왕의 술수를 잘 사용했다.
‘어린 나이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충성하게 만들다니…… 그것도 섭정왕의 영역 범위 안에서 일을 도모해?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영위에게 진짜로 야심이 있었다면 왜 황제가 일을 꾸밀 때까지 가만히 있은 거지? 그렇게 무심했나?’
미간을 찌푸린 야홍릉은 병풍에 기대앉아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금 소리가 끝이 나며 짙은 빨간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 어떤 곡을 듣고 싶으신가요?”
봉회근은 말을 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름이 무엇인가?”
“금슬(琴瑟)이라 합니다.”
“금슬 낭자.”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내가 밖에서 흰옷을 입은 미인도 금을 타는 것을 보았는데 둘 중에서 누가 더 잘하는가?”
금실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솜씨는 백접(白蝶) 언니와 비교할 바가 안 되지요. 언니의 금 타는 실력은 홍수관에서 최고랍니다.”
“그런가?”
야홍릉은 술잔을 들고 우아하게 마시며 말했다.
“그 낭자를 좀 보고 싶은데.”
금슬은 그 말을 듣더니 멈칫했다. 그러나 곧바로 생긋 웃으며 말했다.
“백접 언니는 금만 타지 몸을 팔지는 않아요. 그리고…….”
야홍릉은 담담하게 말했다.
“난 그저 그녀가 연주하는 곡을 듣고 싶을 뿐이네.”
금슬은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저었다.
“손님, 모르시나 본데 백접 언니는 홍수관에서 신분이 높고 성격도 만만치 않아 특별한 손님이 아니면 만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나는 특별한 손님이 아니라는 것인가?”
금슬은 눈을 내리깐 채, 잠자코 있었다.
다른 세 미인도 하던 행동을 멈추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봉회근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의미심장한 얼굴로 야홍릉을 힐끗 보았다.
“만약 백접 낭자를 불러온다면 이 은표는 자네 것이네.”
야홍릉은 품에서 두터운 은표 다발을 꺼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 돈이면 홍수관을 나가고도 남겠지.”
네 미인은 탁자에 놓인 은표를 보았으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홍의 미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자, 저희가 어쩔 수 없는 게 백접 낭자가 지금 신분이 특별한 사람들과…….”
“그러면 나는 감히 밉보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인가?”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홍의 미인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누구도 밉보일 수 없는 분이에요.”
“현재의 섭정왕인가?”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이곳에는 처음 와서 동제에서는 섭정왕의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는 것밖에 듣지 못했는데.”
홍의 미인은 고개를 저었다.
“섭정왕은 이런 곳에 발을 들이지 않아요.”
“섭정왕이 아니라고?”
야홍릉은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섭정왕을 제외하고 누가 이렇게 잘난 척한다는 말인가? 정말 만나 보고 싶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