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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70)화 (7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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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평생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서신을 보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감진의 조사 결과를 보는 야홍릉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야홍릉은 능묵이 돌아온 것을 보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저 책상에 종이와 붓이 있다. 방금 네가 본 서신의 내용을 한 자도 빠짐없이 써서 가져오너라.”

능묵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글을 쓰러 갔다.

야홍릉은 조용하게 침대에 앉아 감진의 신분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몰래 내 뒤를 쫓고 있는 사람을 방해한다고? 우연일까? 아니면 정말로 날 도와주고 있는 것일까? 만약 정말 날 돕는 거라면 이유는 무엇이지? 그가 충성을 바치는 사람은 누구지? 부황일까?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그리고 단씨 형제와 그들의 양아버지 단리는 또 누구고? 게다가 사 년 전이면…….’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색에 빠졌다.

사 년 전이라면 그녀는 열세 살로, 사랑에 대해 전혀 모를 때였다.

열두 살 전까지 그녀는 궁에서 살았다. 오전에는 글을 익고 오후에는 무공을 배웠다. 그녀는 다른 일은 다 제쳐둔 채, 무공을 연마하고 병법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열두 살 뒤로는 대군을 따라 전쟁터에 갔고 열네 살에는 한옥금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정식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터로 간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자주 궁으로 들어와 문안 인사를 올리던 한옥금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 문무백관 가문의 귀공자에게도 관심이 없었는데 기방의 소관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열네 살 뒤로는 시간 대부분을 변방의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때 제경을 뒤흔든 일에 대해서는 일부는 듣지 못했고 또 일부는 관심이 없어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탓에 그녀는 제경의 일을 거의 알지 못했다.

이십일 년 만에 끝난 전생에서도 감진과 단씨 형제가 나타난 적은 없었다.

물론, 전생에는 능묵도 없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표정이 어두워졌다.

“주인님.”

능묵이 앞으로 걸어와 다 쓴 종이를 바쳤다.

야홍릉은 서신을 받아 들고 아무 말 없이 종이 위의 글씨체를 바라보았다.

틀린 글자가 하나도 없는 것은 물론, 글씨체가 전처럼 어색하고 딱딱하지 않았다.

지금의 글씨체는 날카롭고 기운이 넘치며 또 뭔가를 숨기는 듯한 느낌도 풍기고 있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전에 공주부에서 손바닥을 때려 가며 글을 가르치던 모습이 눈에 훤했다.

한경백은 능묵이 글을 익힐 재주가 없다고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 글을 하나도 모르던 소년이 보기만 한 서신의 내용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외워 쓴 것이다.

틀린 글자가 없는 것은 물론, 글씨체가 힘 있고 예쁘기까지 했다.

‘이걸 두고 어찌 아둔하다고 할 수 있겠어?’

이런 수준을 아둔하다고 한다면 오랫동안 공부한 선비들 중에서도 아둔하지 않은 자가 없을 것이다.

오래 지속된 침묵에 능묵은 불안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침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전 평생 주인님께만 충성하기를 맹세합니다. 이번 생에 주인님의 명령만 따르며 주인님을 위해서만 움직일 겁니다. 만약 제가 잘못을 저질러 주인님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계편으로 벌하여 주십시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서는 여전히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만약, 만약 이런 이상한 일이 자꾸 일어나는 게 제가 기억을 잃어버린 기억과 연관이 된다면…….”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손으로 바지를 만지작거렸다.

“전 기억을 영원히 되찾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야홍릉의 속생각을 읽은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주인님, 제 기억을 되찾는 방법을 찾아보지 않으면…… 안됩니까?”

야홍릉은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든 종이를 조금씩 찢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네 진짜 신분이 아주 고귀하다면, 영위와 비교했을 때 하늘과 땅 차이라면, 기억을 회복한 뒤의 너는 높은 사람이고 산해진미를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다른 사람의 생사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전 주인님만 따르겠습니다.”

능묵은 야홍릉이 말을 마치기 전에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전 평생 주인님의 옆에서 주인님만 따르겠습니다.”

“왜?”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없어. 아무리 신은전의 규칙이 그렇다고 해도 그걸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고?’

능묵은 침묵을 지켰다. 그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내관이 널 다른 사람에게 보냈더라면 이렇게 충성을 다했을 거냐?”

능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능묵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저는 주인님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날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야홍릉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능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거센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듯했다.

“대교습이 저를 이렇게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전 주인님께만 충성을 다하고 평생의 숙명이 주인님을 위해 살고, 주인님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능묵의 목소리에는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야홍릉을 위해 인생을 바치는 것이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전 주인님을 위해 태어났고 주인님을 위해 죽을 겁니다. 절대 두 번째 주인을 모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야홍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요즘 많은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능묵이 정말 그녀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라면 이 배후의 사람이 그녀를 도와주는 것인지,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인지를 차치해도 왜 전생에서 능묵이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다는 말인가?

