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궐황도 (75)화 (76/301)

16676982777224.jpg 

75화 예상대로

대신들이 2황자인 선왕을 추천한 사건을 보면 4황자도 힘을 꽤나 쓴 것 같았다.

조정의 신하는 모두 황제의 신하였다. 그런데 황제의 신하 중 반수 이상이 선왕을 황태자로 정하는 것을 추천했다. 선왕에게는 내놓을 만한 성적이나 군공이 없는데 무슨 자격으로 황태자가 된다는 말인가?

그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으로 황태자가 된다는 말인가?

야홍릉은 황제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이 갔다.

4황자인 정왕의 이 수는 아주 교묘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적을 죽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섣불리 움직였다. 섣부르면 약점이 잡히는 법이다.

대황자 야천란을 이 둘과 비교한다면 대황자 쪽이 훨씬 강했다. 적어도 그에게는 참을 수 있는 인내력과 조용히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지혜가 있지 않은가?

야홍릉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능묵에게서 서신을 받아 읽어 보았다.

간단한 말 몇 마디로 궁의 최근 상황을 얘기했을 뿐, 자세한 내용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능묵이 이상하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대교습이 너에게 보낸 서신이냐?”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합니다.”

신은전을 나온 영위들은 규정의 속박을 받고 있었다.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사적으로 서신을 주고받거나 소식을 교류할 수 없었다. 들키면 죽음이었다.

능묵은 야홍릉에게 보내진 뒤로 야홍릉의 개인 영위가 되었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몰래 소식을 전해준다면 규정을 어긴 행위였다. 다른 영위들은 이렇게 할 용기도 없고, 이유도 없었다.

오직 능묵을 야홍릉에게 데려온 대교습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야홍릉이 시선을 들고 물었다.

“신은전의 대교습이 네가 글을 안다는 것을 아느냐??

그녀에게 보내지기 전까지 능묵은 글을 몰랐다. 공주부에 온 뒤로 그는 야홍릉과 한경백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야홍릉은 예전에 같은 문제를 두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글을 모르는 영위는 서신도 읽을 수 없기에 쓰기 불편할 거라고 여겨 글을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이 서신은 어떻게 된 일이지?’

능묵은 당황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잘…… 잘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주인의 말에 대답하는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안색이 변했다. 그는 다급히 덧붙였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잘 모르겠…….”

“그만.”

야홍릉은 그의 말을 자르고 시선을 다시 서신에 돌렸다.

능묵은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신은전의 다른 영위들이 글을 아는지 잘 모른다고 했었다.

신은전에서 나온 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서신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그가 전까지는 글을 모르다가 또 갑자기 알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어쩌면 대교습이 능묵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서신은 능묵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기보다 야홍릉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했다.

능묵의 현재 주인은 야홍릉이고 그는 주인 한 명에게만 충성하기 때문이었다.

서신의 내용은 아주 짧았다. 자초지종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궁의 상황을 간단한 말로 서술했다.

야홍릉이 이걸 보고도 충분히 알아보고 결정을 내릴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야홍릉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신은전의 대교습은 어떤 사람이지? 진짜 신분은 뭐지? 정말 날 몰래 도와주려는 건가? 그런데…… 어째서?’

최근 며칠 동안 야홍릉은 누군가 그녀를 도와 몰래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감진 공자와 신은전의 대교습만 봐도 그러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그녀에게 먼저 다가온 진양왕 육연지도 그러했다.

그리고……

‘그날 도화산에서 우연히 만난 그 남자도 그랬지.’

그 낯선 남자를 떠올린 야홍릉은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신은전의 대교습은 전하의 사람입니다. 그는 전하와 만나지는 않으나 전하께서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도움을 드릴 겁니다. 그가 전하께 드린 어영위는 마음 놓고 편히 사용하셔도 됩니다. 절대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귀티가 나는 남자는 어떤 사람이지?’

신은전의 대교습이 그녀에게 어영위를 보낸 일은 황제를 제외하고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황제도 능묵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자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이지?’

의아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야홍릉은 다시 태어난 뒤로 생각을 깊게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누군가 날 도와주고 있는 것은 맞아.’

그러나 그녀는 한옥금의 배신을 겪고 난 뒤로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를 돕고 있다고 해도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야홍릉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능묵의 얼굴을 보았다.

역용술을 다시 사용한 그의 얼굴은 아침에 세수하기 전과 같았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옷을 갈아입을 것이니 들어오지 말라고 하라.”

능묵이 대답했다.

“네.”

말을 마친 그는 밖으로 나갔다.

야홍릉은 뒤의 창가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힘을 주자 서신이 바로 가루가 되었다. 바람이 불자 그 가루는 공기 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옷을 입고 나가니 봉회근이 점잖은 모습으로 정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능묵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비켰다.

야홍릉은 걸어가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봉 공자.”

봉회근은 돌아서서 청색 옷을 입은 능 공자를 바라보았다. 능야는 마른 몸매를 가졌으나 귀티가 흐르고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봉회근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능 공자, 참으로 준수한 용모를 가지고 있소. 아주 눈이 부실 지경이오.”

야홍릉은 봉회근이 그녀를 보자마자 얼굴을 칭찬하자 당황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소?”

봉회근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 얘기를 더 하지 않았다.

