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이유가 무엇일까?
봉완은 정자에서 내려오며 담담하게 말했다.
“신분이나 출신은 가짜로 꾸밀 수 있고 첩실 여섯 명도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이름까지도 가명을 쓸 수 있지. 하지만 능 공자가 아무리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그의 분위기만큼은 절대 꾸밀 수 없는 부분이야.”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봉회근을 바라보았다.
“능 공자는 출신이 고귀할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생사가 걸린 대사를 겪은 사람이 분명해. 고모는 알아볼 수 있단다.”
봉회근은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이 일을 대인과 의논해 봐야겠어. 훌륭한 사위를 얻는다면 섭정왕부나 봉씨 가문, 그리고 능 공자에게도 좋은 일이잖아.”
봉회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능 공자가 원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가 출신이 얼마나 고귀하고 능력이 얼마나 강하며 얼마나 많은 생사를 겪었는지 모르지만 혹 능 공자가 권력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면, 그래서 섭정왕의 여식과 혼인할 생각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다 쓸데없는 생각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그저 생각에 그칠 뿐이었다.
* * *
“영풍원은 난정소원(蘭亭小院)과 아주 가깝게 떨어져 있어요. 능 공자,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난정소원으로 가셔서 오라버니를 찾으시면 돼요. 이 회랑을 지나면 바로 난정소원이거든요.”
영묘언은 야홍릉에게 길을 가리키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능 공자는 오라버니의 친구이시니 제 친구이기도 해요. 내 집처럼 편히 지내세요.”
야홍릉은 줄곧 말없이 길을 걷다 영풍원에 들어갔다.
섭정왕부 안은 규정이 엄격하다고 하나 앞뜰만 칙칙할 뿐, 다른 곳의 환경은 아주 좋았다.
지나는 곳마다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섭정왕비의 성미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보이는 것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운 여인이었다. 저택에 첩실이나 통방 하녀가 없다 보니 섭정왕의 총애를 받으려고 추악한 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한가할 때마다 하는 일이 정원을 가꾸고 풍경을 감상하는 게 다일 것이다.
영풍원과 난정소원은 난꽃으로 가득한 정원을 사이 두고 있었다.
하늘이 맑고 미풍이 살랑살랑 부는 날에는 향명 한 잔을 들고 정원 앞에 앉아 난꽃을 감상하고 기분이 좋을 때면 친구를 불러 함께 모임을 가질 수도 있었다.
여인에게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저택으로 들어가자 영묘언은 직접 시녀 두 명을 골라 능 공자의 시중을 들게 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능 공자, 오늘 제가 여기서 능 공자랑 함께 식사하면 안 될까요? 오라버니는 부왕과 중요하게 나눌 얘기가 있다고 하니 제가 가는 걸 반기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전 혼자서 밥 먹기 싫어요. 그러니…….”
소녀는 불쌍한 얼굴로 손을 맞잡고 말했다.
“저 좀 거둬 주세요.”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분한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여기는 군주의 집이니 군주가 식사하고 싶은 데에서 하시면 됩니다.”
영묘언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능 공자는 손님이시고 또 오라버니의 친구이시니 제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하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자리를 피해드릴게요.”
배려심이 넘치는 말투였다.
야홍릉은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주시지요.”
‘뭐라고?’
영묘언은 그가 이렇게 깔끔하게 거절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지라 그만 당황했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능 공자는 제가 싫어요?”
“아니요.”
야홍릉이 말했다.
“하지만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군주는 귀한 분이시니 낯선 남자와는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영묘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그런 고리타분한 핑계를 능 공자는 왜 이렇게 진지하게 대는 거지?’
그녀는 아무리 봐도 능 공자가 규정이나 예법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영묘언은 입을 삐죽 내밀고 능 공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그가 동제 제경의 귀공자들과 전혀 다른 것 같았다. 그녀를 보고 일부러 환심을 사려고 애쓰지도 않고 또 일부러 멋진 척하며 그녀의 이목을 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굽신거리며 그녀가 화날까 두려워하는 모습도 전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능 공자가 외적으로 그들보다 훨씬 잘생긴 것을 제외하고 또 분위기도 그의 아버지보다 더 차갑고 날카롭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준수한 외모로 인해 여성스러워 보이는 점이 전혀 없었다.
어쩌면 이 점이 바로 야홍릉이 남장을 해도 들키지 않은 가장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녀의 분위기는 전혀 여인답지 않게 차갑게 날카로웠다. 몸집이 남자처럼 크지 않고 얼굴도 예뻤지만 누구도 그녀를 여인으로 보지 않았다.
게다가 야홍릉은 어렸을 때도 다른 소녀들처럼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귀에 그 흔한 귓구멍 하나 없었다. 이 점에서 더더욱 남자 같았기에 그녀를 남장한 여인으로 의심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방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영묘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능 공자께서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테니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먼저 쉬고 계세요. 점심에 사람을 시켜 식사를 가져오게 할게요.”
