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의식이 깨어나다
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능 공자, 곧 떠나실 건가요?”
봉령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야홍릉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틀 뒤에 여기를 떠날 것이오.”
봉령은 실망한 얼굴로 ‘네’라고 했다.
그녀는 능 공자가 큰 오라버니를 치료하러 온 것이고 큰 오라버니가 나았으니 능 공자가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봉회근은 몸이 안 좋아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
“여희야, 령이를 데려다주고 내 방으로 왔다 가거라.”
봉여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봉령과 함께 자리를 떴다.
최근에 금란원을 지키고 있는 호원이 많아졌다. 봉형이 몇몇 고수를 데리고 간 것을 제외하고 봉씨 가문에서 실력이 있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금란원으로 보내졌다.
야홍릉이 묵는 서쪽 별실은 봉회근의 방과 아주 가깝기에 능묵더러 특별히 가서 지키라고 하지 않았다.
춘란이 시녀 몇 명과 함께 따뜻한 물을 욕조에 채워 넣었다.
그리고 깨끗한 수건과 향료를 옆에 둔 뒤 밖에 나갔다.
시녀들은 먼저 나서서 능 공자의 목욕 시중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능 공자가 사내이기에 시녀들이 시중을 드는 게 불편했다.
두 번째 이유는 차가운 성미의 능 공자가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이유는 능 공자의 옆에 측근 하인이 있어 그녀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녀들은 물을 욕조에 채워 넣은 뒤, 눈치 빠르게 물러났다.
오직 능 공자와 그의 수행 하인만 방에 남았다.
잠시 뒤.
야홍릉은 일어서서 병풍 뒤로 걸어갔다. 그녀는 웃옷과 하얀색 속옷을 벗었다. 가슴을 감싼 천을 풀자 여인의 날씬한 몸매가 드러났다.
새하얀 피부는 잡티 한 점 없이 완벽했다. 그녀는 욕조에 기대앉아서 가슴까지 올라온 따뜻한 물의 느낌을 느꼈다. 따뜻한 열기가 차가운 그녀를 부드럽게 감쌌다.
능묵은 조용히 병풍 밖을 지키고 있었다. 야홍릉의 지시가 없이는 그는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풍 뒤에서 여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화장대의 비밀 서신을 열어 보아라.”
‘비밀 서신?’
능묵은 공손하게 대답한 뒤, 화장대 앞으로 걸어가 그 위에 놓인 서신을 펼쳐 보았다.
“빙란각의 감진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이 질문은 제경의 공주부에서 야홍릉이 한 번 물은 적이 있었다.
그날 황제는 남자 여섯 명을 보내왔고 야홍릉은 결국 다섯 명을 남겼다.
그녀는 능묵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오늘 들어온 여섯 명 중에서 몇 명이나 아느냐?”
능묵은 한 명도 알지 못했다.
그때 능묵은 당황한 나머지 조심스럽게 사죄하며 이런 말까지 했었다.
“제가 지금 바로 그들의 조상까지 싹 훑어보겠습니다.”
야홍릉은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정말로 한 명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면 쌍둥이 형제가 능묵을 보는 시선도 이상했다.
그들은 분명 그를 알고 있으나 능묵은 기억을 잃었기에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해독단을 먹은 뒤로 그는 예전의 일을 잘 떠올리지 못했지만 기억 깊은 곳에 숨겨둔 의식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동제 황제 영린과 섭정왕 영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그랬다.
그는 남제의 황제에 아들이 여섯 명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백옥호접고와 그 특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것 외에 바둑을 둘 줄도 알았고 심지어 실력도 아주 뛰어났다.
위성으로 와서 해독단을 먹기 전까지 그는 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신은전의 영위는 신은전을 나서기 전까지 황족과 조정에 대한 정보를 받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능묵은 야홍릉보다 아는 게 적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잠재의식 속에 숨어진 것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그 기억을 숨겨두었을 뿐이었다.
해독단을 먹은 뒤로 능묵의 의식은 묶여 있던 데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예전에 독을 먹고 기억을 잃은 게 분명했다.
그래서 해독단이 효과를 보아 오랫동안 잠재우고 있던 의식을 깨운 것이었다.
그가 신은전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기억을 되찾을 방법도 찾지 못했다.
방안에 정적이 잠깐 흘렀다. 그리고 곧 소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감진은 빙란각의 사장이고 가지고 있는 세력도 아주 큽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 없이 욕조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는 열네 살부터 손님을 받았으며 칼끝에서 추는 수수무(水袖舞)로 제경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빙란각 사장 자리도 이어받았고, 그렇게 그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빙란각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열네 살에?’
야홍릉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영일이 알아본 것과 능묵이 아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능묵은 잠깐 말을 멈추고 서신의 글씨를 보더니 말했다.
