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첩실이 여섯
벼루 가게를 나온 그들은 상가를 돌다 옷 가게에 들어가게 되었다.
야홍릉은 경포 두 벌을 사서 검은색은 능묵에게 주고 청색은 자신에게 남겼다.
경포는 모두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만든 것이지만 돈 좀 있다 하는 집안에서는 모두 살 수 있었다. 가격이 너무 비싼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돈 많은 사람이 많기에 비단옷을 입는 사람도 많았다.
능야는 좋은 옷을 입는 데 익숙한 사람인 듯했지만 비단 경포 두 벌을 샀다고 해서 그의 신분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상인도 부유하고 관직을 가진 사람들도 돈이 많았다.
세상 상인과 관리들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봉회근은 고개를 젓고 어두운 표정을 숨겼다.
‘능 공자는 허점이 드러나지 않는군. 먹는 것에서나 입는 것에서나 일부러 자신의 기준을 낮추지 않는데 신분을 알아낼 수 없단 말이야. 참 섬세하고 완벽한 사람이야.’
다섯 명은 보석 가게, 분 가게, 벼루 가게, 옷 가게 등 여러 가게를 돌아다녔다.
길 가던 행인들 중 봉씨 가문의 봉회근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대공자, 깨어났습니까?”
“대공자, 중독되었다던 건 괜찮아지셨습니까?”
“대공자, 몸은 괜찮아요?”
그들은 봉회근이 괜찮다는 말을 들은 뒤, 말 두어 마디를 나누고 자리를 떴다.
대다수가 공손한 자세였다.
위성에서 관리 가문을 제외하고 봉씨 가문이 가장 큰 가문이었다.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상가 중 반수 이상이 봉씨 가문 것이었다. 그들 중 많은 집사와 일꾼들이 봉씨 가문에서 받는 봉급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봉씨 가문의 대공자이자 장차 봉씨 가문의 가주로 될 봉회근이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위성은 밤에 보면 번쩍거리는 불빛에 더욱 번화해 보였다.
“이만 돌아가시죠.”
야홍릉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봉 공자는 몸이 아직 허하니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소.”
봉회근도 피곤하다고 느끼고 있던 터였다.
능 공자가 괜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침대에서 기절한 채, 스무날 동안 누워 있었으니 독이 풀렸다고 해도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밖에서 한참 돌아다닌 그는 기력이 달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고집을 부리지 않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봉씨 저택의 대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봉령.”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파란색 장포를 입은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았고 키가 크며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생겼다.
그러나 안색이 창백하고 다리에 힘이 없는지 걸음걸이가 이상하며 눈빛이 어두웠다.
“구(仇) 공자?”
그를 본 봉령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집에서 잠을 자지 않고 저희 집에는 왜 오셨어요?”
구 공자는 가까이 다가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늦은 시간인데 낭자와 두 오라버니도 밖에서 놀다 오는 길이 아니오?”
말을 하던 그의 시선이 야홍릉의 얼굴에 닿았다.
그는 야홍릉의 아름다운 용모를 보더니 언짢은 얼굴로 실눈을 떴다.
“저 공자는 봉씨 가문의 어떤 사람이오?”
“귀한 손님이세요. 구 공자께서 용건이 없으시다면 저희는 이만 들어갈게요.”
봉령이 말했다.
“낭자, 나더러 들어오라는 소리는 안 하오?”
구 공자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무시한 채, 봉령에게 말을 걸었다.
심지어 봉회근과 봉여희도 무시했다.
“죄송하지만 전 구 공자와 할 얘기가 없어요.”
봉령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보세요.”
구 공자는 봉령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다고? 봉령 낭자가 오라버니 외의 다른 남자와 나가 놀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남녀칠세부동석은 상대에 따라 다른가 보군.”
그 말에 봉령은 미간을 찌푸리고 언짢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제 일인데 구 공자와 상관이 있나요?”
구 공자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봉령…….”
“봉 공자는 내일 아침 약을 드셔야 하오. 늦어서 진시(辰時, 7~9시)에는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지.”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느긋하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얼른 저택으로 가서 쉬시오.”
그 말을 들은 구 공자는 고개를 돌리고 야홍릉을 바라보며 어두운 눈빛으로 물었다.
“당신이 바로 봉회근의 독을 풀어주었다던 의원이요? 젖은 뗐나? 사기나 치는 돌팔이는 아니고?”
봉회근은 어두운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
“눈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고 능 공자가 사기를 치는 돌팔이인지 아닌지 내가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을 보면 모르겠소? 또 뭐가 의심스럽다는 것이오?”
구 공자는 깜짝 놀란 얼굴로 봉회근을 바라보았다.
봉령의 옆에 있던 사람이 봉회근이라는 것을 이제야 눈치챈 듯했다.
“대공자, 의식을 되찾은 것입니까?”
이때, 웃음소리가 들렸다.
봉여희가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구 공자는 눈썰미가 좋지 않군. 멀쩡한 사람이 둘이나 서 있는데 보지 못한 것이오? 아니면 보지 못한 척을 한 것이오? 정말 이상한 일이군.”
그 말을 들은 구 공자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방금 제대로 보지 않고 봉회근이 봉령의 둘째 오라버니인 봉청서인 줄 알았다. 그런데 봉회근이 나아서 돌아다닐 정도가 되었다니.
그는 봉씨 가문의 대공자를 좀 두려워하는 편이었다.
