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제 직책입니다
야홍릉은 영위가 황제에게 패배한 원인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그 이유가 전생에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당한 배신의 고통 때문인지 동제의 황제와 야소숙의 관계 때문인지 그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궁금증이 생겨난 것이다.
다른 나라의 황족간 암투에 대해 그녀는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야소숙과 몰래 연락을 주고받은 동제의 어린 황제 영린에 대해서 야홍릉은 그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적의가 생겼다.
‘장공주 영가에 대해서는 오늘 밤에나 알아볼 수 있겠군.’
방안은 조용했다.
야홍릉은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앉았다. 계속 생각을 하고 싶었지만 말을 타고 밤새 달린 탓에 피곤한 데다 능묵의 시원한 손놀림에 잠이 쏟아졌다.
능묵은 이를 보고 힘을 살짝 줄였다.
야홍릉은 곧바로 잠이 들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밖에서 기척이 들리자 야홍릉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나 곧 뭔가를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소년은 꿇은 자세로 바닥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야홍릉의 무릎 위 허벅지의 위치를 주무르고 있었다. 가끔 가볍게 두드리기도 하면서 아주 열심이었다.
그가 고개를 숙인 탓에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머릿결이 어깨에 드리워져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마르고 꼿꼿한 등줄기와 한결같이 공손한 자세를 볼 수는 있었다.
야홍릉은 말없이 있다가 다리를 들어 보았다. 어젯밤에 밤새 말을 타고 달린 탓에 시큰거리던 다리가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이렇게 종일 주무른 것이냐? 힘들지 않느냐?”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능묵은 이미 그녀가 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뒤로 물러나며 공손하게 말했다.
“주인님을 모시는 것은 제 일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야홍릉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꿈틀거렸다.
‘주인을 모시는 게 일이라고?’
어영위의 일은 주인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 머슴이나 시녀처럼 주인의 시중을 드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능묵더러 일어나라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그녀도 따라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보니 푹신한 비단 등받이가 그녀의 움직임과 함께 의자에서 떨어졌다.
‘아주 세심하군.’
야홍릉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말없이 문 앞으로 걸어간 뒤, 방문을 열었다.
뜨거운 빛이 순식간에 비춰 들어왔다.
눈이 부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가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눈이 완전히 강렬한 햇빛에 익숙해졌을 때, 섭정왕부의 군주 영묘언이 그 옆에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뒤에는 여덟 명의 시녀가 뒤따르고 있었는데 앞 네 명의 손에는 음식을 담는 나무함이 두 개씩 들려 있었다.
그리고 뒤를 따르는 네 시녀는 접시를 들고 있었다.
접시에는 각종 요리와 탕 가마가 들려 있었다.
“능 공자!”
영묘언은 멀리서부터 방문이 열리고 능 공자가 문 옆에 서 있는 것을 보더니 다급히 뛰어오며 말했다.
“능 공자, 배고프세요? 제가 점심 식사를 준비하게 했는데 능 공자의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서 좀 많이 하라고 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돌아서서 손짓했다.
“음식을 얼른 올리렴.”
여덟 명의 시녀가 음식을 들고 걸어왔다.
야홍릉은 말없이 자리를 비켜 주어 시녀들이 편히 음식을 나르게 했다.
그녀는 시녀들이 빠른 솜씨로 상을 차리는 것을 보고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성대한 대접을 못 받아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열정적인 소녀를 만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한 번 다녀왔는데 능 공자의 문과 창문이 모두 닫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능 공자가 너무 피곤해서 쉬는 줄 알고 깨우지 않았죠.”
영묘언은 생긋 웃으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능 공자를 바라보았다.
“능 공자, 푹 쉬셨어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소녀의 발그레한 얼굴에 돌렸다. 그리고 밖의 뜨거운 태양을 보더니 말했다.
“밖이 더우니 들어와서 얘기하시죠.”
영묘언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문턱을 넘었다.
“부왕과 오라버니는 궁으로 가셨고 어머니는 식사 후 진국공부(鎭國公府)로 가셨어요. 집에는 지금 저밖에 없으니 능 공자께서 제가 대접을 잘하지 못한다고 탓하지 마세요.”
능묵은 말없이 야홍릉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야홍릉은 차를 들고 느긋하게 마셨다.
목을 적당히 축인 다음에야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영묘언을 바라보았다.
“며칠 신세를 지는 입장이라 섭정왕부에 폐를 끼칠까 걱정이지, 어찌 군주를 탓하겠습니까?”
야홍릉은 담담하게 말했다.
“군주께 감사드립니다.”
“능 공자, 그렇게 격식을 차리지 마세요. 귀한 손님이 오는 경우가 어디 흔한가요?”
영묘언은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저도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해서…….”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앉으시죠.”
영묘언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능 공자가 흔쾌히 허락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는 능 공자가 또 남녀칠세부동석 어쩌고 할 줄 알았어요. 능 공자가 그렇게 고리타분한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식탁에는 향긋하고 맛도 좋은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황족 출신인 야홍릉은 이런 산해진미에 익숙해져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능묵은 영묘언이 있기에 말없이 옆에 서서 식사 시중을 들려고 했다.
