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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83)화 (8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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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야홍릉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습니다.”

덤덤한 목소리에는 감정의 기복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힘을 주지도 않고 평온하게 내뱉은 말에는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담겨 있었다.

영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그는 책상 위의 찻잔을 집으며 말했다.

“내 말 한마디면 자네는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게 살게 될 것이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그러는가?”

봉회근은 안색이 변하며 뭐라고 하려고 했다.

“시도해 보시든지요.”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평온한 시선으로 영위를 바라보았다.

“저는 쉽게 겁을 먹지 않습니다.”

봉회근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능 공자가 실력이 대단하고 신분이 신비로우며 기세가 뛰어나 동년배 중에서 월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섭정왕부에서 섭정왕과 당당히 맞설 것이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영위는 차가운 얼굴로 압박감을 풍기며 말했다.

“나는 능 공자의 진실한 신분을 알고 싶네.”

그는 이 문제에 아주 집요했다.

야홍릉은 다시 한번 반복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서재의 온도가 내려가고 있었다.

봉회근은 얼어붙을 것 같은 분위기에서 어쩔 줄 몰랐다.

영위는 차가운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강렬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야홍릉도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깡마른 몸으로 곧게 선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하고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둘은 말없이 대치했다. 둘 다 차갑고 날카로워서 누구의 기세가 더 강한지 알 수 없었다.

옆에 서 있는 봉회근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 뒤, 영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능 공자, 왜 이 혼사를 거절하는 건가? 폐하께서 직접 정사를 보시면 내가 숙청되어 능 공자에게 누가 될 거라 생각하나?”

봉회근은 흠칫 놀랐다.

“고모부……!”

“그러는 전하께서는 왜 굳이 저를 사위로 삼고 싶으십니까?”

야홍릉이 물었다.

“혹시나 어린 황제에게 당하게 되면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하신 겁니까?”

영위는 안색이 변했다.

봉회근은 경악한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능 공자!”

야홍릉은 말없이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서재의 공기가 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제가 왕부에 들어온 지 이제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도 저를 한 번밖에 보시지 못하셨고요. 그런데 왜 제가 섭정왕부에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야홍릉이 덤덤하게 물었다.

“궁에 들어가신 뒤, 누군가를 만나신 겁니까? 아니면 무슨 말을 들으신 겁니까?”

봉회근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침착해진 얼굴로 영위를 바라보았다.

‘고모부께서 왜 갑자기 능 공자더러 섭정왕부의 사위가 되라고 하시지? 이유는 무엇일까? 능 공자의 말대로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심지어 고모부는 능 공자의 출신이나 상황도 모르시며 왜 이렇게 무모하게 딸의 혼사를 정하려는 거지? 분명 무언가가 있어.

그런데 오후에 나도 함께 궁에 들어갔잖아. 폐하를 만날 때, 고모부도 옆에 계셨는데. 떠나거나 다른 사람과 대화하신 적도 없었는데…… 아니야.’

봉회근은 미간을 찌푸렸다. 태화궁(太和宮)에서 나온 뒤, 복면한 흑의 남자가 그들과 스쳐 지난 적이 있었다. 영위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보았었다.

둘이 대화를 했는지 봉회근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복면을 한 흑의 남자는 태화궁으로 들어갔다. 황제를 만나러 간 게 틀림없었다.

‘폐하가 계시는 궁에서 복면도 하고 옷차림도 특이했지. 그리고 검은색 장포를 입은 그대로 폐하를 만나러 갔으니 그 사람의 신분은…….’

봉회근은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능 공자, 정말 싫은가?”

영위가 담담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아까처럼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 동안 생각할 시간을 줄 수도 있네.”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영위는 침묵하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 혼사를 거절하는 이유를 말해 줄 수 있나?”

“전 이미 첩실이 여섯 명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저는 당분간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잠깐 말을 멈추었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혼인으로 거래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세 번째 이유입니다.”

영위는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이건 거래가 아니네.”

“저에게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혼인은 거래입니다.”

야홍릉이 말했다.

“저와 군주는 안 지 하루밖에 안 됩니다. 혼인을 논할 정도로 서로 익숙하지 않다는 말이죠.”

영위는 눈빛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만약…….”

“만약은 없습니다.”

야홍릉이 그의 말을 잘랐다.

“이 세 가지를 제외하고 황족과 혼인하지 않는 것 또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군주와 혼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황족과 혼인하지 않는다고?’

영위는 침묵을 지키다 어두운 눈빛으로 물었다.

“황족과 혼인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영위는 찻잔을 들고 천천히 마신 뒤,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황족과 혼인하지 않는다면 세가와는 할 수 있나? 그건 받아들일 수 있나?”

말을 마친 그는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예를 들면 봉씨 가문은?”

봉회근은 또 깜짝 놀랐다.

