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바둑 실력이 좋구나
봉회근은 생각을 해보다 물었다.
“능 공자는 조정에서 왔소, 아니면 강호에서 왔소?”
그는 능묵이 무공을 사용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을 들어 보니 능묵의 무공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혹시 강호 출신이 아닐까?’
강호인은 상인과 마찬가지로 국경선을 가리지 않고 왕래를 했다. 또 강호에는 세력이 강한 문파가 많기에 조정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야홍릉은 이 질문에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봉 공자는 나와 봉씨 가문의 거래는 모두 정정당당하게 진행되는 것이고 내가 봉씨 가문을 이용해 뭔가를 하거나 봉씨 가문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만 알면 되오. 다른 것은 더 물을 필요가 없소.”
봉회근은 할 말을 잃었다.
동제 사람이라는 가능성이 배제된 지금, 능 공자가 강호 출신인지, 조정 출신인지만 안다면 그의 진실한 신분을 대충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봉씨 가문의 세력으로 능 공자의 신분을 알아보기 아주 쉬울 것이다.
야홍릉은 그것을 말해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한참 뒤, 그는 입을 열었다.
“능 공자, 이 며칠 안에 날 치료해 주겠다는 사람이 또 나타날 거라는 말이오?”
“그렇소.”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 사람이 온다면 봉 공자는 잘 대접해 주는 게 좋을 거요.”
봉회근은 그 말을 듣자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동제의 황실 쪽 사람이오?”
“그건 아닐 것이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시오.”
봉회근은 약간 놀랐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능 공자, 먼저 쉬시오. 난 이만 가보겠소.”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쪽 별실을 떠났다.
야홍릉은 책을 보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책을 내려놓고 찻잔을 들고서 차를 마셨다.
오후에 할 일이 없는 야홍릉은 귀비탑에 기대어 앉아 좀 쉬다가 신시가 넘자 시녀더러 바둑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능묵에게 함께 바둑을 두자고 말했다.
바둑판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야홍릉은 앉으며 담담하게 물었다.
“바둑을 배운 적 있느냐?”
“……없습니다.”
능묵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주춤거리며 앉으려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좀 알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신은전에서는 바둑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능묵은 바둑판의 줄과 검은색과 흰색으로 나뉜 바둑돌을 보는 순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얀 바둑돌을 들어 바둑판에 내려놓았다.
능묵은 검은 바둑돌을 들고서 바둑판을 한참 바라보다가 한 곳에 두었다.
방안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오직 흑백 바둑돌이 바둑판에 내려앉으며 나는 맑은소리가 귓가에서 맴돌 뿐이었다. 능묵은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몇 번은 바둑을 두는 그의 행동이 좀 쑥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그는 바둑을 둘 때, 확신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몇 번 두고 난 뒤, 생각이 또렷하게 자리를 잡으며 그의 행동도 훨씬 느긋하고 여유롭게 변했다.
심지어 시간을 들여 생각하지도 않았다.
야홍릉이 바둑을 두면 그도 바로 두었다. 속도가 빨랐으나 실력도 제법 좋아 허점을 찾을 수 없었다. 능묵이 둔 바둑에는 날카로운 힘도 어렴풋이 들어 있었다.
마치 강산을 굽어보는 군왕 같기도 하고 전쟁터에서 병사들을 지시하는 장군 같기도 했다.
‘생각이 깊고 결단성이 있으며 패기가 넘치는군. 어영위의 신분답지 않은데.’
야홍릉은 바둑판의 상황을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하얀 바둑을 든 채, 한참이나 내려놓지 않았다.
한참 뒤, 그녀는 바둑을 다시 통에 넣고 몸을 옆으로 기댄 채, 턱을 괴고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능묵은 일어서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주인님.”
야홍릉은 말없이 턱을 괴고 있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바둑 실력이 좋구나.”
능묵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또한 그가 해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야홍릉에게 계편을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이 며칠간 일어난 이상한 일들 때문에 그는 흔들림 없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을 느꼈다.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능묵의 불안한 마음과는 달리 야홍릉은 이 이상한 점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녀는 옆에 놓인 책을 들고 아까 읽었던 장을 펼쳤다. 그리고 다시 평온한 얼굴로 조용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이 드리워 있었다.
방안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야홍릉은 책을 내려놓고 미간을 문질렀다.
“좀 피곤하구나.”
능묵은 시선을 들고 안도의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좀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주인님은 쉬십시오.”
야홍릉은 잠이 들었다.
능묵의 손놀림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힘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혈위를 정확하게 찾는 것도 그렇고 야홍릉은 그의 손길에 긴장을 풀고 잠이 들었다.
이번 한 번이 아니었다.
목국의 제경을 떠난 뒤부터 야홍릉은 겉으로는 차갑고 싸늘하게 대했지만 사실상 그녀가 보여준 행동은 능묵을 더없이 믿는 행위였다.
봉씨 가문에 들어온 이틀 동안, 능묵에게 이상한 현상이 여러 번 나타났지만 불안한 사람은 능묵 뿐이었다.
야홍릉은 여전히 그를 믿고 있었다.
