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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56)화 (5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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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그냥 먹거라

봉령이 입을 열었다. 얼굴이 상기된 그녀는 초조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공자의 일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나요?”

야홍릉은 다시 한번 덤덤한 어조로 반복했다.

“무슨 일이오?”

“집사에게서 저택에 한 공자가 오셨는데 큰 오라버니의 독을 풀어줄 수 있다고 들어서 보, 보러 왔어요.”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곧 침착함을 되찾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해된 것이라면 죄송해요. 공자께서 양해해 주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아주 예의 바르게 무릎을 살짝 굽혔다.

“아니오. 봉회근은 걱정할 것 없소. 다른 용건이 없다면 돌아가시오.”

야홍릉이 말했다.

봉령은 선 자세로 한참 있다가 잠시 뒤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사양하지 말고 말씀하세요.”

“고맙소.”

야홍릉이 대답했다. 그리고 예의 바르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도와줄 건 없소.”

봉령은 침묵을 지키다 또 물었다.

“큰 오라버니가 언제 깨어날 수 있는지 여쭤도 될까요?”

“이 문제는 댁 아버님께 이미 말씀드렸으니 더 반복할 생각이 없소.”

야홍릉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였으니 봉 낭자는 이만 돌아가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봉령은 초조한 얼굴로 다급히 따라갔다.

“공자!”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오?”

“전…….”

봉령은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라 쑥스러움을 많이 탔다.

그녀의 얼굴은 또다시 빨갛게 상기되었다.

“죄, 죄송해요. 전 그냥…….”

“능 공자, 너무 잘난 척하는 거 아니오?”

이때, 옆에서 한 남자의 언짢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젊은이가 정말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는군.”

봉령과 야홍릉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화랑에서 걸어왔다.

그는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했으나 눈빛에는 불만을 담고 있었다.

봉씨 가문의 차남 봉청서였다.

야홍릉은 그가 아버지에게 혼나고서도 이렇게 빨리 또 와볼 줄 몰랐다.

“당신이 정말 형님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해도 공짜는 아니지 않소? 통 크게 가문의 재산 이 할을 요구했으면서 지금은 그런 자세로 봉씨 가문의 아가씨를 상대하는 것이오? 의원이 이래도 되는 거요?”

그의 강한 어조로 야홍릉을 꾸짖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이 곤경에 처한 틈을 타 큰돈을 요구한 것에 불만인 듯했다.

봉령은 미간을 찌푸렸다.

“둘째 오라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능 공자에게 무례하게 대하지 말아요.”

“능 공자?”

봉청서는 차갑게 웃었다. 그의 눈은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로 공자가 맞는지, 아닌지 알 게 뭐야? 강호의 유명한 신의들도 치료할 수 없었던 독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이가 무슨 수로 치료한다고 그래? 목숨을 잃을 것도 모르고 허풍을 크게 떤 거겠지.”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마른 몸매에서 나오는 행동은 모두 하나같이 차갑고 도도했다.

봉청서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자세였다.

봉청서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를 이를 악문 뒤,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잘난 척하는 건가?”

봉령은 미간을 찌푸리고 언짢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둘째 오라버니, 너무 무례하셨어요. 저분은 손님인데다 큰 오라버니를 치료하러 오신 의원이세요. 그런데 이런 태도로 대하시면 되겠어요?”

봉청서는 표정이 굳었다.

“령아야, 넌 왜 다른 사람의 편을 들고 그래? 저자가 날 어떻게 대했는지는 보지 못했어?”

봉령이 말했다.

“오라버니가 먼저 무례하게 구셨잖아요.”

‘능 공자는 오라버니를 상대하지도 않았잖아?’

봉청서는 표정이 변하더니 말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네가 능 공자의 역성을 드는 건 저자가 형님을 치료할 수 있어서야? 아니면 저자가 잘생겨서 그러는 것이야?”

봉령은 당황하더니 화를 버럭 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는 언짢은 얼굴로 홱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봉청서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알 수 없게 변했다.

‘능 공자? 능 공자 좋아하네.’

그는 야홍릉의 방을 차갑게 노려본 뒤, 다시 돌아갔다.

약재를 사서 돌아오던 능묵은 봉청서와 화랑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넌 이름이 무엇이냐?”

봉청서는 그의 앞길을 막고 시선을 약꾸러미로 돌렸다.

“이게 무슨 약이냐? 어디 보자.”

말을 마친 그는 능묵이 든 약꾸러미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능묵은 손을 들고 피해버렸다.

그리고 잽싸게 옆으로 지나갔다.

그의 행동은 야홍릉과 똑같이 차갑고 단호했다.

봉청서는 화가 나 표정이 굳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거기 서라!”

‘하인 주제에 이렇게 나한테 무례하게 굴어?’

그러나 소년의 훤칠한 몸은 곧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봉청서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일그러진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주인님.”

능묵은 방으로 들어와 공손하게 말했다.

“약재를 사왔습니다.”

야홍릉은 알겠다고 했다.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느긋하게 풀어져 있었다.

야홍릉을 따른 지도 시일이 꽤 되는지라 능묵은 그녀의 이런 자세가 생각에 잠긴 자세라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약재 꾸러미를 내려놓고 야홍릉의 등 뒤로 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제가 배운 게 좀 있는데 피로를 풀어드릴 수 있습니다.”

야홍릉은 눈을 뜨고 평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배운 게 좀 있다고?”

능묵은 고개를 숙였다.

