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무슨 죄를 저질렀느냐
“봉회근이 고독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능묵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긴장에 물들었다.
“제 생각이 맞다면 이것 역시 동제의 어린 황제가 꾸민 일일 것입니다.”
왜 극독이 아니라 고독인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했다.
봉씨 가문 전체를 엮으려는 것이었다.
봉씨 가문을 끌어들여야 계획을 완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야홍릉은 찻잔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린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이 말이 나오자 주변은 정적에 잠겼다.
능묵은 고개를 숙인 채, 그답지 않게 망설이며 말했다.
“전 그에 대해 잘…….”
“능묵.”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하면 치르게 될 대가를 생각해 보거라.”
능묵은 무릎을 털썩 꿇었다.
야홍릉은 그를 힐끗 바라본 뒤, 싸늘하게 시선을 돌려 먼 곳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전…….”
능묵의 이마에 식은땀이 돋았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뭔가를 떠올리려고 애썼으나 머릿속이 어지러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죄를 저질렀느냐?”
능묵은 침묵을 지켰다. 그의 이마와 뒷덜미에 식은땀이 솟아 옷을 적셨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꿇어앉은 채로 꿈쩍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이 시선이 어두워졌다.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느냐?”
“아닙니다! 없, 없습니다…….”
능묵은 당황한 얼굴로 급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찌 감히 주인님께 뭔가를 숨기겠습니까…….”
‘이상하군.’
야홍릉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하지 말아라. 난 지금 네 죄를 묻고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은 마법처럼 긴장하여 어쩔 줄 모르던 능묵을 다독여 주었다.
그는 곧 진정하고 눈을 내리깐 채, 무릎 아래의 바닥을 바라보았다.
“전…… 사실 머릿속이 어지럽습니다…….”
“머릿속이 어지럽다고?”
능묵의 시선이 어두워졌다.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 장면을 본 듯하나 떠올리려고 하면 머릿속이 어지러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그런 것이냐?”
능묵은 생각을 해보고 대답했다.
“구전해독단을 먹은 뒤부터 그랬습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구전해독단은 해독하는 작용만 있지, 사람의 몸에 부작용을 남기거나 환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야홍릉은 차를 마시고 밤경치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능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없이 일어나 시선을 내리깐 채, 한쪽 옆에 섰다.
야홍릉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서쪽 별실로 걸어갔다.
다음날 오전.
봉형은 봉씨 가문의 최정예 호원을 불러 모았다. 무려 육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금란원의 주변을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파리도 들어오지 못할 것 같았다.
세수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한 야홍릉은 두 번째로 봉회근의 방에 들어갔다. 그녀는 문을 닫기 전에 능묵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곳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두 시진만 자고 오너라.”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야홍릉은 좌우 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내가 나오기 전까지 그 누구도 들여보내지 마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문을 닫고 홍목 병풍을 지나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검은 기운이 한층 가신 봉회근을 바라보다가 의자를 끌어 침대 앞에 앉았다.
방 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봉형이 호원과 나지막하게 얘기를 나누는 소리도 돌렸다.
야홍릉은 손을 뻗어 봉회근의 몸을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의 정수리가 잘 보이게 잡아당겼다.
그녀는 은침이 들어있는 함을 열어 가장 가는 은침을 꺼내 손가락을 베었다. 그러자 빨간 피가 하얀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야홍릉은 차분하게 바라보더니 은침을 피에 묻힌 다음 봉회근의 정수리의 혈자리 위로 천천히 꽂아 넣었다.
정수리는 가장 약하고 치명적인 곳이라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환자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아주 침착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생명이 없는 인형을 상대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은침 하나를 천천히 혈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새 은침을 꺼내 옆의 혈에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봉회근은 감각이 없는지 꿈쩍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머리카락처럼 가는 은침이 정수리에 들어가면서 그의 얼굴에 드리운 시커먼 기운은 증발하듯 서서히 사라졌다.
한참 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돌아왔다.
시간이 지났다.
창밖에 태양이 떠오르자 방안은 점차 뜨거워졌다. 봉회근의 정수리 근처에도 열기가 피어오르더니 비릿한 악취가 풍겼다.
야홍릉의 아름다운 얼굴에 땀에 맺혔다. 그녀는 손끝으로 진기(眞氣)를 내보내며 은침의 온도를 유지했다. 그녀는 그렇게 정수리에 모여 있는 고독이 조금씩 몸 밖으로 증발하게 했다.
고독은 독이나 또 독이 아니기도 했다.
고독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해독할 수 없으나 특별한 수단을 이용해 독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수법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야홍릉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진기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녀의 시선은 머리카락처럼 가는 은침에 고정되었다.
잠시 뒤, 그녀는 손을 뻗어 은침을 일일이 뽑았다.
깨끗하던 은침의 겉면에 검은 물질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은침의 원래 색깔을 가렸다.
