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아주 시끄럽군
봉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시선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능 공자의 본모습을 파헤치려고 일부러 음식에 다른 것을 추가해 넣었소.”
봉청서는 말없이 밥을 먹는 소년을 바라보며 짐짓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능 공자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능 공자가 정말 해독하는 능력이 있는지 떠보기 위한 것이니, 날 원망하지 않겠지?”
야홍릉은 느긋하게 탕을 마셨다. 그녀는 봉청서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탕을 마시는 그녀의 행동은 우아하고 점잖아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세가의 귀공자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봉형은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능 공자.”
봉청서는 그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왜 아직도 먹고 있는 것이오? 내 말이 거짓말 같소?”
“봉청서.”
야홍릉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주 시끄럽군.”
‘뭐라고?’
봉청서는 표정이 굳었다.
“밥 먹는데 기분이 잡치게.”
야홍릉은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봉형을 바라보았다.
“두 분이 제 의술을 믿지 못하시니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시죠.”
봉형은 당황했다.
그러나 봉청서는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능 공자, 아직도 연기를 하는 것이오? 아버지가 그리 만만해 보이시오?”
“봉 공자가 음식에 독을 넣었으나 내가 잘 먹고 있지 않았소? 당신의 눈이 먼 것이오?”
야홍릉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소름끼치는 한기가 느껴졌다.
“봉 가주께서 제 의술을 믿지 않으시니 거래를 계속할 수 없겠습니다. 봉회근을 치료할 다른 사람을 알아보십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소매에서 은자 한 덩어리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이건 밥값입니다.”
봉형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능 공자…….”
“능묵, 행낭을 챙기거라.”
야홍릉은 싸늘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이만 가자꾸나.”
능묵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가 행낭을 챙겼다.
“능 공자, 지금 뭐 하는 건가?”
봉형은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말을 건넸다.
“청서가 철이 없어 무례한 짓을 벌였구려. 내가 대신 사과하겠으니 능 공자가 너그럽게 봐주시게.”
말을 마친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청서야, 얼른 능 공자에게 사과하거라.”
그러나 봉청서는 방금 야홍릉이 한 말에 표정이 확 굳어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그더러 사과까지 하라고 하자 그는 난감한 얼굴로 망설였다.
“아버지…….”
“얼른 사과해!”
봉형이 강한 어조로 호통쳤다.
“아닙니다.”
야홍릉은 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전 그 사과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봉씨 가문에 잘못 온 듯하군요. 두 분, 이만 실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그녀가 말을 마칠 때쯤 능묵도 행낭을 멘 채, 방에서 나왔다.
정말 떠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봉형은 당황하며 최대한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능 공자가 회근이의 독을 풀어주려고 온 것이니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일 게 아닌가? 청서의 일은 그냥 넘어가 주시게.”
그리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내 진심으로 능 공자에게 사과하겠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을 약속하네.”
“봉 가주께서는 제가 이 약속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야홍릉이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서로 믿음이 없다면 거래를 계속할 이유가 없지요.”
그 말을 들은 봉형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바로 야홍릉을 달랬다.
“능 공자, 화를 푸시게.”
“아버지, 왜 이런 인간에게 굽신거리는…….”
“닥치거라! 얼른 나가!”
봉형이 버럭 호통쳤다.
봉청서는 당황하여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곧 아버지의 말대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잠시만.”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방금 2공자는 이 음식의 독은 치명적이지 않다고 하셨소. 그렇다면 이 음식을 다 먹어 보시오.”
봉청서는 고개를 돌리고 실눈을 떴다.
“뭐라고?”
“눈이 먼 것이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오?”
봉청서를 바라보는 야홍릉의 어두운 눈빛에서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봉청서도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이 음식을 다 먹으면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겠소.”
봉청서는 이를 꽉 악물었다.
“선을 넘지 마시오…….”
“이것이 제 부가 조건입니다. 봉 가주, 제 요구가 과합니까?”
과하지 않았다.
봉형은 이 소년이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소년의 자신감과 분위기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이런 성미의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았다.
그런데 봉청서가 건드렸으니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청서야.”
봉형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능 공자의 말대로 하거라.”
봉청서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봉형은 싸늘하게 덧붙였다.
“능 공자가 네 형님의 목숨을 구하는 게 싫지 않다면 말이다.”
봉형은 사고를 친 봉청서가 스스로 뒷수습을 하기 바랐다.
‘형을 구하기 싫냐고?’
봉청서의 눈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쳐 지났다.
