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궐황도 (72)화 (73/301)

16676982664786.jpg 

72화 속을 알 수 없구먼

춘란은 시녀와 함께 화로와 솥을 정리했다.

야홍릉이 일어서자 옆에서 누군가 차를 건네주었다. 야홍릉은 찻잔을 받아 들고 가볍게 마셨다.

능묵은 시선을 내리깐 채,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봉회근은 능묵을 힐끗 보고 생각에 잠겼다.

‘이 소년……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주인과 마찬가지로. 주인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지. 둘 다 다가가기 쉽지 않아.’

그러나 능묵이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능 공자가 능묵에 대한 믿음은 둘의 언행에서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약을 다 먹은 봉회근은 야홍릉을 자시의 서재로 초대했다.

앞으로의 협력에 대해 상세한 계획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능묵은 바로 뒤따랐다.

* * *

점심식사를 마친 뒤, 호 집사가 걸어와 보고했다.

“큰 도련님, 구 공자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봉회근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라고 하더냐?”

“구 공자께서 구 대인의 몸이 좋지 않으니 능 공자에게 진료를 맡기고 싶다고 하십니다.”

봉회근은 침묵했다.

“구 대인이 불치병이라도 걸린 것이냐?”

봉여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위성에 의원이 그렇게 많은데 왜 하필 능 공자를 부른다는 말이냐?”

호 집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가서 능 공자는 시간이 없다고 이르거라.”

봉회근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또 와도 보고하지 말거라. 봉씨 가문에서는 그를 반기지 않는다고 하여라.”

호 집사가 망설이며 말했다.

“도련님, 그렇게 하는 건 좀 경우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 분은 구 대인의…….”

“내가 말한 대로 하여라.”

봉회근은 찻잔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호 집사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지금 바로 전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호 집사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 하겠습니다.”

봉여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형님이 쓰러져 계신 동안 호 집사가 둘째 형님과 아주 가깝게 지내며 둘째 형님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둘째 형님이 사적으로 구굉에게 령이와의 혼인을 허락할 수 있도록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했답니다.”

“령이와의 혼인을 말이야? 봉청서가 그럴 능력이 있다고?”

봉회근이 냉소를 하였다.

그는 봉청서가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잘 알고 있었다.

‘구씨 가문에게 잘 보여서 봉씨 가문에서 큰 이득을 따내려고 하는 모양인가. 심지어 가주의 자리도 노리는 거 아냐? 우습군.’

“이번 일로 그 녀석은 내가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을 테니, 적잖이 실망했겠지.”

봉회근은 차를 마시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봉청서가 가주에 오를 일은 없을 거다.”

야홍릉은 의자에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봉씨 저택에 온 날부터 봉청서의 속셈을 눈치챘다. 그러나 봉씨 가문의 일은 그녀와 상관이 없기에 봉씨 가문 내부의 암투에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할 일은 봉회근을 치료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봉씨 가문에 온 첫날, 봉청서가 점심 식사에 독을 타서 날 떠보려고 했지.”

야홍릉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독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돌아갔소. 그날 저녁에 자객이 여러 명이나 찾아왔으니, 그 자객도 그가 꾸민 일일 수도 있겠군.”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집안 문제를 해결해야 전력으로 외부의 적을 칠 수 있을 거요. 안 그러면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누가 알겠소?”

그 말을 들은 봉회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러난 적을 상대하는 게 편하지만 어두운 곳에 숨겨진 적을 치는 게 우선이었다.

뒤통수를 맞는다면 원기가 크게 상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야홍릉은 봉회근에게 남은 마지막 독을 처리했다.

다음날 아침.

야홍릉이 반 시진을 들여 달인 약을 마신 봉회근은 몸이 한결 나아진 느낌을 받았다.

점심 식사를 할 때, 봉형이 돌아왔다. 급히 돌아왔는지 온몸에 먼지가 가득했다.

봉청서도 그와 함께 돌아왔다. 봉회근이 멀쩡한 모습으로 능야와 함께 금란원의 서쪽 별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가 바로 싱긋 웃으며 말했다.

“형님, 깨셨습니까?”

그리고 능야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능 공자가 허풍을 떤 게 아니었군. 참 대단한 의술을 가졌소.”

야홍릉은 싸늘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봉청서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봉청서는 표정이 굳은 얼굴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아버지, 사업얘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잘 끝났습니까?”

봉회근이 봉형을 보며 물었다.

“그럼.”

봉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봉회근의 안색을 살폈다.

“얘야, 지금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느냐?”

“없습니다.”

봉회근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야홍릉과 함께 서재로 가서 이야기하자는 손짓을 했다.

“능 공자가 직접 달인 약을 세 첩 먹고 나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중독되기 전보다 기력이 조금 달리긴 하나, 다른 문제는 없는 듯합니다.”

그 말을 들은 봉형은 안심하며 말했다.