“방금 아버지가 소식을 전해오셨는데 아침에 두 사람이 봉씨 저택에 갔다고 하오.”

그는 입가에 냉소를 띠며 말했다.

“능 공자의 예상이 맞았소.”

야홍릉이 대답했다.

“황제가 대공자를 불렀으니 또 사람을 보냈을 리 없소. 그러니 그 사람은 황제의 사람이 아니오.”

봉회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능 공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오?”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와 동맹을 맺은 사람이오.”

‘황제와 동맹을 맺은 사람이라고?’

봉회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럼 다른 나라의 사람이라는 말이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반박하지 않았다.

‘어쩐지…….’

봉회근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곧 그는 이 사건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러면…… 황제가 나한테 독을 사용한 건 날 죽일 생각이 아니라 누군가 날 구해주어서 봉씨 가문의 신임을 얻게 하려는 의도요?”

야홍릉은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니 자비를 베푼 나한테 감사해해야지.”

봉회근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바로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렇다면 난 능 공자를 의심할 수 있소. 능 공자도 기회를 틈타 봉씨 가문에 접근한 것이 아니오? 우리 가문의 재산을 노리고 말이오.”

야홍릉은 뒷짐은 진 채, 문턱을 건넜다.

그녀는 봉회근의 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이번 짓을 꾸민 것은 섭정왕을 상대하기 위함이오.”

봉회근은 그녀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와 동맹을 맺은 사람은 봉씨 가문의 재산을 노린 것이고.”

동제는 국고가 부유하기에 섭정왕을 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재산을 노리고 봉씨 가문에 해코지할 리 없었다.

그와 동맹을 맺은 사람은 이 중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기에 모험을 무릅썼을 것이다.

그 이익은 바로 봉씨 가문일 것이고.

그러니 그 사람은 국고를 가지고 있는 어느 한 나라의 황제일 리는 없었다.

일반적인 상인 가문은 동제의 황제와 동맹을 맺을 자격이 없었고 강호인일 가능성도 낮았다. 황제와 동맹을 맺을 사람이면 봉씨 가문의 재산이 필요한 동시에 동제의 황제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고 보면 이 조건에 대응하는 범위가 확 줄어들게 되고 대략적인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봉회근은 머릿속으로 가장 먼저 남제를 배제했다. 동제와 남제는 예전에 강한 대국에서 나뉜 두 나라로 서로의 대립각에 서 있었다. 그들은 절대 서로 엮일 리 없었다. 남제는 약간의 기회만 있어도 동제를 멸하고 다시 통일된 나라로 만들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제는 병력과 경제 실력이 동제에 뒤떨어져서 마음만 굴뚝같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영린이 아무리 멍청해도 남제의 황자와 동맹을 맺을 리 없었다. 물론 남제에서도 영린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황자가 없었다.

‘반대로 금국은…….’

봉회근이 가장 의심하는 것이 바로 금국의 사람들이었다.

금국 사람들은 야만적이고 병사들은 난폭하며 야심이 넘쳤다. 그래서 툭하면 전쟁을 일으키고 목국의 방어선을 무너뜨려 목국의 부유한 성곽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국의 병사들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년 전에 목국에서는 호국 공주 야홍릉이 병사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던가.

호국 공주가 전쟁터에 나선 뒤부터 삼 년간 연이어 금국은 호되게 당하기만 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한동안 휴식기를 가진 뒤에 또다시 전쟁을 발동했다. 지금은 병사의 급료나 지급품도 주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목국의 호국 공주는…….’

봉회근은 야홍릉이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여인의 몸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금국을 여러 번이나 물리쳤기 때문이었다. 목국에서 이름난 사내들, 심지어 다른 나라의 장군들까지 합해도 호국 공주에 견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올해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전쟁터에는 3황자가 나갔지. 아쉽게 되었네. 호국 공주가 불패의 신화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겠는지 모르겠군.’

“능 공자, 전설로 소문난 목국의 호국 공주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소?”

봉회근이 물었다. 호국 공주가 떠오르자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열예닐곱 살 되는 어린 나이에 대단한 무공 실력을 가졌다고 하오. 병법이나 책략을 세우는 데도 대단하고. 금국과 대항한 삼 년간 호국 공주가 금국의 강한 병력을 큰 폭으로 약하게 만들지 않았소? 그러나 올해에는 무슨 영문인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다른 황자가 대신 나갔다더군.”

야홍릉은 의자에 앉았다. 행아가 차를 타서 들고 들어오더니 봉회근과 야홍릉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그리고 다시 공손하게 물러갔다.

“들어 본 적 있소.”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하고 찻잔을 들어 가볍게 마셨다.

“외부에서 크게 부풀렸을 뿐이오.”

“과장이라는 말이오?”

봉회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건 절대 과장이 아니오. 호국 공주는 대단한 영웅이오. 전쟁터에서 보여준 실력은 거품일 리가 없소. 봉씨 가문의 사업에 세상에 널리 퍼져 있어 나도 금국에 가본 적이 있소. 그래서 금국의 병사들에 대해 약간은 안다오. 그들은 아주 야만적이고 난폭하오. 그런데 야홍릉은 그런 야만인들이 겁을 먹고 도망치게 만들었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