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꿍꿍이
누각 내부는 넓고 화려했고, 가구도 좋은 것만 사용한 티가 났다.
수묵화가 새겨진 홍목 병풍은 침실을 둘로 나누고 있었고 벽에는 유명한 그림 몇 점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구석의 탁자에 놓인 꽃병에는 시녀가 꺾어온 생화가 들어 있었고 기다란 책상 위에서는 향로에서 풍기는 향내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방안은 아주 조용하고 예뻤다.
야홍릉은 훑어보던 것을 멈추고 말없이 창가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러자 탁 트인 시야와 함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바람에 물보라를 이는 맑은 호수가 보였다.
능묵은 짐을 안방에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이때, 시녀가 깨끗한 물을 떠 왔다.
야홍릉은 씻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시녀는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그녀는 말없이 음식과 차를 탁자 위에 놓은 뒤,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야홍릉은 능묵과 함께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아침 식사는 아주 풍성했다. 포자(包子), 증교(蒸餃), 훈툰(餛飩), 쌀죽…….
포자와 증교는 속을 야채와 고기소로 나뉘어 모두 가짓수가 두세 가지나 되었다.
둘이서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지만 자유롭게 좋아하는 맛을 골라 먹을 수 있었다.
“다 먹었으면 세수를 하거라.”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얼굴을 씻고 온천수에 몸을 담그거라. 다른 사람이 네 진짜 얼굴을 보지 않도록 조심하고.”
‘몸을 담그라고?’
능묵은 당황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뭐라고 하고 싶었으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꾹 삼키고 한 글자만 말했다.
“……네.”
주인의 말이 곧 명령이었다. 그것이 영위의 규정을 어긴 것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주인의 말이 그 어떤 규정보다도 중요하기에 거역할 수 없었다.
그들은 조용한 아침 식사를 마쳤다.
아침을 먹고 난 뒤, 야홍릉은 창가 앞의 탑에 기대앉았다.
능묵은 그녀에게 차를 따르고 세수하러 갔다.
그는 대야에 물을 받은 뒤, 품에서 파란색 약병을 꺼냈다. 그리고 약병의 뚜껑을 열고 액체 두어 방울을 대야에 떨어뜨린 뒤, 다시 약병을 품에 넣었다.
그는 머리를 높게 묶고 허리를 숙이고서 물을 조심스럽게 얼굴에 끼얹었다.
그리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이마, 눈썹, 코, 볼, 귀뿌리까지 꼼꼼하게 문지르며 씻었다. 곧 그의 얼굴에 맺힌 물방울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먹물보다는 조금 옅은 색의 검은 액체가 턱을 따라 대야로 떨어졌다.
얼굴을 꼼꼼하게 문지른 능묵은 다시 물을 얼굴에 끼얹으며 헹구었다.
야홍릉은 옆에 앉아 찻잔을 들고 턱을 괸 채,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역용술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곧 능묵은 익숙한 솜씨로 얼굴을 다 씻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꼼꼼하게 닦았다. 그러자 이목구비가 뚜렷한, 잘생긴 얼굴로 돌아왔다.
일곱 날이 넘게 용모를 바꾸는 약물로 얼굴을 덮고 있어 그런지 능묵의 안색은 평소보다 더 하얗게 된 듯했다. 입고 있는 검은색 장포가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면 귀공자의 느낌도 들었을 것 같았다.
능묵은 세수를 마친 뒤, 돌아서서 야홍릉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을 보고 눈을 내리깔고서 입을 열었다.
“주인님.”
야홍릉은 대답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가서 몸을 담그거라.”
“네.”
능묵은 안방으로 가서 갈아입을 옷을 가진 뒤, 뒤의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뒤의 창문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대나무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와 숲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능묵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창문을 뛰어넘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대나무숲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야홍릉은 홀로 창가에 기대앉아 차를 마셨다.
창밖에서 비춰 들어온 아침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자 차갑기만 하던 얼굴에 약간의 온기가 흘렀다.
“능 공자.”
시녀가 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제가 들어가서 정리를 좀 해도 될까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거라.”
행아와 하월은 들어와 탁자를 깔끔하게 치웠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물러가며 방문을 잠갔다.
야홍릉은 차를 마신 뒤, 찻잔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능묵이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훤칠한 소년이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얀색 침의를 입은 그는 깡마른 몸에 비해 얼굴은 매우 준수하고 잘생겼다.
능묵은 고개를 숙이고 새하얀 목을 드러낸 채, 곧게 서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짙은 눈썹을 보니 불안한 듯했다.
야홍릉은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뒤,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는 것이냐?”
능묵은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영문을 몰라 막막한 표정이었다.
야홍릉은 자신이 괜한 오해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위의 생활 습관은 일반인과 아주 달랐다. 신분이 특수하고 완성해야 하는 임무도 특별하기에 평생 일반인처럼 욕조에서 목욕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밤에 잠자기 전에 목욕한다고 해도 바로 검은색 경장으로 갈아입고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위험에 대처해야 했다.
