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패기가 넘치는군
섭정왕비 봉완(鳳婉)은 이름처럼 부드러운 여인이었다.
상인의 딸인 그녀는 원래 황실 가문의 정실로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영위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규칙의 속박을 못 이겨 측비의 신분으로 영위와 혼인했다.
왕부로 들어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딸을 낳았고 2년 뒤에 아들을 낳았다. 아들딸을 모두 가진 그녀는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듯싶었다.
그러나 측비는 결국 첩에 불과하니, 부부 사이가 아무리 좋아도 황실의 규정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선황이 살아 있을 때, 영위에게 사혼도 여러 번 하고 왕비를 뽑는 연회도 두 번이나 열었지만 영위가 모두 뒤에서 망쳐버렸다.
선황이 죽고 새 황제가 등극하였고, 영위는 섭정왕이 되었다.
그 뒤로 더 이상 영위를 구속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바로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경한 태도로 봉완을 정실로 들였다.
그리고 적장자 영옥(榮鈺)을 세자로 세웠다.
봉완이 정실이 되자 섭정왕 영위의 아들딸 또한 정정당당한 적자가 되었다. 그러니 하나밖에 없는 세자로 책봉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황제는 이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딸 영묘언(榮妙言)은 올해 열세 살로 제법 아가씨티가 났고, 세자인 영옥은 올해 갓 열한 살이 되었다.
“섭정왕은 차갑고 매정해 보이나 사람을 못살게 굴지는 않소.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부운전(扶雲殿)으로 가는 길에 봉회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고모님을 뵙고 능 공자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겠소.”
그는 능 공자에게 황실의 예법을 아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능 공자의 도도한 성격을 떠올린 그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까 서재에서 섭정왕에게 예를 올리지 않은 건 그가 예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성미가 지나치게 도도한 탓이었다.
예법을 모른다면 가르칠 수 있었으나 단순히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는 것이라면 봉회근도 강요할 수 없었다. 능 공자는 영위에게 사정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를 보호하기 위해 섭정왕부에 온 것인데다 능 공자는 동제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능 공자는 동제에 온 손님에 가까웠다.
봉회근은 영위 쪽에도 말을 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위가 능 공자의 태도를 보고 그의 신분을 조사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었다.
“능 공자께서 조용히 지내고 싶으시다면 고모께 말씀드려 왕부의 사람들이 최대한 능 공자를 찾아가는 일이 없게 하겠소.”
봉회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모부님과 고모님은 모두 선하신 분인데다 섭정왕부는 사람이 많지 않소. 측비나 다른 첩실도 없고 서자도 없어 주인이라고는 두 분과 두 조카가 다요.”
야홍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에 본 영위의 모습과 봉회근의 말에서 그녀는 영위의 인품과 섭정왕부의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섭정왕 영위와 왕비 봉완 사이에 정말로 정이 깊은지, 아니면 봉씨 가문의 눈치를 보느라 첩실을 들이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섭정왕은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부부 사이의 감정을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정말 첩실을 들이고 싶었다면 상인 가문인 봉씨 가문에서는 간섭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불만을 표할 자격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선황이 그에게 사혼한 혼사도 몰래 망쳐버렸다.
영위는 여색에 빠지지 않고 흔들림 없이 평생 아내만 바라보았다. 병권과 조정 대권을 손에 쥔 채, 탁월한 능력과 뛰어난 수완을 자랑했다.
동제에서 감히 그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사람이 전생에 왜 어린 황제에게 패했을까?’
“오라버니?”
이때, 한 소녀의 목소리가 야홍릉을 사색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그녀가 시선을 들자 분홍색 옷을 입은 어여쁜 소녀가 정자에 앉아 놀랍고 기쁜 시선으로 그들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머니, 오라버니가 오셨어요!”
소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치마를 들고 정자에서 나와 이쪽으로 뛰어왔다.
봉회근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못 말린다는 듯이 말했다.
“천천히 걸어. 여자애가 우아하게 걸어야지, 사내애처럼 뛰어다녀서 되겠어?”
그 말을 들은 소녀는 회랑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코를 찡그린 채, 코웃음을 쳤다.
“또 설교예요? 오빠 정말 미워요. 아버지도 아무 말 안 하신다고요…….”
말을 하던 소녀는 옆에 있는 준수한 소년에게 시선이 빼앗겼다.
순간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오, 오라버니……?”
영묘언은 상기된 얼굴로 야홍릉을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이분은…….”
봉회근은 흠칫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차분한 얼굴의 능 공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오라버니.”
영묘언이 가볍게 기침하고 곧바로 우아한 모습을 되찾았다.
“저한테 손님을 소개해주세요.”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봉회근은 실소를 터뜨렸다.
‘능 공자가 잘생기긴 했지. 어디를 가든 소녀들의 주목을 받는다니까.’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 분은 내 생명…… 아니, 내가 밖에서 알게 된 친구 능씨야. 무공이 아주 강해 이번에 아버지께서 특별히 날 보호하라고 붙여 주셨지.”
그의 말투에는 옅은 한숨이 담겨 있었다.