다시 인생을 살게 된 그녀는 많은 일을 제멋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조종할 수 없는 일들도 벌어졌다.

그중 유독 능묵이 그녀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짧은 며칠 동안, 그에게서는 수많은 이상한 점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 능묵은 그녀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능묵은 그녀가 의심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한 야홍릉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문질렀다.

“난 이미 속임과 배신을 한 번 당한 적이 있어 두 번은 다시 겪고 싶지 않구나.”

그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으나 소름끼치는 한기를 담고 있었다.

“능묵, 너한테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든, 난 당분간 널 믿기로 했다. 그러나 난 상대방이 날 조금이라도 속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앞으로 너에게서 날 속이는 기미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절대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능묵은 긴장을 풀며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온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주인님을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온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야홍릉은 능묵이 자신을 배신하거나 나쁜 마음으로 접근한 게 아닌 이상 끝까지 옆에 남겨둘 생각이었다. 그러니 온몸이 부서지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쉬러 가거라.”

“네.”

능묵은 물러나 밖으로 걸어갔다.

방안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야홍릉은 침대 머리에 기댄 채, 말없이 몇 달 안에 벌어진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방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능묵은 안방 밖의 탑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는 야밤의 고요함과 둘이 한 방을 사용한다는 안전감을 즐기고 있었다.

방안에서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불빛에 비친 여인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침대 머리에 기대어 있었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막막한 기분에 잠겨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능묵은 시선을 들고 안방의 방향을 보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야홍릉은 손을 들어 불을 껐다.

방안은 어둠에 잠겼다. 안방에서 야홍릉이 눕는 소리가 들렸다.

능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밤이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야홍릉은 일어나서 시녀더러 약을 달일 준비를 하라고 했다.

어젯밤에 봉형과 봉청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봉회근은 의식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의 기력도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 봉씨 가문의 집사들은 그의 몸이 아직 허약한 점을 감안해 휴식을 방해하지 않았다.

커다란 봉씨 저택은 전보다 훨씬 조용해졌다.

“능 공자, 이렇게 이른 시간에 약을 달이시게요?”

봉령이 치맛자락을 들고 화랑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소매가 너른 파란색 치마는 걸을 때마다 하늘거려 그녀를 선녀처럼 비춰 주었다.

“큰 오라버니는 깨셨어요?”

야홍릉은 약을 달이며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모르오.”

봉령은 혀를 홀랑 내밀고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기는 하네요. 능 공자가 큰 오라버니의 시녀도 아니고, 머슴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녀는 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턱을 괴었다.

“능 공자는 귀티가 흘러 약을 달이고 계셔도 아주 멋지세요.”

야홍릉은 시선을 들어 그녀를 힐끗 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화로에 부채질을 했다.

봉령은 평소와 달리 말을 재잘재잘 늘어놓았다.

“능 공자, 정말 집에 첩실이 여섯 명이나 돼요?”

둘 사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자 봉령은 더 이상 쑥스러워하거나 얌전을 떨지 않았다.

그녀는 능 공자에게 친구처럼 여유롭게 말을 건넸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능 공자는 아직 어려 보이는데요.”

봉령이 그를 훑어보며 말했다.

“대갓집의 공자는 모두 첩실을 그렇게 일찍 들이는 건가요? 그런데 제 오빠들은 아직 혼인도 하지 않고 첩실도 들이지 않았어요.”

야홍릉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에 따라 다르오.”

“능 공자의 첩실은 예쁘게 생겼어요?”

봉령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야홍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궁금한 게 참 많은 소녀였다.

“공자도 스무 살이 되어 보이지 않는데 첩실 여섯 명은 다 몇 살이에요? 설마 능 공자보다 더 어린 건 아니죠? 그렇다면 저와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겠네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봉령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봉회근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집도 안 간 처자가 왜 남의 사생활은 묻는 거야?”

봉령은 고개를 돌리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궁금해서 그런 거잖아요.”

“궁금해도 그런 걸 물으면 안 되지.”

봉회근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는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봉회근은 말을 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화로에 그렇게 바짝 붙어 있으면 어떡해? 안 더워?”

능 공자는 무공을 연마한 사람이라 이 정도 열기는 쉽게 감당할 수 있었지만 어린 소녀인 봉령은 아니었다.

봉령은 흰색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침이라 그런지 시원해요. 아직 해도 뜨기 전이고요.”

그녀는 능 공자와 얘기를 나누려고 가까이 다가간 것이었다.

그러나 능 공자는 말수가 적어 그녀의 말에 대답도 잘 하지 않았다.

봉령은 좌절감을 느꼈다.

그녀는 능 공자의 첩실 여섯 명에 관심이 많았다.

봉회근은 느긋하게 걸어왔다. 하룻밤 푹 쉰 그는 어제보다 안색이 좋아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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