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난폭한 배려
야홍릉도 영가를 만나 보고 싶어 오늘 밤에 나가 그녀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당당하게 영가의 저택에 들어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대놓고 보는 게 몰래 정보를 알아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네, 그러죠.”
영묘언은 그 말을 듣더니 놀라고 기뻐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너무너무 잘됐어요. 능 공자, 고마워요! 지금 바로 사람을 시켜 새 옷을…….”
“군주.”
야홍릉이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할 건 없습니다.”
영묘언은 정신을 차리고 민망한 얼굴로 혀를 홀랑 내밀었다.
“하긴 그래요. 능 공자가 입고 있는 옷도 나쁘지 않아요. 아주 품위 있어 보여요.”
제경의 귀공자들이 입는 옷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듬직하고 멋있어 글공부만 하는 유약한 공자들과 달랐다.
영묘언은 기분이 좋아져서 젓가락을 들고 야홍릉과 능묵에게 음식을 한가득 집어 주었다.
“자, 능 시위, 사양하지 말고 많이 먹어.”
능묵은 말없이 사발에 산처럼 수북이 쌓인 고기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야홍릉의 사발도 수북이 쌓여 있었다.
둘은 눈을 마주치고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주인과 손님 모두가 즐거운 식사가 끝났다.
아니, 정확히는 영묘언에게만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야홍릉은 영묘언이 기분 좋게 시녀들과 함께 떠난 뒤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능묵은 차를 타서 건네주고는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낮잠을 주무시겠습니까? 제가 시중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안 잘 거야.”
야홍릉은 병풍 앞에 놓인 탑에 기대며 손에 든 책을 펼쳐 보았다.
“난 책을 읽을 테니 너는 눈을 좀 붙이거라.”
능묵이 대답했다.
“저는 졸리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능묵은 긴장한 표정을 짓더니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순순히 낮잠 자러 들어갔다.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었다. 순간 야홍릉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났다.
‘내가 능묵을 너무 난폭하게 대하는 건 아닐까? 배려는 맞는데 너무 난폭한가…… 이러면 안 되는데.’
야홍릉은 책을 내려놓고 미간을 문질렀다.
그녀는 능묵에게 지나친 관심을 쏟는 것 같았다.
그는 야홍릉의 영위일 뿐이고 직책은 그녀의 안전을 지키고 그녀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신은전의 규칙에 따르면 되었다. 그가 설마 굶어 죽고 지쳐 죽겠는가?
설사 임무를 수행하다 죽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 또한 영위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능묵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제외하고 그의 식사와 수면, 심지어 부상까지도 일일이 신경 쓰고 관리했다.
야홍릉은 몸에 힘을 푼 채, 탑에 비스듬히 기대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다.
그녀의 예쁜 눈매에 깊은 생각이 담겼다.
그녀가 능묵에 대한 믿음과 관심은 이미 영위에 대한 주인의 정상적 범주를 뛰어넘었다.
어쩌면 그녀가 한 번도 누군가를 가까이 두고 부리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었고 또 어쩌면 어영위가 다른 하인보다 특별해서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능묵은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존재이기도 했다. 능묵이 그녀의 앞에 나타난 순간, 그녀가 능묵을 자신의 측근 영위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이 소년은 그녀의 인생에서 특별한 지위를 수여 받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야홍릉은 이것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전생에 그녀는 한옥금에게서 크게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한옥금을 쉽게 믿었고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배신당해 큰 대가를 치렀다. 잃은 것은 그녀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함께 전쟁을 치른 휘하의 장군들도 있었다.
‘이번 생에는 절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능묵을 그저 어영위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능묵은 남자인 측근 시위이고 야홍릉은 여인이었다.
둘 사이에 남녀 간 정이 없고 주종 간 신분 차이만 존재한다고 해도 야홍릉은 자신이 능묵의 존재를 받아들인 뒤로 둘 사이가 어쩔 수 없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능묵이 하는 일이 그녀 옆에서 보호하는 것 이상은 아니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운 주종관계와 소년 영위의 뼛속 깊이 박힌 충성에 차가운 성미의 야홍릉도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녀는 차가운 사람이지만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매정한 사람이었다면 전생에 사랑 때문에 크게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단 탑에 기댄 야홍릉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사랑은 그녀에게 사치스러운 존재였다. 그녀는 평생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여인의 정조 따위는 이미 그녀의 관심 범위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녀는 능묵이 남자라서 가까이하면 안 되고 이런 문제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녀에 대한 소년의 충성심이 순수하고 배신이나 속임수 같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야홍릉은 그를 계속해서 옆에 둘 생각이었다.
그녀와 함께 전쟁에 나간 장군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나신이나 봉양, 봉우 같은 사람들처럼.