만약 능묵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살심을 품었다면 얼마든지 그녀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해 어영위로서, 수행 하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
다른 마음을 전혀 품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서 충성심이 강한 건지, 오랫동안 지속된 훈련에 뼛속 깊이 주인에 대한 충성심만 각인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야홍릉은 그를 의심하거나 일부러 멀리하지 않았다.
믿음이라는 것은 아주 소중한 것이자 대단한 것이라 마음속에 고이 모셔둬야 하는 것이었다.
능묵은 말수가 적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 믿음을 저버리는 날에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한씨 가문의 한옥금이 바로 그 전례였다.
야홍릉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그녀는 세수를 마친 뒤, 차를 마셨다.
곧 봉회근과 봉여희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찾아왔다.
저녁에 저택 밖을 나가기로 약속한 것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봉회근을 힐끗 보고는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대공자는 몸이 허하시니 저택에서 쉬시는 게 좋겠소.”
‘단지 나가서 둘러보는 것인데 사람이 많이 갈 필요가 없지. 게다가 봉여희도 있는데.’
그녀는 봉씨 가문이 그녀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접대할 줄 몰랐다.
처음에는 그저 능묵과 저택을 나가 볼 생각이었다.
“봉씨 가문의 주인으로서 귀한 손님이 오셨는지 어찌 모르는 척할 수 있겠소?”
봉회근이 웃으며 말했다.
“천일거(天壹居) 주루에 술상을 봐두었소. 이따 저녁 식사를 그곳에 가서 하고 위성의 야경을 돌아보면 될 거요.”
그도 방으로 돌아가 오후 내내 잤기에 더 이상 쉬고 싶지 않았다.
야홍릉은 ‘귀한 손님’이라는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봉회근이 꺼낸 제안에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그의 몸인데 그녀가 지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옆에서 말없이 듣고 있던 봉여희는 둘의 대화를 듣더니 저도 모르게 얼굴을 실룩거렸다.
‘단숨에 재산의 이 할을 달라는 사람이 무슨 귀한 손님이라고? 얄미워 죽겠는데. 큰형님은 차기 가주다워. 강도 같은 능 공자의 행위도 목숨을 살려준 은혜라고 받아들이고 말이야. 참 너그럽다니까.’
넷이 함께 저택을 나서려는데 봉령이 급히 뛰어오는 게 보였다.
열네 살 된 소녀는 야밤의 불빛에 더욱 아름답고 생기 넘치게 보였다.
“저도 밖에 나가고 싶어요. 오라버니, 저도 데려가 주세요.”
그녀는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오랫동안 저택 밖을 나가지 못했단 말이에요.”
봉회근이 독에 당해 쓰러진 뒤로 집안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다들 마음을 졸이며 지내느라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이제는 봉회근도 나았으니 그녀는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다.
봉회근은 미간을 찌푸렸다.
“계집애가…….”
“저도 가겠다고요.”
봉령은 입을 삐죽 내밀고 떼를 썼다.
“첫째 오라버니가 무사히 깨어난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줘야죠. 그런데 오라버니가 몸이 안 좋으니까 제가 함께 다니면서 오라버니의 시중도 들어 드릴 거예요.”
봉여희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손에 물 한 번 묻혀 본 적이 없으면서 시중을 들 수나 있겠어?”
“당연하죠.”
봉령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제가 못해도 시녀가 있잖아요. 첫째 오라버니와 셋째 오라버니는 시녀를 데리고 나가기 불편하니 제가 두 명 데리고 다니면서 첫째 오라버니의 시중을 들라고 하면 되죠.”
당당한 그녀의 말에 둘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봉회근은 고개를 돌리고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능 공자, 괜찮겠소?”
그 말에 봉령과 봉여희는 모두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모두 능 공자가 성격이 차갑고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들 삼 남매와 함께 다니지 않겠다고 하면 모든 것이 의미 없었다.
야홍릉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봉령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야홍릉의 팔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고마워요, 능 공자. 능 공자가 최고예요.”
봉여희는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능 공자가 봉씨 가문에 온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을 뿐인데 왜 하나같이 다 그를 이렇게 믿는 거지? 아버지와 큰형님도 그러시더니 이제는 봉령이도 이러잖아. 단순히 능 공자가 큰형님을 치료해 줬다고 이러는 건가?’
봉여희는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능 공자의 옆에 서 있는 능묵을 바라보았다.
* * *
위성은 다른 나라에서도 번화하기로 유명한 성이었다.
거리에는 말과 마차가 많이 다녔고 상가가 즐비했으며 오가는 행인들도 호화로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천일거주루 이 층의 별실에 앉아 창문으로 바깥의 번화한 야경을 보노라면 세상을 굽어보는 것 같은 우월한 느낌이 들었다.
주루의 점소이가 음식을 올리고 더 필요한 게 있냐고 물었다.
봉회근은 야홍릉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능 공자는 무슨 술을 마시오?”
성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던 야홍릉은 그 말을 듣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차를 마시겠소.”
봉회근은 고개를 끄덕이고 점소이에게 지시했다.
“용정차(龍井茶)를 올리게.”
그는 중독되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기에 술을 마실 수 없었다.
어영위인 능묵은 주인의 안전을 지켜야 하므로 절대 술을 마실 수 없었다.
봉령은 여인이라서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 봉여희 한 명밖에 남지 않았기에 술을 시킬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