능 공자가 잘생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여동생도 한눈에 반하지 않았던가?
능 공자에게 이미 첩실이 여섯 명이나 있지 않았다면 봉령은 능 공자를 계속 짝사랑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섭정왕부에 오자마자 눈이 높기로 소문난 영묘언조차 이렇게 반했으니 봉회근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아이들은 곱게 커서 그런가? 아니면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왜 하나같이 이렇게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거야?’
봉회근은 미간을 문질렀다.
‘능 공자가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그렇지, 처음 만나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이래도 되나?’
“능 공자, 안녕하세요.”
영묘언은 눈을 내리깔고 우아하게 예를 올렸다.
“처음 뵙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황족 출신 귀족답게 우아하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봉회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야홍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체했다.
“묘언아, 남녀칠세부동석이다.”
봉회근은 입귀를 실룩이며 손가락으로 영묘언의 이마를 튕겼다.
“네가 능 공자에게 부탁드릴 일이 뭐가 있다고 그래? 능 공자에게서 수 놓는 법이라도 배우려고?”
“오라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영묘언은 생긋 웃으며 능 공자의 준수한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바로 시선을 내리깔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오라버니가 방금 능 공자는 무공이 강하다고 하셨잖아요?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되겠네요.”
“네가 무공을 왜 배우니?”
꾸짖는 듯한 여인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애가 서예나 바둑을 배우면 되지, 칼을 휘두르는 것은 사내애들이나 하는 거야.”
봉회근과 야홍릉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화려한 빨간색 비단 치마를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온화한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은 관리를 잘한 덕에 피부가 하얗고 아주 아름다웠다.
그녀가 바로 섭정왕부의 안주인인 봉완이었다.
봉회근은 옷을 들고 무릎을 꿇으며 큰절을 올렸다.
“고모님을 뵙습니다.”
“뭐 하는 거니? 얼른 일어나.”
여인은 다급히 허리를 굽히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꾸지람했다.
“큰절을 올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왜 고모 말을 안 듣는 거야?”
봉회근은 일어서며 공손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고모님께서 저 때문에 걱정을 하셨으니 사죄해야 마땅하지요.”
섭정왕비는 표정이 변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은 것을 보니 안심이 되는구나. 앞으로도 조심하렴.”
“어머니.”
영묘언은 섭정왕비의 팔을 끌며 애교를 부렸다.
“이분은 오라버니의 친구 능 공자래요.”
섭정왕비는 고개를 들고 옆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아주 귀티가 흐르는 공자군.’
봉완은 딸이 왜 갑자기 능 공자더러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입가를 실룩이며 말했다.
“이 아이가 곱게 자라서 제멋대로네. 능 공자, 이 아이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게.”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이 과하십니다. 군주(郡主, 왕의 여식)의 성격이 호탕하여 아주 사랑스럽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섭정왕비와 봉회근, 그리고 영묘언은 모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봉회근은 차가운 능 공자가 칭찬하자 놀란 것이고 영묘언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반면, 섭정왕비는 능 공자의 태도를 보고 조금 놀랐다.
그녀는 상인 가문 출신이라 어려서부터 성격이 좋고 너그러웠다. 섭정왕비가 된 후에도 딱히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섭정왕의 권세에 겁을 먹고 그녀의 앞에서도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이 굽신거리는 데 익숙해졌던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제경의 귀족 가문에서도 그녀의 앞에서 이처럼 당당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누군가는 섭정왕의 권력을 두려워해서, 또 누군가는 섭정왕에게 빌붙고 싶단 이유로 그녀의 앞에서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유독 눈앞의 능 공자는 여유롭고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소년에게서는 겁먹거나 불안한 기미를 전혀 읽어볼 수 없었다. 심지어 소년은 공손하게 굴지도 않았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출신이 비범해서 그러는 건가?’
말없이 있던 그녀는 시선을 능 공자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흑의 소년에게 옮겼다. 그를 보니 대충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 봉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지? 회근아, 능 공자를 모시고 저리로 가서 차를 마시자꾸나.”
말을 마친 그녀는 시녀더러 차를 타라고 했다.
그들은 회랑을 지나 아까 영묘언이 있던 정자에 도착했다.
부풍전(扶風殿)도 호수 가까이에 지은 것이라 봉회근의 별원과 장식도 비슷하고 풍경도 아름다웠다. 섭정왕부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엄숙한 왕부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정원이 존재했다.
영묘언은 시간이 날 때면 정자에 앉아서 꽃을 구경하고는 했다. 마침 여름이라 호수에는 커다란 연잎과 분홍색, 흰색의 연꽃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면 향긋한 꽃 냄새가 호수에서 불어와 정원 전체를 꽃향기로 물들였다.
섭정왕비는 봉회근과 능 공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자 시녀가 둘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영묘언은 탁자 앞에 앉아서 야홍릉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능 공자,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데 정말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계시네요.”
말을 마친 그녀는 진심을 담아 얘기했다.
“그전까지 저는 회근 오라버니만 보기 드물게 잘생긴 줄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능 공자를 보니 오라버니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능 공자야말로 속세에 내려온 신선 같은 귀공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