영위는 하루 열두 시진 동안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옅게 잠을 잘 때도 경계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야홍릉이 그더러 목욕하고 사람들 앞에 나설 필요가 없으니 푹 쉬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으나 그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위의 신분에 맞지 않는 대우에 그는 불안했다.
게다가 귀공자처럼 잘생긴 얼굴까지 더해지자…
야홍릉은 그가 자신을 유혹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충성심이 강해 자신의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는 영위가, 뼛속 깊이까지 무뚝뚝함으로 가득 찬 그가 어찌 주인의 앞에서 이런 유혹술을 펼치겠는가?
야홍릉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가서 쉬거라.”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탑에 누워서.”
능묵은 공손히 대답한 뒤, 안방의 탑에 누웠다.
연탑은 침대보다 작았지만 한 사람이 자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무인은 잠을 자는 곳에 대해 까탈스럽게 굴지 않았다. 매일 생식하고 밤이면 대들보나 나무 위에 웅크리고 자는 것보다 지금처럼 먹고 자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호화로운 나날이었다.
능묵은 저도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이러다 내가 폐인이 되는 게 아닐까?’
어렵게 살다가 호화롭게 지내는 것은 쉬우나 그 반대는 힘들었다.
무공의 경지가 퇴화하지는 않겠지만 다시 밖에서 자고 생식을 하며 귀신처럼 숨어 사는 나날로 돌아갔을 때, 그는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적응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야홍릉은 잠자코 앉아 있다가 목욕하러 떠났다.
대나무숲에 숨겨진 온천수는 흐르는 물이라 깨끗했다.
야홍릉 같은 고수는 주변에서 바람만 불어도 민감하게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나무숲에 들어간 뒤, 능묵도 조용히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대나무숲 밖에 숨어서 야홍릉의 안전을 지키고 있었다.
야홍릉은 옷을 벗은 뒤,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에 기댔다.
따뜻한 물에 몸에 닿자 모공이 확 열리며 그동안 쌓인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야홍릉은 한쪽에 기대앉아 따뜻한 느낌을 즐겼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비춰 들어오자 온천수가 반짝반짝 빛났다. 야홍릉은 그 빛을 잡으려고 물을 떴으나 손가락 사이로 다 흘러가고 말았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답지 않게 애처럼 군 것을 비웃는 듯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목욕을 마친 야홍릉은 침의로 갈아입고 방으로 쉬러 들어갔다.
방안에는 그녀와 능묵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탑에서 자고 있었다. 둘은 모두 하얀 옷을 입은 채로 한 방에 누워 고요함을 만끽했다.
* * *
저녁 무렵, 야홍릉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깼다.
침대에서 일어나 보니 능묵이 어느새 검은색 장포로 갈아입은 뒤였다. 여전히 날카롭고 차가운 모습이었다.
창가의 앞에 서 있는 그의 팔뚝에는 온몸에 윤기 나는 검은색 털로 뒤덮인 독수리가 있었다. 능묵은 독수리의 발에서 신통(信筒)을 꺼낸 뒤, 손을 털었다. 독수리는 푸드덕거리며 날아가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능묵은 말없이 신통을 열고 편지를 꺼냈다.
한참 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야홍릉은 조용히 침대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묵은 바로 돌아섰다. 그는 야홍릉이 깨어난 것을 보자 표정이 굳더니 침대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야홍릉이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또 눈을 감았다. 잠이 덜 깬 모습이었다.
“신은전에서 온 소식이냐?”
“그러합니다.”
능묵은 서신을 야홍릉에게 건네주었으나 주인이 눈을 감고 침대 머리에 기댄 것을 보고 서신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조정에 바람이 불어 대신들은 폐하께 황태자를 정하자고 했답니다. 과반수가 선왕을 추천했고요. 전하가 떠난 뒤, 선왕이 몰래 많은 일을 한 듯합니다만, 황태자가 될 정도로 세운 공은 없습니다. 이번 일은 좀 이상합니다.”
‘선왕? 2황자 야모침?’
야홍릉은 눈을 뜨고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선왕은 황제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니야. 속을 감출 수 없으니 남의 무기로 이용될 뿐이지.”
지금의 황자들은 모두 꽤나 능력이 있고 야심도 넘쳤다. 그러나 3황자 야소숙의 배경이 가장 월등한 것을 제외하고 대황자 야천란이 가장 똑똑하고 생각이 깊었다.
그는 모든 정력을 정사에만 쏟아붓고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3황자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전쟁터에 갈 때나 한씨 가문에 일이 생길 때나 그는 다른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그와는 상관없는 일인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야소숙이 전쟁터에 나갔고 한씨 가문이 세력을 잃었으며 심씨 가문이 유배된 지금이야말로 남은 황자들이 권력 다툼을 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른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야소숙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경으로 돌아온다면 군공을 빌미로 황후와 한씨 가문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야홍릉은 눈을 감고도 그들의 꿍꿍이와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