사실 가능하다면 그는 봉회근의 목숨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봉형에게는 아들이 세 명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서자인 두 아들을 합해도 적자인 봉회근의 발치에도 못 미쳤다.
가능하기만 한다면 봉형은 망설이지 않고 봉청서의 목숨으로 봉회근을 살릴 것이다.
게다가 봉청서가 직접 음식에 들어간 독이 치명적이지 않다고 했으니 망설일 것이 뭐가 있겠는가?
“제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야홍릉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싸늘했다.
봉형은 굳은 얼굴로 봉청서를 노려보았다.
봉청서는 안색이 여러 번 바뀌더니 결국 입술이 터지도록 깨문 뒤에야 식탁에 앉았다. 그는 기계적으로 능묵이 사용했던 젓가락을 들고 차에 씻은 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표정이 어둡고 동작이 딱딱했다. 마음속으로 가라앉힐 수 없는 울화가 치밀었다.
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야홍릉은 말없이 문 앞에 서서 봉청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기가 감도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능묵, 여기서 2공자를 지켜보아라.”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봉청서는 표정이 굳었다.
그는 젓가락을 꽉 움켜쥐고 음산한 시선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봉 가주, 이만 돌아가시지요.”
야홍릉은 안방으로 돌아가 탑 위에 앉으면서 말했다.
“저녁에 대공자를 치료하러 가겠습니다.”
봉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더 이상 야홍릉이 정말로 봉회근의 독을 풀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았다. 이건 더 의심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청서가 직접 음식에 독을 넣었다고 했어. 색도 없고 향도 없어 발견하기 어려운 독을 넣었다고 했는데 소년과 하인은 먹어도 아무렇지 않잖아? 게다가 능야의 자세는 처음부터 차갑고 도도했지. 정말 실력이 강한 게 아니고 연기라면 절대 이렇게 자신만만할 수 없어.’
게다가 추가 조건으로 내건 것이 봉청서더러 음식을 먹으라는 것일 줄은 봉형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야홍릉이 이번 기회에 그에게서 다른 것을 더 뜯어낼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야홍릉은 그러지 않았다. 이 점에서 봉형은 능야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능 공자도 쉬시게.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네. 방금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부디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청서야.”
봉형은 고개를 돌리고 봉청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더는 능 공자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말아라. 안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봉청서는 젓가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아버지.”
봉형은 돌아서서 떠났다.
능묵은 자리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봉청서가 음식을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표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야홍릉은 말없이 창가에 앉아 간만에 머리를 비우고 정원과 화랑의 양측에 자란 식물들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린 뒤의 식물들은 더욱 파랗고 생기가 넘쳤다.
시간이 조금씩 흘렀다. 방은 봉청서가 음식을 먹으면서 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봉청서의 표정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그는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꽉 잡은 채, 가슴팍을 움켜쥐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능묵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음식을 아직 채 먹지 못했으나 봉청서는 오장육부에 경련이 일며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결국 그는 잡고 있던 젓가락도 놓치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몸을 한껏 웅크렸다.
야홍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끌고 나가거라.”
능묵은 고개를 숙여 대답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봉청서를 끌고서 밖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밖에서 돌아온 그는 안방에 들어가 메고 있던 행낭을 벗어 두었다.
그리고 홀가분한 자태로 침대 앞에 잠깐 서 있다가 돌아섰다. 그는 말없이 창가에 앉은 야홍릉을 바라보더니 눈을 내리깔고 다가왔다.
그는 야홍릉의 뒤에 걸어가 말없이 서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항상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는 다른 표정이 드리웠다.
아주 미세하긴 하나 확실했다.
이때, 한 시녀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능 공자의 짜증을 돋울까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 * *
봉씨 가문 우향원(禹香苑).
청색 장포를 입은 소년이 나무 아래에서 검술을 익히고 있었다. 훤칠하고 마른 몸매에 강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그가 휘두른 검에 흙과 낙엽이 함께 흩날렸다.
“셋째 오라버니.”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녹색 긴 치마를 입은 소녀가 화랑으로 걸어왔다. 발걸음이 전보다 훨씬 빨라진 듯했다.
소년은 그 목소리를 듣더니 고개를 돌리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무덤덤하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었다.
“막내가 여기에는 어쩐 일이냐?”
봉령은 치맛자락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정원의 나무 아래로 가서 주변을 둘러보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큰 오라버니가 나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소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네, 정말이에요.”
봉령은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또 할 말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