‘고모부가 하신 말씀들이 다 간단하지 않은 것 같은데. 떠보는 것인가?’

“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혼인으로 거래하지 않는다고요.”

야홍릉이 말했다.

“그래서 강호 인사든 상인이든 생각해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영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 공자는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얘기했다.

그는 절대 이익을 위해 아내를 맞이할 생각이 없으며 당분간 혼인할 생각도 없다고 했다. 물론, 나중에 혼인한다고 해도 아내 되는 사람이 이익과 엮인 사람이 아닐 것이고 황족 여인도 아닐 것이라는 말이었다.

쉽게 말하면 섭정왕부의 군주 영묘언이든, 봉씨 가문의 봉령이든 그는 모두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참 강직한 소년이야. 고집도 세고. 말을 돌려 하는 법이 없군.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는 가상하나 섭정왕부에 있으며 나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다니…… 정말 봉변을 당할까 두렵지 않은 건가?’

영위는 말없이 차 한 잔을 다 마셨다.

“알겠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하게 말했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네. 마음에 두지 마시게.”

그의 말을 끝으로 서재를 감돌던 한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봉회근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또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와 봉형도 능 공자가 일반인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고 고모부도 그런 듯했다.

‘능 공자처럼 차가운 소년은 출신을 차치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인물일 거야. 우리 편으로 만든다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텐데.’

그러나 능 공자는 성미가 너무 딱딱해 공적인 일을 제외하고 다른 일은 타협조차 하지 않았다.

봉회근은 영위가 했던 ‘폐하가 직접 정사를 보면 나가 숙청될까 두렵나’라는 말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까 궁에서 만난 어린 황제는 이제 겨우 열네 살도 안 되는 어린아이였지만 제왕의 위엄이 제법 느껴져 무시할 수 없었다.

반년 뒤면 황제가 직접 정사를 볼 것이다.

‘그때면 섭정왕과 황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건 아닐까?’

봉회근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비록 혼사를 거절당했지만 영위는 그 일로 야홍릉을 괴롭힐 생각이 없는 듯했다.

표정도 위협적이던 아까와 달리 많이 풀어졌다. 높은 지위에 오랫동안 있은 그는 표정을 내색하지 않는 데 익숙해져 표정이 풀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위압감을 풍겼다.

야홍릉이 서재를 떠나기 전에 영위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나가서 둘러보고 싶습니다. 저녁은 밖의 주루에서 먹고 올 예정입니다.”

야홍릉이 대답했다.

영위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네. 능 공자는 제경에 처음 온 것 같으니 많이 둘러보시게.”

그는 낮에 왜 나가지 않았냐고 묻지 않았다.

더운 날씨이니 낮이 아닌 밤에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 두어 명 정도 붙여 주겠네.”

야홍릉은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제 시위가 있습니다.”

말을 마친 야홍릉은 영위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서재를 떠났다.

“전하, 제가 능 공자와 함께 나가겠습니다.”

봉회근이 섭정왕에게 말했다.

허락받은 봉회근은는야홍릉을 따라 서재를 나갔다.

말없이 방문을 나간 봉회근은 부풍전과 멀어진 뒤에야 입을 열었다.

“나도 고모부가 왜 갑자기 저런 생각을 하신 건지 모르겠소. 능 공자, 미안하게 되었소.”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소.”

그녀는 영위가 그 얘기를 한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떠보는 것일 수도 있었고 뭔가를 확인받고 싶은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말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야홍릉은 동제의 섭정왕부와 혼인을 맺고 싶지 않았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서라도 여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혼인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야홍릉은 여인이지만 감정을 무기로 자신의 목적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을 혐오했다.

목적에 이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도 싫었다. 섭정왕부의 군주가 그녀에게 호감을 보였을 때, 그녀에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군주를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었다.

거리를 유지해야 어린 소녀의 마음이 다치는 일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야홍릉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궁에 들어간 뒤, 폐하가 난처하게 굴지는 않았소?”

“그러지는 않았소.”

봉회근은 고개를 저으며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

“섭정왕 고모부가 곁에 있으니 겉으로나마 걱정이 담긴 말을 했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폐하가 그저 곧 직접 정사를 볼 어린아이라고만 생각했소. 하지만 이번에 보니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소.”

봉회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맞소.”

봉회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독에 당한 사건이 어린 황제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가소로움에 코웃음도 쳤었다. 뒤에서 몰래 치사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 어찌 큰일을 할 수 있겠냐고, 절대 섭정왕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황제를 직접 본 그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황제는 황제이고 상인은 상인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신분 계급이 존재했다.

상업계에서 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일지라도 권력 다툼에서 봉회근은 생각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당사자보다 방관자가 상황을 더 잘 파악한다는 말도 있지만 당사자이기에 자신의 처지를 더 잘 알고 상대방의 강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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