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조건이 무엇입니까?
금란원은 고요하기 그지없었으나 이따금씩 불어오는 미풍에 꽃향기가 섞여 있어 기분이 좋았다.
밝은 달이 뜨자 은빛 달빛이 마당에 쏟아졌다. 조용하던 마당은 순식간에 은색으로 물들었다.
눈을 내리깔고 서 있는 능묵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급히 그 장면을 잡고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으나 마음속으로부터 드는 불안한 느낌에 그 장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능묵 공자.”
소년의 침착한 목소리가 능묵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그는 고개를 들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봉씨 가문 삼공자 봉여희가 멀지 않은 화랑의 돌계단에 서 있었다. 그는 말쑥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시선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능묵을 떠보듯 훑어보며 물었다.
“능 공자는 동제 사람이오?”
능묵은 차가운 얼굴로 그를 힐끗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질문을 듣지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봉여희는 포기하지 않고 또 물었다.
“능묵 공자도 성이 능씨요?”
능묵은 말을 하지 않았으나 시선으로 소름 끼칠 만한 한기를 내뿜었다. 깡마른 그의 몸은 날카로운 검처럼 함축적이나 강한 힘이 담겨 있는 듯했다.
봉여희는 흠칫 놀랐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이 그의 머리에서 드리워져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조금씩 흘러갔다.
공기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곧 여름이 되는 날 밤이었지만 봉여희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능묵은 시선을 들고 위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그의 눈동자에 예리한 한기가 스쳐 지났다. 그는 검집에서 나온 칼처럼 번개같이 날아갔다.
봉여희는 눈앞에 뭔가가 휙 하고 날아가는 것만 보았지, 무슨 일인지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바로 들려오는 누군가의 비명에 그는 흠칫 놀랐다.
주변의 공기마저 음산하고 위험하게 변한 것 같았다.
신음이 연속 두 번 들리자 두 사람은 줄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더니 정자에 털썩 떨어졌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두 흑의인은 피를 뿜었다. 그들은 반항도 전혀 못 해보고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봉여희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상황이 끝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그는 급한 발걸음으로 흑의 자객의 옆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은 뒤, 살펴보았다. 그는 봉씨 저택에 자객이 잠입한 것에 놀랐고 능묵의 빠른 솜씨와 강한 실력에 놀랐다.
너무 빨라서 그는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두 흑의인은 옷차림으로 보면 분명 자객인데 왜 지금 금란원에 잠입한 거지? 목적이 뭐지? 큰 형님을 죽이려고?’
그러나 그건 아닌 듯했다.
봉회근은 중독되어 침대에 드러누운 지 거의 스무날이 되었다.
그동안 한 번도 자객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밤 능 공자가 오자마자 자객을 보냈다고? 혹시 능 공자를 죽이러 온 사람이 아니야? 아니면 누군가 능 공자가 큰형님을 치료하려는 줄 알고 불안해진 건가?’
봉여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속으로 불안한 느낌이 스멀스멀 들었다.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방문의 방향을 보니 능묵이라는 소년이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입은 검은 옷은 어두운 밤과 하나로 어우러졌고 시선에 담긴 싸늘함은 사람들이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소년은 나이가 많지 않았으나 홀로 만 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
봉여희는 잠깐 침묵하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금란원을 떠났다.
그리고 직접 주원의 서재로 가서 방금 전에 있은 일을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이 소식을 들은 봉형은 놀라고 두려워 다급히 장부책을 내려놓고 금란원에 도착했다.
그는 금란원에 들어서자마자 흑색 장포를 입은 능묵이 방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멀지 않은 정자 밖에는 시체 두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분명 방금 전에 살인사건이 일어났지만 금란원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고요했다.
봉형은 미간을 찌푸리고 앞으로 다가가 문 앞에서 곧게 서 있는 능묵을 바라보았다.
“능묵 공자, 이 둘은 자객인가?”
물론 이는 쓸데없는 말이었다.
봉형은 쓸데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 물어본 것이었다.
능묵은 그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싸늘한 자세였다.
“능야 공자는…….”
봉형은 망설이다가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방안에 있나?”
능묵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묵인한 듯한 표정이었다.
봉형은 미간을 찌푸리고 널브러져 있는 흑의 사체를 보더니 화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구석에서 흑의를 입은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지시를 기다렸다.
“저 두 자객의 신분을 알아보거라.”
봉형은 화를 참으며 말했다.
“자객이 수비를 뚫고 잠입했다. 너희들은 그동안 뭘 한 것이냐?!”
흑의인은 무릎을 털썩 꿇었다.
“지금 바로 알아보거라!”
봉형은 명령을 내렸다.
“금란원 안팎에 수비를 더욱 강화하거라. 오늘과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난다면 너희들을 남겨두지 않을 것이야!”
흑의인은 지시를 받고 바로 물러났다.
봉형은 깊게 한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차갑게 말했다.
“여희야.”