어쩌면 능묵과는 그들보다 더욱 가까워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제는 능묵은 영원히 능묵이어야 한다는 거야. 나의 어영위. 다른 신분은 절대 안 돼.’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야홍릉은 더 이상 능묵의 문제에 골머리를 앓지 않기로 했다.
또 앞으로도 지금처럼 능묵과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다시 책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했다.
저녁의 노을이 창문으로 비춰 들어오자 야홍릉은 손에 든 책을 내려놓고 시큰거리는 눈을 비볐다. 그리고 일어서서 방문을 나갔다.
천천히 회랑까지 걸어간 그녀는 난간 앞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평온한 그녀의 눈매에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겼다.
“능 공자.”
영묘언이 회랑 한쪽 끝에서 급히 걸어왔다.
소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담겨 있었다.
“부왕과 오라버니가 궁에서 돌아오셨어요. 능 공자더러 부풍전에 오시래요.”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영묘언을 바라보고 담담하게 물었다.
“봉 공자가 궁에서 위험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까?”
“아니요, 부왕이 계시는데 누가 감히 오라버니한테 손을 대겠어요?”
영묘언은 코를 찡그리더니 곧바로 야홍릉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능 공자, 부왕께서 능 공자와 의논할 일이 있으시대요.”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말이 끝나자마자 능묵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야홍릉과 영묘언은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소매가 좁고 허리를 조이는 검은색 장포를 입고 있어 몸매가 더욱 훤칠하게 보여 날카로운 기세를 뽐냈다. 용모는 평범했지만 소년의 기세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이 강했다.
능묵은 말없이 회랑을 지나 야홍릉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에 가서 섰다.
영묘언은 저도 모르게 그를 힐끔힐끔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 수행 하인은 참 기가 세. 배 장군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아.’
야홍릉도 몸을 돌리고 말했다.
“전하께서 의논하실 일이 있으시다니 가서 보시죠.”
영묘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말없이 전청으로 걸어갔다.
“저녁을 먹은 뒤, 나가서 둘러보지 않으실래요?”
한참 걸은 영묘언이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제가 희곡 보는 데 모셔갈까요? 제경에 꽤 괜찮은…….”
“괜찮습니다.”
야홍릉은 희곡에 별 관심이 없었다.
‘희곡을 안 좋아하나?’
영묘언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능 공자는 큰일을 할 사람인데 언제 희곡을 들을 여유가 있겠어?’
“그럼 우리 장정 거리에 가서 둘러볼까요?”
영묘언이 말했다.
“그곳에 커다란 도장이 있는데 도장에서는 종종 무술을 겨루는 활동이 열려요. 능 공자에게도 틀림없이 재미있는 곳일 거예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묘언이 종알거리는 것을 들으며 셋은 곧 부풍전에 도착했다.
섭정왕과 봉회근은 정자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섭정왕비도 옆에 있었다.
섭정왕비는 능 공자가 온 것을 보고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능 공자, 푹 쉬었나?”
야홍릉은 정자 밖에 선 채, 여유로운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왕비와 군주의 접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다행이네.”
섭정왕비는 영묘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묘언아, 어미와 함께 연꽃 보러 가자꾸나.”
그 말을 들은 영묘언은 무의식적으로 봉회근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오라버니의 표정을 본 그녀는 부왕이 능 공자를 괴롭힐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어머니와 함께 자리를 떴다.
야홍릉은 정자에 올라간 뒤, 섭정왕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하실 말씀이 무엇이신지요?”
영위는 담담하게 말했다.
“서재로 가지.”
그리고 정자를 떠나갔다.
야홍릉과 봉회근은 그를 따라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영위는 책상 뒤의 의자에 앉아 위엄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능 공자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네.”
이 말이 나오자 서재에는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전 이미 말씀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하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위가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내 집에 있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좀 경우가 아니지 않나?”
“섭정왕부에서 지내는 게 제 유일한 선택지는 아닙니다.”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투는 평온하고 차분했다.
“황성에 다른 객잔도 많을 텐데 전하께서 제가 여기에서 지내는 게 싫으시다면 지금 바로 떠나겠습니다.”
“능 공자,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그러면 내 마음이 불편하오.”
봉회근은 다급히 말리며 고개를 돌려 영위를 바라보았다.
“고모부께서는 왜 꼭 능 공자의 신분을 알려고 하시는 겁니까?”
영위는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난 능 공자를 섭정왕부의 사위로 들일 생각인데 능 공자의 생각은 어떤가?”
이 말이 나오자 서재 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봉회근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고모부, 능 공자의 저택에는 이미 첩실이 여섯 명…….”
“회근아, 넌 이 핑계를 믿느냐?”
영위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믿지 않는다.”
“그건 전하의 사정이고요. 저는 섭정왕부의 사위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영위는 실눈을 뜨고 물었다.
“내가 꼭 딸을 자네에게 시집보내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