잠깐 정적이 흐른 뒤, 그는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을 대공자께서 잘 생각해 보셨나 모르겠습니다.”
봉회근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생각할 게 뭐가 있겠소? 구 공자는 일찌감치 그 기대를 접으시는 게 좋겠소.”
말을 마친 그는 봉령을 바라보았다.
“가자.”
봉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저택 대문으로 들어갔다.
봉여희는 담담하게 웃었다.
“구 공자는 집으로 돌아가 거울을 잘 비춰보는 게 좋겠소. 봉씨 가문의 소저는 아무나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오.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지 마시오.”
말을 마친 그도 따라서 들어갔다.
구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화를 내며 씩씩거렸다.
“봉여희, 너는 별 볼 일 없는 서자일 뿐이야. 네가 말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봉여희는 냉소를 하였다.
“그럼 구 공자는 내가 별 볼 일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봉회근이 뒷짐을 진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할 자격은 있소?”
구 공자는 표정이 굳더니 아부하며 말했다.
“다, 당연하지요…….”
“그렇다면 내가 여희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하지. 잘 듣소.”
봉회근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구 공자는 집으로 돌아가 거울을 잘 비춰보는 게 좋겠소. 봉씨 가문의 소저는 아무나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오.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지 마시오.”
말을 마친 그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야홍릉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능 공자, 안으로 드시지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봉씨 저택의 대문에 들어섰다.
능묵은 그녀에게서 반 걸음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바짝 뒤따랐다.
홀로 저택 밖에 남겨진 구 공자는 주먹을 꽉 쥐고 음산한 눈빛으로 봉씨 저택의 대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시야에 사라지는 것을 보며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정원으로 걸어가며 봉회근이 물었다.
“능 공자, 내일 아침에 내가 먹어야 한다는 약은 무엇이오?”
“보약이오.”
야홍릉이 대답했다.
“봉 공자가 몸이 허하니 보약 두어 첩을 먹어 원기를 보충해야 하오.”
봉회근은 고개를 끄덕이고 약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능 공자는 방금 그 구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소?”
이 말을 들은 봉여희와 봉령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건 봉씨 가문의 일이니 나와는 상관이 없소.”
“상관이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거요. 구굉의 부친은 위성의 부모관(父母官, 지부, 지현 등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지방 장관에 대한 존칭)이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부의 아들이었군. 그래서 봉씨 저택 앞에서도 난동을 부린 거였고.”
“그는 우리 령이를 마음에 품고 혼인을 하기를 바랐는데 아버지와 난 모두 허락하지 않았소.”
봉회근이 담담하게 말했다.
“관리와 상인이 혼인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권세가 있기보다 못하지 않소? 그러나 봉씨 가문의 배후에는 섭정왕이 있기에 구굉은 너무 무도하게 굴더군.”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이치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아무리 부모관이라고 해도 동제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섭정왕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그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봉씨 가문에서는 사윗감을 고를 때, 가문과 용모를 제외하고 능력과 품성을 가장 중요시한다오. 매일 여인이나 건드리고 다니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구굉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소.”
봉회근은 말을 마치고 야홍릉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령이는 올해 열네 살로 혼인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요. 능 공자는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하오.”
봉령은 깜짝 놀랐다.
곧이어 심장이 쿵쾅거리며 저도 모르게 상기된 얼굴로 아름다운 능 공자를 바라보았다.
능 공자가 봉씨 저택에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 그를 잘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그의 용모, 분위기, 언행, 수양 등 모든 면에서 구굉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났다.
분위기를 보면 한눈에 상대방이 용인지 이무기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야홍릉은 봉령을 아내로 맞이할 생각이 없다고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봉령의 쑥스러운 표정을 본 그녀는 말을 다듬었다.
“사실 나한테는 이미 첩실이 여섯이나 있소. 봉 낭자를 맞이하는 건 그녀에게도 예의가 아닌 것 같소.”
그녀의 말이 끝나자 공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봉회근, 봉여희와 봉령은 하나같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상한 눈빛으로 어려 보이는 능 공자를 바라보았다.
‘거절하겠으면 할 것이지 첩실이 여섯 명이나 된다는 거짓말은 왜 하지?’
“사실입니다.”
능묵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첩실이 여섯 있으십니다.”
봉씨 남매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큰형님은 올해 스물셋인데도 첩실 한 명 없는데…….”
봉여희는 입가를 실룩거렸다.
“능 공자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오.”
‘이렇게 차가워 보이는 공자가 풍류스러운 사람이라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긴 했지만 첩실이 여섯 명인 건 맞소.”
야홍릉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난 집안이 복잡하여 주변에 나쁜 사람도 많고 위기도 많소. 봉 낭자처럼 단순한 성미의 여인이 시집오기에는 위험한 곳이오.”
봉령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완곡하고 예의를 갖춘 거절이었다.
봉령은 실망했지만 거절당한 일로 속상하지 않았다.
봉회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모했구려.”
“괜찮소.”
야홍릉은 또 말을 덧붙였다.
“봉씨 가문은 크고 대단하지 않소? 봉 낭자가 아직 어리고 성미가 단순하니 혼인하는 인륜지대사에는 신중한 게 좋을 것 같소. 여인의 평생 행복과 연관되어 있으니 말이오.”
그 말을 들은 봉회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능 공자의 말이 맞소. 잘 들었소.”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보고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서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