“네, 아버지.”
옆에서 말없이 있던 봉여희가 대답했다. 그의 자세는 아주 공손했다.
“제가 방금 살펴본 바로는 이 둘의 차림이 일반 호원 같지 않았습니다.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사사 같습니다.”
‘사사?’
봉형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의 시선에 큰 소용돌이가 치더니 두 손을 꽉 잡고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사사가 우리 집에 쳐들어왔다고?’
“아버지, 화내지 마십시오.”
봉여희가 차분하고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
“제 판단으로는 자객의 배후 지시자가 능 공자를 겨냥한 것 같습니다.”
봉형은 미간을 찌푸렸다.
“능 공자를 겨냥했다고?”
“네.”
봉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형님이 중독된 지 열흘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신의가 다녀갔지만 해독에 성공한 사람은 없었지요. 그러나 큰형님은 여태까지 목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객이 쳐들어온 적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능 공자가 오자마자 자객이 찾아왔습니다. 제 생각에는 누군가 몰래 큰형님의 상황을 지켜보다가 능 공자가 정말 큰 형님을 치료할 것 같으니 나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능야를 겨냥했다는 말도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자객이 봉회근을 치료하려는 사람을 겨냥했다는 게 맞았다.
결국 목적은 봉회근이 완쾌되지 못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봉형은 침묵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치미는 울화를 간신히 참고 있었다.
누구를 겨냥한 것이든 상대의 목적은 봉회근이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능묵은 옆으로 자리를 비켰다. 봉형과 봉여희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에서 나온 능 공자는 천년 설산의 눈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름다우나 가슴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용모를 가진 소년이었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능묵, 여기서 지키고 있어. 절대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능묵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네.”
“능 공자, 회근이는 어떻게 되었나?”
봉형이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그 아이는…….”
“봉회근은 때가 되면 깨어날 것이니 봉 가주께서는 더 묻지 마십시오.”
야홍릉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봉 가주께서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시지 마시고 누가 자객을 보내며 봉회근을 해치려 했는지나 잘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봉여희는 감정의 기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을 듣자 저도 모르고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봉령의 말이 맞았다.
능 공자는 성격도 좋지 않고 차가워 다가갈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를 대할 때도 전혀 조심스러운 느낌이 없었다.
이런 인물은 신분이 고귀하거나 배경이 강하거나 실력이 강하거나 셋 중 하나였다.
봉여희는 또 생각에 잠겼다.
‘이 능 공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능 공자의 말이 맞네.”
봉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화난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어느 자식이 우리 회근이를 해치려고 하는지 알아보아야겠네.”
“전 이곳에 나흘만 있을 겁니다. 그 말은 이 나흘 동안만 다른 사람들이 봉회근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야홍릉이 말했다.
“나흘 뒤 봉회근이 깨었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만약 봉씨 가문을 해치려고 한 인물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봉회근은 계속 목에 칼이 겨눠진 채로 살아가는 셈일 겁니다.”
봉형은 이 말을 듣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능 공자에게 단서가 있나?”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소매를 걷더니 싸늘한 목소리고 느긋하게 말했다.
“전 해독만 하지 다른 것은 관심 없습니다. 만약 봉 가주께서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드릴 수는 있으나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은 잘 아시겠지요?”
그 말을 들은 봉형은 속으로 계산했다.
나흘의 시간 동안 그는 뭔가를 알아낼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봉회근에게 독을 사용한 사람은 동제 황족의 권력 다툼과 연관되어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진실을 밝혀내기 더욱 힘들 것이다.
그러나 봉회근의 안위는 봉씨 가문의 존망과 연관되어 있어 그는 절대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결국 봉형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능 공자의 조건은 무엇이지?”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봉형이 이토록 깔끔하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침묵을 지킨 뒤, 그녀는 입을 열었다.
“봉 가주와 상의할 게 있습니다.”
봉형은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서재로 갑세.”
야홍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함께 봉 가주의 주원으로 걸어갔다.
봉여희는 금란원에 남아 봉회근의 방문을 지키고 있는 능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달이 휘영청 뜬 밤이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밤바람에 향긋한 꽃 향기가 섞여 있었다.
구불구불한 회랑을 건너 주원으로 가는 길에는 등불이 여러 대 있었다.
따뜻하게 보이는 불빛은 소년의 차가운 외모가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눈매에 남아 있는 서늘함은 여전했으나 소년의 얼굴은 진실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남자치고 심각하게 고운 얼굴이었다.
봉형은 마음속의 추측을 내려놓고 입을 열어 정적을 깼다.
“능 공자는 동제 황족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아나?”
‘동제 황족?’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전생에 들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전 동제에 대해 잘 모릅니다. 어린 황제가 곧 몸소 정사를 볼 때가 되니 섭정왕이 대권을 내놓기 싫어한다는 정도로만 알지요…… 그리고 그 숙질(叔姪)은 곧 치열한 내전을 맞이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