“그럼 잘됐구나. 며칠간은 푹 쉬거라. 주방에 맛 좋은 음식을 해서 네 기력을 보충하라고 일러두마.”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오기 전에 집에 한 번 들렀더니 네 어미가 네 상황을 묻더구나. 네가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던지. 오겠다고 하는 걸 내가 막았어.”

봉회근이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 드렸네요. 그런데 이곳이 위험하니 오시지 않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봉형은 고개를 돌려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걸음을 멈추고 야홍릉에게 공수하며 말했다.

“능 공자 덕에 회근이가 깨어났네. 아무리 거래라고 해도 진심으로 감사하네.”

봉씨 가문에서 적자는 봉회근 한 명이었지만 봉회근은 경영과 관리에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인 사람이기도 했다.

차기 가주로 될 사람이기에 절대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되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니,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혀 불난 집에서 도둑질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봉형은 능야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수십 년간의 인생에서 능야처럼 성미가 이상한 사람을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불난 집에서 도둑질하는데도 얄밉기는커녕 결국에는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아버지 잘 오셨습니다. 능 공자가 오늘 밤에 위성을 떠나야 한다고 합니다. 주방에 지시하여 점심에 음식을 많이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봉회근이 말했다.

“첫 번째로는 아버지를 맞이하기 위해서이고 두 번째로는 능 공자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날 맞이한다고? 집을 나선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럴 거야 있느냐? 능 공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라면 후하게 대접해야지.”

봉청서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는 말없이 셋의 뒤에 서서 능야의 뒷모습을 음산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 깊은 곳에는 커다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듯했다.

잠시 뒤, 그는 시선을 돌려 야홍릉의 뒤에 서 있는 능묵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얼굴의 수행 하인은 그의 주인을 꼭 닮은 사람이었다.

온몸에 한기가 드리워진 것처럼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봉씨 가문의 이공자가 그를 보고 있어도 그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무시했다.

심지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곧 그들은 서재 앞에 도착했다. 봉회근은 봉형과 능 공자를 안으로 들여보내고는 고개를 돌려 봉청서를 바라보았다.

“너도 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얼른 돌아가 쉬거라.”

봉청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한 것인데 힘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봉회근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재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봉청서와 능묵 모두 문밖에 남게 되었다.

말없이 꾹 닫힌 방문을 바라보는 봉청서는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그는 음산한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치미는 울분을 꾹 참았다.

‘적자는 귀하고 서자는 천하니, 서자는 서재도 들어갈 수 없다는 거야?’

그는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그는 고개를 돌려 훤칠한 몸매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능묵 시위.”

능묵은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능 공자와 함께 봉씨 가문을 떠나는 건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고?”

봉청서가 물었다.

그러나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봉청서는 소매에서 고풍스러운 느낌이 풍기는 비수를 꺼내며 말했다.

“능묵 시위는 실력이 좀 있지? 이 비수는 내가 우연히 손에 넣은 것이네. 철도 쉽게 자를 수 있기에 가격이 꽤 나가는 물건이지. 내 성의이니 받으시게.”

능묵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주인을 보호해야 하니 몸에 좋은 무기를 지니고 다녀야지…….”

능묵이 고개를 돌리고 싸늘하게 말했다.

“꺼져.”

봉청서는 당황했다가 어두운 눈빛으로 물었다.

“뭐라고?”

능묵은 시선을 돌리고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봉청서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비수를 꺼내 능묵의 목을 찌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심호흡하며 화를 억눌렀다.

“능 시위의 성격에 깜짝 놀라버렸군.”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왔으면서 손님의 예의를 전혀 지키지 않고, 안하무인에 잘난 척하기까지 하다니. 참으로 대단해.”

말을 마친 그는 냉소하며 자리를 떴다.

능묵은 말없이 서재 밖에 서 있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야홍릉은 서재에서 봉씨 부자와 협력 사안에 대해 의논했다.

그녀는 제경에 갔다가 돌아온 뒤, 봉회근과 함께 봉씨 가문의 마장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획에는 변수가 생기는 법이다.

갑작스러운 성지가 그녀의 원래 계획을 망가뜨렸다.

아들이 무사히 깨어나서 안도했던 봉형도 다시 안색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황제 영린이 회근이더러 궁에 들어오라고 하셨네.”

봉형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황제의 첩자가 곳곳에 있나 보군. 회근이가 깨어나자마자 소식을 듣고 회근이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것을 보면.”

“영린이 정사를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섭정왕에게 성지를 먼저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야홍릉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섭정왕의 허락 없이 성지가 어떻게 제경을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봉씨 부자는 침묵을 지켰다.

그 말이 맞았다. 영린이 직접 정사를 볼 수 없기에 그의 지시는 반드시 섭정왕 영위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면 섭정왕이 이 일을 알고 허락을 했다는 말인가?”

“이렇게 되었으니 회근이는 능 공자와 함께 제경에 들어가는 게 좋겠네. 성지를 어길 수는 없지 않나? 마침 능 공자도 제경에 볼일이 있다고 했으니… 능 공자가 있다면 나도 안심이 될 듯하네.”

봉형은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