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봉회근은 아버지의 말에서 아주 중요한 정보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 아직도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
둘째, 열여덟 살도 안 되는 어린 소년이 놀라운 무공 실력을 가졌다.
“어젯밤의 자객 소동으로 능 공자는 봉씨 가문의 하인과 호원을 믿지 못하는지 뭐든 직접 하려고 하더구나. 심지어 약을 달이는 것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어.”
봉형은 말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어젯밤에야 우리 집의 수비가 이렇게 약하다는 것을 알았단다. 적이 쳐들어오고 싶다고 마음대로 들어오니 이걸 어찌하면 좋으냐?”
봉회근은 이 말을 듣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말없이 죽을 먹었다. 그의 얼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이 담겼다.
죽 한 그릇을 다 먹자 춘란이 물었다.
“도련님, 더 가져다드릴까요?”
“이제 막 깨어났으니 적게 먹어라. 위가 적응할 시간을 줘야지.”
봉형이 말했다.
“이따가 약도 먹어야 하니 한 시진 뒤에 다시 가져오거라.”
춘란은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빈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봉형은 오늘 마침 여유가 있었다.
그는 능 공자가 약을 달이는 동안 아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봉회근이 중독된 원인과 배후의 지시자를 알아내려는 게 목적이었다.
그리고 최근 동제의 섭정왕과 어린 황제 사이의 상황까지.
대부분은 봉형이 이야기하고 봉회근은 주의 깊게 들었다.
가끔씩 그도 입을 열고 한두 마디씩 거들었다.
그는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그가 한 말은 모두 날카롭고 중요한 말들이었다.
봉회근은 당장 몸이 허약했으나 머리만은 명석했다.
물을 마시고 죽을 먹은 그는 이미 원래의 명석한 두뇌를 되찾았다.
부자가 반 시진 가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며 짙은 약 냄새가 밖에서 들어왔다.
봉회근이 시선을 들자 젊고 잘생긴 소년이 접시에 갓 달인 약을 놓은 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싸늘한 외모와 차가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봉회근은 실눈을 뜨고 숨을 참았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이 탕약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었으나 온몸에 흐르는 귀티를 감출 수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소년이군.’
능묵이 걸어와 탕약을 받아서 봉형의 손에 건네주었다.
그는 봉씨 가문의 대공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또 야홍릉이 직접 탕약을 먹여 주는 걸 바라지 않기에 아예 봉형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탕약을 마시고 좀 쉬면 나을 것이오.”
소년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샘물처럼 차가우나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저녁에 남은 독을 고치러 오겠소.”
말을 마친 그녀는 얘기를 더 할 필요를 못 느꼈는지 돌아서서 밖으로 향했다.
“능묵.”
능묵이 따라갔다.
봉회근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능 공자는 성미가 차가운 사람이라 다가가기 쉽지 않아.”
봉형은 덤덤한 말투로 말하며 숟가락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먹거라.”
봉회근은 약을 받아먹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치료비로 얼마 주기로 하셨습니까?”
봉회근은 이런 성미의 사람을 부르려면 돈이 꽤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치료비라…….’
봉형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목국 서남쪽의 마장과 제염, 제철 사업을 주기로 했다.”
‘뭐라고?’
봉회근은 입을 떡 벌린 채, 굳어졌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뭐라고요?”
“잘못 들은 것 아니니까 의심하지 말거라.”
봉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제안한 게 아니라 능 공자가 요구한 거다.”
봉회근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서쪽 별실로 돌아온 야홍릉은 안방의 침대 머리에 기대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어여쁜 얼굴이 창백해진 채였다.
능묵은 손을 꽉 맞잡고 뻣뻣하게 굳은 채로 침대 앞에 서 있다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
야홍릉은 눈을 뜨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호접고는 영성이 있어서…….”
능묵은 시선을 내리깔고 눈에 담긴 표정을 숨겼다.
“주인님께서 만약 그 녀석들을 피로 사흘만 키운다면 호접고는 주인님의 피 맛에 적응하여 의존할 겁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면 주인님의 피로만 녀석을 진정시킬 수 있게 됩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호접고는 주인님의 통제를 받지 않으나 주인님은 녀석으로 저를 통제하실 수 있습니다.”
능묵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가득 차 있어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약 주인님께서 저 때문에 불만스러운 상황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제가 죽기보다 못한 괴로움을 느끼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한 ‘불만스러운 상황’은 배신이 아니었다.
그는 주인을 배신할 리 없었다. 허나 야홍릉이 그를 더 이상 믿지 못하거나 그를 곁에 남겨두고 싶지 않다면 언제든지 망가뜨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켰다.
잠시 뒤.
그녀는 천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몸을 침대에 반쯤 눕다시피 기댄 그녀는 눈을 감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하니 와서 좀 주물러라.”