그런데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중들 것 없으니 앉아라.”
능묵은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하고 야홍릉의 옆에 앉았다.
이를 본 영묘언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돌려 능묵을 바라보더니 다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능 공자, 이 사람은…… 공자의 수행 하인인가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능 공자는 차가워 보이셨는데, 자신의 하인에게는 정말 다정하시네요…….”
그녀는 턱을 괸 채, 호감을 숨기지 못했다.
“사람을 부리며 거드름을 피우는 세가의 공자들보다 훨씬 나아요.”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영묘언의 마음에 관심이 없었다.
영묘언은 능 공자를 좋아하기에 그가 하는 행동 모든 행동까지도 다 좋게 보였다. 그래서 세상의 갖은 아름다운 글귀들을 다 그에게 붙이고 싶었다.
탁자 위는 아주 조용했다.
능묵은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가 앉아서 밥을 먹는 것도 주인의 명령에 따르기 위함이지 이 일로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지 않았다.
탁자에는 많은 음식이 올라 있었다.
물고기, 새우, 고기, 튀긴 것, 볶은 것, 찐 것, 담백한 음식, 매운 음식, 달콤한 음식 등등.
그리고 각종 탕까지 있었다.
하지만 능묵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앞에 놓인 두부 요리만 집어 먹었다.
영묘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음식들 모두 입에 안 맞니?”
능묵은 대답하지 않고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영묘언은 이렇게 딱딱한 하인을 본 적이 없어 저도 모르게 자꾸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용모를 바꾼 능묵은 평범한 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또 영묘언은 지금 한창 능 공자에게 푹 빠져 있을 때라 곧 능묵에게 신경을 껐다.
그녀는 일부러 젓가락을 더 가져와 능 공자에게 음식을 집어 주었다.
고귀한 출신의 영묘언은 태어났을 때부터 수많은 사람의 시중을 받았다.
직접 국을 떠서 남에게 주는 것은 처음인지라 행동이 서툴렀으나, 그녀는 기쁘기만 했다.
그녀는 살뜰하게 능 공자를 대접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능 공자는 오라버니의 친구이시니 저희 섭정왕부의 귀한 손님이시기도 하죠. 부왕을 대신해 능 공자를 잘 접대하는 것은 제 임무이니 절대 어려워하지 마세요.”
야홍릉은 어렵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영묘언의 지나치게 열정적인 태도에 불편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영묘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기회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말해 주어 영묘언이 헛된 희망을 접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야홍릉은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바로 접었다.
중요하지 않은 소녀 때문에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인다면 그녀의 정체를 들킬 수 있었다. 그 허점을 그녀 스스로 만들 수는 없었다.
열일곱 살의 능 공자는 가장 좋은 가림막이었다.
그러나 열일곱 살의 능씨 여인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진실한 신분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각 나라 황족 여인 중에서 야홍릉처럼 인상에 남을 정도로 차가운 성격의 여인이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전쟁터에서 몇 년간 있었기에 각 나라 귀족들은 대다수가 그녀의 이름을 들어 보았고 나이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만 생각을 해본다면 야홍릉의 진실한 신분이 드러날 수 있었다.
“능 공자.”
영묘언은 고개를 들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야홍릉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가 장공주가 저택에서 연꽃 감상회를 한다던데…… 아, 장공주는 지금 폐하의 누님이세요. 영가 장공주는 조금 다사해서 제경의 귀족들과 만남을 자주 가져요. 그래서 종종 각종 명목으로 꽃구경 연회를 꾸리시죠.”
영묘언은 입을 삐죽거렸다. 장공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심지어 싫어하는 것 같았다.
“지금 마침 여름이고 호수에 연꽃이 활짝 피었으니 제경의 세가 공자들과 소저들을 불러 공주부에서 꽃구경도 하고 차도 마시며 시도 읊고…….”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틀 전에 저에게 초대장을 보냈더라고요. 예전이라면 저는 이런 연회에는 나가지 않았을 거예요. 잘난 척하는 그 얼굴을 보기 싫어서요.”
야홍릉은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예전에는 이런 연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올해에는 갈 거라는 말이었다.
‘올해는 왜 가지?’
그녀의 저택에 능 공자가 왔기에 같이 가서 그 사람들에게 잘난 척하며 영가의 기세를 꺾을 생각이었다.
결국에는 소녀의 허영심 때문이었다.
야홍릉은 그녀의 속내를 읽었다. 영묘언은 속생각을 모두 얼굴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열세 살의 소녀가 지기 싫어하고 약간의 허영심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잠깐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모레 말씀이십니까?”
영묘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대 어린 눈빛으로 능 공자를 바라보았다.
“저랑 같이 가줄 수 있어요?”
‘능 공자의 절세 미모로 분명 연회의 모든 공자와 귀족 소저의 기를 눌러 줄 수 있을 거야. 그때도 영가가 내 앞에서 도도한 척하는지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