그리고 문 옆에 서 있는 두 시녀를 가리켰다.
“이들은 채하(采荷)와 청련(靑蓮)이에요. 능 공자께서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면 이들을 부르시면 돼요.”
야홍릉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묘언은 빠른 속도로 떠나갔다.
다만 떠나기 전에 능 공자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서운함과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야홍릉은 모르는 척하고 창가로 걸어가, 뒷짐을 지고 정원에 핀 꽃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동제의 황성.
어린 황제 영린.
섭정왕 영위.
장공주 영가.
그리고 궁에 있는 신비한 무사까지…….
그녀가 알고 싶은 일들을 알아보려면 동제의 제경에 꽤 오랫동안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계속 섭정왕부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동제의 제경에 대해 잘 몰랐다. 예전에도 와본 적이 없었다.
‘환경 좋고 조용한 객잔에서 지내야겠어.’
두 시녀가 물 대야와 접시를 들고 왔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능묵이 대야와 접시를 받아 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한 손에 대야, 다른 손에는 접시를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가 보아라. 여기는 당분간 시중을 들 필요가 없다.”
시녀들은 예를 올린 뒤, 영묘언이 능 공자의 시중을 들라고 남겨 두었던 두 시녀까지 함께 정원의 문까지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정원 밖을 나가지는 않았다.
섭정왕부에는 규칙이 많았는데 시녀들은 모두 훈련을 잘 받아 왕부의 주인이나 손님을 모실 때 모두 조용하게 움직이며 지시를 기다렸다.
능묵은 들어와 세숫물을 담은 대야와 깨끗한 수건을 올려놓은 접시를 옆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야홍릉도 말없이 세수하러 일어섰다.
능묵은 잠자코 옆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해가 높이 걸리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능묵은 돌아서서 창문을 닫았다. 그는 야홍릉이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밤새 길을 가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침대에서 좀 쉬시겠습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앉아 있으면 된다.”
능묵은 말없이 야홍릉의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야홍릉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 갑자기 물었다.
“섭정왕부는 수비가 어떻더냐?”
능묵이 대답했다.
“주인님의 저택보다 더 엄격한 듯하나 그다지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안전하지 않다고?’
야홍릉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첩자가 있다는 말이냐?”
“네.”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의 저택처럼 안전하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내 집에 들어온 첫날에 이미 저택의 상황을 다 파악했나 보구나.”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능묵은 무릎을 털썩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
“그게 네 일인데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이냐?”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하거라.”
능묵은 알겠다고 한 뒤, 일어나 말없이 야홍릉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렇다면 우리도 몰래 움직일 필요가 없겠구나. 괜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니.”
야홍릉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낮에 쉬고 밤에 다시 나가 돌아보자꾸나.”
능묵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섭정왕은 진을 치는 데 고수입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발견한 일이었기에 능묵의 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섭정왕부는 여러 명의 호원이 순찰하는 것을 제외하고 저택의 중요한 곳마다 진법(陣法)이 걸려 있었다. 부풍전은 진법의 중심이고 영위의 서재도 진법 안에 있었다.
첩자가 섭정왕부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낮이든 밤이든, 진법을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섭정왕부의 금지된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시체로 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왕부만 봐도 영위가 어리석고 무능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능묵.”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영위 같은 사람이 참패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 것 같으냐?”
영위는 능력, 권력, 박력까지 있었고 그 누구보다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기에 경계심 또한 강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그는 누가 봐도 어린 황제의 가장 강한 적수였다.
‘그런 그가 참패했다면…….’
능묵은 침묵을 지키다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배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야홍릉은 흠칫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순간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 승자여야 하는데 그가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것은…… 가까운 사람이 배신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지 않을까?’
배신으로 인한 처참한 비극. 이는 야홍릉 자신이 당한 일이었다.
우습게도 그녀는 이 교훈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했다. 익숙한 통증이 가슴에서 전해졌다.
야홍릉은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시선은 고요하기만 했다.
섭정왕부에는 아내가 한 명,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었다.
봉완과 영위는 사랑한 지 십 년이 넘는 부부였다. 그녀가 영위를 배신할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크지도 않았다.
게다가 봉씨 가문과 영위는 같은 배를 탄 운명이었다. 한쪽이 다치면 다른 한쪽도 다치게 되는 것이었다. 그동안 살았던 정이나 가문의 이익을 봐도 봉완은 그를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
영묘언, 방금 그녀가 보았던 소녀였다.
야홍릉은 그녀에게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할 가능성도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옥은 이제 열한 살밖에 되지 않는 아이였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섭정왕과 접점도, 엮인 이익도 없고 동정할 이유도 없었지만 배신이라는 것에 대해 치를 떨었기에 이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