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왜 기억을 잃은 것이오?
“공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 두 명이 무릎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저희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지시를 내려주세요.”
둘은 봉형이 보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야홍릉의 옆에는 능묵이 있는지라 두 시녀는 차를 타고 음식을 나르는 것 말고 딱히 할 것이 없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위성에서 가장 유능한 의원을 모셔오너라.”
‘의원?’
하란(夏蘭)이라고 불리는 시녀가 그 말을 듣더니 물었다.
“공자, 어디 편찮으신가요?”
“아니, 내가 아니라 내 하인이 아프다.”
야홍릉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하란은 좀 놀랐지만 바로 지시를 받았다.
“잠시만요, 제가 바로 불러올게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돌려 봉회근의 방으로 걸어갔다.
봉회근은 약을 먹은 뒤, 아버지와 얘기를 좀 나누고 잠이 들었다가 이제 막 깨어났다. 그는 침대 머리에 기댄 채, 물을 마시고 있었다.
봉형은 옆에 없었고 추란만 남아 침대 앞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봉 공자의 남은 독을 고쳐야겠으니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가거라.”
추란은 무릎을 살짝 굽힌 뒤, 다른 시녀 세 명을 데리고 밖을 나갔다.
봉회근은 시선을 들고 눈앞의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난 무슨 독에 당한 거요?”
“그 질문에 답해주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오.”
야홍릉은 걸어가 침대 머리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비단 함을 꺼내 은침을 들었다.
“누우시오.”
봉회근은 움직이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목국의 마장과 제염, 제철 사업을 달라고 했으면서 이렇게 간단한 질문도 대답해 주지 않겠다는 거요?”
야홍릉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모두 내가 받아 마땅한 보수이자 당신 목숨을 살려주는 데 대한 대가요. 당신이 깨어난 이상, 그 거래는 이미 끝났다는 거지.”
말을 마친 야홍릉은 다시 시선을 들고 평온하게 말했다.
“그러니 당신이 한 질문에 답할지, 말지는 내 마음이오. 문제 있소?”
봉회근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내건 조건이 크기는 하지만 상업계의 규칙에 어긋난 것이 아니었다.
능 공자는 그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고 그의 아버지는 보수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아주 공평했다.
야홍릉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이라도 절대적인 세력과 재력 앞에서는 힘이나 용기를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능 공자는 그렇지 않았다.
“능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데 말해 줄 수 있소?”
“없소. 누우시오.”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봉회근도 눈살을 찌푸렸으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내가 약속을 어겨서 약속했던 마장과 사업을 넘겨주지 않으면 어떨 거요?”
“그렇게 해보시든가.”
야홍릉은 그것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내가 당신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니.”
야홍릉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아버지, 두 동생, 그리고 봉씨 가문의 모든 사람까지 난 순식간에 저승으로 보낼 수 있소. 또 봉씨 가문의 재산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수 있지. 한 번 시도해 보시겠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듣는 봉회근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눈앞의 소년을 쏘아보았다.
봉회근은 스물세 살이 되도록 그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내 앞에서 감히 이렇게 잔인한 협박을 하다니. 무슨 용기로 이러는 거지?’
봉회근은 아주 궁금했다.
능야라고 불리는 소년은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으나 아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신분조차 알리지 않는다는 거지…… 그렇다면 배경이 너무 강하다는 건가? 아니면 너무 하찮은 건가?’
봉형은 어젯밤에 능야의 수행 하인이 혼자서 자객들을 모두 막아냈다고 했다.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봉회근은 능야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의 공기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봉회근은 말없이 침대에 기대어 앉아 야홍릉의 요구에 따라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능 공자와 아버지가 한 거래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소. 능 공자는 날 어떻게 생각하지? 날 존중하오?”
야홍릉은 아무 말 없이 은침을 꺼내 그의 정수리에 꽂았다.
“내 능력을 믿는다면 존중할 것이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그의 손에 들린 은침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봉씨 가문의 적자가 사업하는 수완과 박력이 장난이 아니라고 하던데 사실인지는 모르겠군.”
봉회근은 눈을 감고 담담하게 말했다.
“능 공자가 신분조차 말하지 않는데 내 능력을 높이 산다고 한들 능 공자가 봉씨 가문에 이득을 가져다주겠거니 생각하지는 않소.”
“봉씨 가문은 재력도 강하고 권세도 강하지만 상인은 상인인지라 가문이 아무리 강해도 계급을 뛰어넘긴 힘들지.”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봉씨 가문이 동제에서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등에 섭정왕 영위를 업고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영위가 죽는다면…… 봉씨 가문이 망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때가 되면 봉씨 가문은 황실 친척이라는 신분만 잃게 되는 게 아니라 황제로부터 보복도 당할 것이다.