그녀는 검은색 은침을 옆에 두더니 또 다른 비단 함을 꺼내 아까보다 길이가 더 긴 은침을 하나 꺼냈다. 그녀는 식지를 찔러 피를 짜내 봉회근의 정수리에 떨어뜨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피비린내가 코끝을 맴돌더니 공기 중에 남아 있던 비릿한 악취와 섞였다. 냄새가 역했지만 야홍릉은 한결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했다. 심지어 자신의 손을 찔러 피를 짜내는 행동도 아주 평온했다.
누가 보면 찌르는 게 제 손이 아닌 듯싶었다.
봉형은 밖에서 초조하게 왔다 갔다 했다. 그는 방안의 능 공자를 방해할까 큰 소리를 낼 수조차 없었다.
잠시 뒤, 서쪽 별실에서 능묵이 걸어 나왔다.
검은 장포를 입은 소년은 용모는 평범하나 분위기가 차갑고 날카로웠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하인이 아니었다.
봉형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점점 능 공자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분, 내력, 이름은 모두 가짜일 수 있으나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꾸며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견식이 넓은 봉형도 한눈에 능 공자와 그의 수행 하인이 일반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누군가 그 둘이 일반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봉형은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점차 정오로 다가갔다. 능묵은 야홍릉의 분부대로 두 시진을 잤다.
그러나 두 시진이 지났지만 야홍릉은 봉회근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능묵 공자.”
봉형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능 공자가 언제면 나올 수 있나?”
능묵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 말에 봉형은 잠깐 말없이 생각하다 질문을 바꾸었다.
“능묵 공자의 실력은 어디에서 배운 것인가?”
능묵은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오해하지 마시게. 다른 뜻은 없었네.”
봉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들을 능묵 공자도 보아서 알고 있지 않나? 자객이 연속 두 번이나 쳐들어왔으나 커다란 봉씨 저택 중 상대가 될 만한 호원이 없었네. 다행히 능묵 공자가 방문을 지키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회근이가 정말로 위험할 뻔했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회근이의 옆에서 능 공자처럼 실력이 뛰어난 고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네.”
봉형은 봉씨 가문의 호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든, 주인의 안전을 보호하는 호위무사든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것은 진정으로 위험에 닥치기 전의 소리였다. 만약 누군가 정말로 봉씨 가문을 겨냥한다면 봉씨 가문은 겉보기엔 멀쩡한 호원들로 안전을 지키기 힘들었다. 특히 훈련을 잘 받은 암위나 사사를 만난다면 말이다.
능묵은 말없이 문 앞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표정과 얼굴에는 서슬 푸른 한기를 내뿜었다.
그래서 봉형은 또 무시를 당하고 말았다.
‘능 공자의 수행 하인이라 그런가? 둘의 성격이 아주 똑같군. 걸핏하면 남의 말을 무시해.’
봉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전까지 그는 위풍당당한 봉씨 가문의 가주였다.
봉회근이 중독되어 그가 수심에 잠겨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기세를 잃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둘의 앞에서 봉씨 가문의 가주라는 신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벼운 발걸음소리가 문 뒤에서 들렸다. 능묵은 눈썹을 꿈틀하더니 고개를 돌리고 열린 방문을 보았다. 그러자 창백한 낯빛의 야홍릉이 나타났다. 그는 흠칫 놀라며 물었다.
“주인님!”
야홍릉은 안색이 창백했고 이마에는 약간의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지쳐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싸늘함이 많이 옅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능 공자, 괜찮나?”
봉형은 이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회근이는 어떻나?”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반 시진 뒤이면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그는 방으로 돌아갔다.
“봉 가주께서는 안으로 들어가 보셔도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봉형은 서슴없이 방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앞에 선 채, 누워 있는 아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시커멓던 얼굴에 검은 기운이 다 빠진 상태였다.
봉회근은 안색이 창백할 뿐, 다른 문제점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하던 봉형은 드디어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주인님.”
능묵은 시녀에게서 찻주전자를 받아서 차를 따라 야홍릉의 앞에 있는 탁자에 올려놓았다.
야홍릉은 안방 밖에 놓인 탑에 기대어 앉아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지시를 내렸다.
“금란원의 시녀에게 전하거라. 점심때에 약을 달이겠으니 화로를 준비하라고 해라.”
“내가 지시를 내리겠네.”
봉형이 안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리고 능묵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자를 잘 모시게. 내가 먼저 점심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겠네.”
능묵과 야홍릉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봉형은 그들의 말없는 응대에 익숙해졌다. 그들이 반대하지 않으면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시녀더러 주방에 말을 전해 풍성한 음식을 준비하라고 했다.
능 공자를 제대로 대접할 생각이었다.
시녀는 그의 말을 듣고 주방으로 갔다.
능묵은 말없이 야홍릉의 옆에 서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주인님의 상처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상처를 치료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