능묵은 시선을 들고 침대 머리에 기댄 채, 한기가 약간 가신 듯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온화한 것이 그를 꾸짖는 것 같지 않았다.
능묵은 이 담담한 지시가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감히 주인의 뜻을 억측할 수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네’라고 한 뒤, 무릎을 꿇은 채로 두 걸음 이동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야홍릉의 관자놀이를 익숙하게 문질렀다.
방안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능묵은 저도 모르게 야홍릉의 감고 있는 두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또 자신의 길고 강한 손가락을 보는 순간,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주인님도 무공을 연마하시는 분인데 관자놀이와 목 부근이 사람 몸에서 가장 연약한 부위라는 걸 모르시나? 그런데 이렇게 무방비상태로 온몸에 힘을 풀고 계시니…….’
능묵이 강한 영위가 아니라 일반적인 무공 연마자라고 해도 그녀를 쉽사리 해칠 수 있었다.
‘주인님은 내가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나? 이건 날 믿는다는 건가?’
이 생각이 들자 능묵은 비로소 한시름을 덜었다. 알 수 없는 야홍릉의 행위에 불안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고 마음속으로 따뜻한 난류가 흘렀다.
시간이 흘러 야홍릉은 능묵의 현란한 손놀림에 잠이 들었다.
그녀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그동안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능묵의 실력에 겁을 먹었는지 죽음을 자초하러 온 자객도 없었다.
깨어난 뒤, 그녀는 문득 방 안이 어둡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갈라진 목소리나 느긋한 분위기를 풍기는 목소리였다.
“지금이 어느 때냐?”
“신시(申時)가 금방 지났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 좀 따라 다오.”
“네.”
능묵은 손을 거두고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그는 일어날 때, 온종일 무릎을 꿇은 탓에 다리가 저린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바깥방으로 가서 차를 따랐다.
야홍릉은 일어나서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담담한 시선으로 능묵의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능묵이 다리를 쩔뚝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났다.
“주인님.”
능묵이 차를 따랐다.
야홍릉은 찻잔을 받아 들고 가볍게 들이마신 뒤, 담담하게 말했다.
“능묵.”
“주인님.”
능묵은 흠칫 놀라며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무릎 꿇을 필요 없다.”
야홍릉이 평온하게 말했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능묵은 무의식적으로 몸에 힘을 줬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물으십시오.”
“네가 신은전에 들어갔을 때, 몇 살이었느냐?”
능묵은 예상 밖의 질문에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질문에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럼 신은전에서의 기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
능묵은 미간을 찌푸리고 애써 기억을 더듬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결국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신은전에서…… 서로 죽이는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가 몇 살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야홍릉은 눈살을 찌푸리고 계속해서 물었다.
“영린과 영위를 어떻게 아는 것이냐? 신은전의 대교습이 그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더냐?”
능묵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기억을 되찾으려고 애썼으나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새하얬다.
“남제의 황제는 이름이 무엇이냐? 알고 있느냐?”
‘남제의 황제?’
능묵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입에서 절로 말이 튀어 나갔다.
“용명(蓉鳴)입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국과 남제는 왕래가 별로 없지만 한 나라의 황제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릴 수 있는 사람도 몇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밀이 아닌데다 신은전의 직책에는 정보 수집도 들어 있어 능묵이 용명이라는 이름을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야홍릉은 계속해서 물었다.
“그에게 아들이 몇 명 있느냐?”
“……여섯 명 있습니다.”
‘여섯이라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섯 명이 아니라?”
그 말을 들은 능묵은 자신이 없는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방금 한 말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입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려고 하자 머릿속이 또다시 새하얘졌다.
야홍릉은 그의 반응을 보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에 든 차를 다 마시고 담담하게 말했다.
“남제의 황궁에서 숨어 있는 무사(巫師, 무술(巫術)을 부리는 사람)를 본 적이 있느냐?”
‘무사라고?’
능묵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머릿속에 뭔가가 언뜻 지나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의 장벽을 무너뜨리려는 순간,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능묵은 갑자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야홍릉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부축하고 영문을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능묵이 눈을 꽉 감은 채, 의식을 잃은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다음, 찻잔을 내려놓고 그를 침대에 눕혔다.
야홍릉은 침대 앞에 서서 의식을 잃은 소년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잃은 어영위를 신은전 대교습이 일부러 나한테 보냈다…… 이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지? 아니면 단지 누군가의 계책일 뿐인가?’
창밖을 내다본 그녀는 문발이 드리워져 밖의 빛을 차단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막 그녀가 깨어났을 때, 방안이 캄캄했던 것이다.
창가를 걸어가 문발을 걷자 창밖의 하늘의 어두워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야홍릉은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