“네.”

야홍릉은 바로 눈을 감았다.

“그럼 어디 한 번 해보아라.”

“네.”

능묵은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그녀의 귀밑머리 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힘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고 딱 좋아 아주 시원했다.

반 시진 뒤, 시녀는 식사 준비를 마치고 들어와 알렸다.

야홍릉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두 시녀가 음식을 차리는 모습이 보였다.

고기 요리와 야채 요리가 적절하게 섞여 있는 것이 아주 맛있어 보였다.

“능 공자, 식사하세요.”

시녀는 허리를 살짝 굽히고 물러갔다.

능묵은 말없이 식탁으로 다가가 윤기 나는 음식을 바라보았다.

일일이 둘러보던 그의 시선은 결국 전복찜에 닿았다.

그는 손을 뻗어 전복찜을 옆에 두고 눈을 감은 뒤, 냄새를 맡았다.

잠시 뒤, 그는 눈을 뜨고 황금빛으로 튀겨진 새우살을 집었다.

식탁에는 또 야채 요리 하나와 산용가자(蒜蓉茄子, 찐 가지에 다양한 양념을 한 요리), 홍소사자두(紅燒獅子頭, 검붉게 익힌 중국식 고기완자 요리)와 갈비탕이 남아 있었다.

찻주전자 하나와 찻잔 두 개도 있었다.

능묵은 찻잔에 차를 따른 뒤, 몸에서 작은 함을 꺼냈다.

그 안에는 길이와 굵기가 서로 다른 은침이 들어 있었다.

그는 가장 짧은 은침을 차에 담갔다. 그리고 다른 은침으로 각 요리에 가져다 댔다.

외관을 관찰, 냄새 맡기, 색깔 살펴보기, 은침으로 검사하기.

신은전의 영위들은 독을 판별하는 기술에 능했다.

네 가지의 요리에 가져다 댔던 은침은 변화가 거의 없었으나 능묵은 은침을 거둔 뒤,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 이 음식들은 모두 드실 수 없습니다.”

“아주 소량의 약물을 넣어 치명적이지는 않으나 오장육부에 통증을 주고 기능을 저하시키며 심지어 환각도 나타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야홍릉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덤덤한 얼굴로 음식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창가 앞으로 걸어갔다.

능묵은 바로 뒤를 따랐다.

“주인님, 제가 밖의 주루에 가서…….”

“됐다.”

야홍릉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때는 이미 비가 멈춘 뒤라 곳곳에서 상쾌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능묵은 시선을 내리깔고 야홍릉의 지시를 기다렸다.

“행낭에 청색 무늬의 청자기 병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꺼내거라.”

능묵은 대답하고 침대 머리맡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행낭을 열어 야홍릉이 말한 청자기 병을 가져왔다.

“열어 보아라.”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하였다.

병뚜껑을 뽑은 순간,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능묵은 흠칫 놀랐다가 곧바로 뒤돌아서서 야홍릉의 앞으로 걸어갔다.

“주인님, 구전해독단(九轉解毒丹)입니까?”

구전해독단은 아주 고가의 약으로 흔히 보는 여러 가지의 독을 다 막을 수 있었다. 한 알도 가격이 어마어마하여 궁의 어약방(禦藥房)에서도 보기 힘들었다. 이 해독단을 먹으면 수많은 독에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맞다. 한 알 꺼내 먹어라.”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능묵은 시선을 들고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내가 잘못 들었나? ……잘못 들었겠지.’

“어서.”

야홍릉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밖에 선 아리따운 두 여인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좋은 음식을 낭비할 수야 없지 않느냐?”

능묵은 그제야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주인님.”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구전해독단은 가격이 엄청납니다. 제가 어찌…….”

그의 목숨도 구전해독단 한 알에 미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음식 한 끼가 무슨 대수겠는가?

야홍릉은 시선을 돌리고 평온하나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이냐?”

능묵은 표정이 변하더니 무릎을 털썩, 꿇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는 것이냐?”

야홍릉은 말을 마친 뒤, 식탁에 마주 앉았다.

“해독단을 먹고 이리 와서 밥을 먹거라.”

능묵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공손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청자기 병에서 해독단 한 알을 꺼내 입에 넣고 다시 병을 행낭에 넣었다.

식탁으로 걸어와 야홍릉의 옆자리에 앉은 능묵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이 해독단으로 봉회근의 독을 치료하실 건가요?”

“아니.”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봉회근은 독에 당한 게 아니라서 해독단이 소용없을 것이다.”

능묵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음식을 다시 가지런히 놓은 뒤, 야홍릉에게 젓가락을 넘겨주고 음식을 집어 주었다.

그리고 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능 공자.”

문밖의 정원에서 봉청서는 계단을 올라와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온화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주방의 음식이 입에 맞나 궁금해서 와 봤소.”

‘하루에 세 번이나 오다니. 정말 끈질기군.’

야홍릉은 어두운 얼굴로 밥을 먹으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소.”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가벼운 비웃음이 들렸다.

“아버지, 능 공자가 음식의 맛이 괜찮다고 합니다.”

봉청서는 고개를 돌리고 함께 온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공손했으나 눈빛은 의기양양했다.

“제 말이 맞지요? 이 능 공자라는 인간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사기꾼입니다. 해독법을 아예 모르지요. 형님을 치료한다는 핑계로 돈이나 뜯어내려고 온 게 분명하니 아버지께서는 절대 이자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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