봉씨 가문과 영위는 이미 한배를 탄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큰 화가 닥쳐오면 그들은 누구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 뻔했다.
봉회근은 능야가 평온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섭정왕의 일을 꺼내자 흠칫 놀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소년에게 밀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쩌면 밀린 게 아니라 원래부터 야홍릉의 상대가 아닐 수도 있었다.
능야는 수행 하인만 데리고 위성에 온 데다 신분도 밝히지 않았지만 대단한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그의 말은 정말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봉회근이 섭정왕부에서 중독된 일은 영위의 소행일 리 없었다.
그렇다면 제경 전체에서 그를 가장 해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는 스무날 동안 독에 당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 말은 이번 사건의 주모자가 이미 반은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능 공자라는 사람이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자객이 찾아온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봉회근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더 이상 어려 보이는 외모로 능야의 능력을 무시하지 않았고 또 신분에 대한 호기심도 내려놓았다.
그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능 공자는 섭정왕을 도울 것이오?”
야홍릉이 대답했다.
“그건 봉씨 가문의 성의에 달렸지.”
봉회근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뺐다.
잔여 독물을 제거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들지 않았다.
야홍릉은 은침을 거두고 일어서서 밖으로 걸어갔다.
“쉬시오.”
입구에 가자 의원을 모시러 갔던 춘란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뒤에는 나이가 쉰이 넘어 보이는 중년 남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단정한 외모에 글공부를 많이 한 듯 우아한 기품이 흐르고 있는 남자였다.
의원과 선비는 분위기가 비슷했다.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서쪽 별실로 걸어갔다.
“능 공자.”
춘란이 화랑에서 걸어오더니 야홍릉의 앞에 섰다.
그녀는 야홍릉에게 무릎을 굽혀 예를 올리고 말했다.
“위성에서 의술이 가장 뛰어난 의원인 서(徐) 의원이십니다.”
야홍릉은 의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오.”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그리고 고개를 돌려 춘란과 다른 시녀에게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서 의원은 능 공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참 차가운 젊은이군. 이 공자가 봉씨 가문 공자를 치료하러 온 능 공자라고 했지? 독을 잘 고치니 의술에도 능하려나?’
서 의원은 궁금한 마음을 억누르고 따라서 들어갔다.
“저 아이를 좀 봐주시오.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쓰러졌소.”
야홍릉은 침대 앞으로 걸어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능묵을 가리켰다.
서 노인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 이유 없이 쓰러졌다고?’
손에 든 약상자를 내려놓은 서 의원은 그의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능묵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이마를 만져 보았다. 머리에 외상을 입은 흔적이 있나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야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잠시 뒤, 서 의원은 손을 거두고 일어서서 야홍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친구에게서 아무런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소.”
야홍릉은 의원의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담담하게 물었다.
“기억을 잃었다면, 그러니까 부분적 기억을 잃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소?”
‘기억을 잃었다고?’
서 의원은 흠칫 놀랐다.
“기억을 잃는 데는 많은 원인이 있소. 약물 부작용이거나 머리를 부딪혀 혈관이 막혔다거나 또는 큰 충격을 받았다거나. 아니면, 강호에 떠도는 사악한 기술도 사람의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소. 그러나 난 의술을 배운 사람이라 강호의 그런 기이한 술수에 대해 잘 모르오.”
그 말을 들은 야홍릉은 고개를 돌려 능묵을 바라보았다.
“충격을 받았거나 머리를 부딪혀 기억을 잃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되오?”
“없소.”
서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에게서는 충격을 받았거나 머리의 혈관이 막힌 기미가 보이지 않소. 정말 기억을 잃은 게 맞긴 합니까?
야홍릉은 평온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 의원은 자신이 다소 무례하게 말했다 싶어 느껴 다급히 사과했다.
“실례했소.”
“이 아이의…….”
야홍릉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여기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오?”
“그건 장담할 수 있소. 난 의술만 삼십 년 넘게 행해왔소. 이런 것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오.”
서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은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대 머리의 봇짐에서 은자를 꺼내 의원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진료비요. 오시느라 고생하셨소.”
서 의원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받으시오.”
야홍릉은 담담한 말투로 말했지만 거역하지 못할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 문을 나서서 오늘 본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그 누구에게도.”
서 의원은 흠칫 놀랐다.
그리고 말없이 입막음 비용인 은자를 받고서 그것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공자, 걱정 마시오. 그 정도 약속은 지킬 수 있으니.”
야홍릉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서 의원이 떠난 뒤, 야홍릉은 홀로 창가에 서서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칠흑같이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