“이 서신에 담긴 내용은 감진에 대한 조사 결과입니다. 위에서 제경의 수많은 귀족이 입에 담을 수 없는 취향을 가지고 있고 감진 공자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감진 공자가 열네 살에 제경을 뒤흔든 뒤, 빙란각은 귀족들이 가장 자주 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사 년 전, 음력 섣달, 즉 감진 공자가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낸 해의 겨울에 한 사람이 만 냥의 가격을 내서 감진 공자더러 칼끝에서 수수무를 한 번 더 추라고 했답니다. 감진 공자는 춥다고 거절했지만 그 손님이 기어코 추라고 난리를 피웠고요. 그러다 그날 밤에 자신의 저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듬해 삼월, 한 지방 관리가 제경에 업무를 보고하러 왔다가 초대를 받고 빙란각을 갔답니다. 그러다 감진 공자를 보고 첫눈에 반했고요. 그는 감진 공자를 일반적인 소관으로 여기고 억지로 술 시중을 들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다 빙란각에서 쫓겨났고 결국 제경을 떠나는 길에 암살당해 죽었습니다.”
두 사건 모두 제경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죽은 사람이 관리였기 때문에 황제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가 아무리 알아보아도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빙란각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증거를 찾지 못해 어영부영 넘어가고 말았다.
그 뒤에도 자신의 권세를 믿고 감진에게 무례를 범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감진은 아주 쉽게 갈등을 풀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함부로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감진 공자가 열네 살에서 열다섯 살 되던 이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의 정확한 신분을 알아낸 사람은 없다고 쓰여 있습니다.”
능묵은 서신을 접고 시선을 병풍에 돌렸다.
“제 생각에는 감진 공자의 배후 세력이 아주 강한 것 같습니다. 주인님께서 감진 공자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의심하냐고?’
야홍릉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감진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오늘 밤.
영일이 감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면 야홍릉은 그를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저택에 들어온 다른 측부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영일이 감진에게서 이상한 행동을 보았다고 하고 그의 신분도 신비하니 좀 알아보려고 한 것이었다.
빙란각에 대해서는…….
야홍릉은 기방에 가지 않지만 기방 같은 곳은 관리나 귀족이 돈을 흩뿌리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돈을 물 쓰듯이 쓰는 일도 허다했다.
일반적인 기방도 매달 벌어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하다고 하는데 제경에서 가장 유명한 빙란각은 어느 정도겠는가?
감진이 빙란각의 사장이라는 점만 봐도 그의 재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또는 그의 배후에 있는 사람의 재력과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 수 있었다.
방안은 정적에 잠겼다.
“이것 말고 단씨 쌍둥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
야홍릉의 목소리는 목욕을 하고 있어 그런지 나른하게 풀어져 있었다.
서쪽 별실은 봉회근의 방과 아주 가까웠다. 또 금란원의 안팎에 수많은 호원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방문과 창문이 꽁꽁 닫혀 있고 야홍릉과 능묵의 말소리도 높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이 엿들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또 둘은 모두 무공이 뛰어난 사람들인지라 밖에서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낱낱이 들을 수 있었다.
야홍릉의 질문을 들은 능묵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서신을 바라보았다. 이 서신에는 단씨 형제를 조사한 내용이 없었다.
“전 그들에 대해 잘 모릅니다.”
능묵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양아버지가 궁정 악사 단리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감진만큼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감진에 대해서도 직접 본 적이 없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은 것이 다였다. 그래서 그날 호국 공주부에서 그는 감진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서신에는 감진에 대한 조사 결과가 상세하게 쓰여 있어 그는 적힌 대로 읽었다.
병풍 뒤에서 침묵이 흘렀다.
야홍릉은 욕조에서 일어나 몸을 닦은 뒤, 널찍한 침의를 입었다.
그러나 천으로 가슴을 싸매지는 않았다.
밤에는 외부인을 만날 일도 없고 능묵이 지키고 있기에 자신을 혹사하고 싶지 않았다.
하얀색 침의를 입고 병풍을 나선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공주부에 있을 때 한경백에게서 글을 많이 배운 모양이구나?”
능묵은 당황했다가 표정이 변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서신을 읽어 보았다.
그 위에는 그가 익힌 글이 꽤 있었다. 그러나 한경백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날이 얼마 되지 않기에 많이 익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방금 그가 서신을 읽을 때, 모르는 글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야홍릉은 침대에 기대앉으며 능묵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씻으러 가거라.”
능묵은 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께서는 내가 왜 갑자기 글을 읽게 되었는지 묻지 않으시네.’
잠깐 침묵을 지키던 그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비밀 서신을 야홍릉에게 전해준 뒤, 돌아서서 떠났다.
영위는 주인처럼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목욕할 수 없었다.
봉씨 가문의 뒷마당에는 강이 있었다. 그는 물통으로 강물을 뜬 뒤,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옷을 훌렁 벗고 물을 머리 위에서 쏟았다.
온몸에 묻은 먼지와 땀을 씻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옷을 물에 넣고 씻은 다음 내력을 사용해서 말리면 바로 입을 수 있었다.
이 과정은 시간이 2각도 걸리지 않았다. 이 시간을 넘겨서 주인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이 오면 절대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능묵은 영위의 신분을 감추고 수행 하인의 신분으로 야홍릉과 함께 온 것이기에 옷 몇 벌을 가지고 왔다.
더불어 야홍릉은 오늘 그에게 옷을 한 벌 사주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옷을 갈아입는 절차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