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궐황도 (55)화 (56/301)

16648799281056.jpg 

55화 똑같은 일이 일어나다

능야를 알아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봉형은 입을 열었다.

“능 공자, 금란원의 서쪽 객실에 묵는 게 어떤가?”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깨끗하기만 하면 됩니다.”

봉형은 웃으며 말했다.

“매일같이 시녀가 청소했으니 깨끗할 것이네.”

대공자가 묵는 금란원이기에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도 매일 깨끗하게 청소했다.

“능 공자의 수행 하인은…….”

봉형은 고개를 돌리고 그림자처럼 능야의 옆을 따라다니는 흑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모실까?”

‘둘이 같은 방에 묵으려나? 아니면 다른 방을 마련해 줘야 하나?’

“저와 함께 묵으면 됩니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봉형은 흠칫 놀랐다.

능야의 말에서 그는 이 수행 하인의 신분도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알겠네.”

이렇게 거래가 성사되었다. 깔끔하고 단호한 처리방식은 그전에 봉형이 상업계의 사람들과 시간을 끌며 가격을 따지던 것과 아주 달랐다.

봉회근의 목숨이 달려 있기에 그는 시간을 끌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소년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정말 치료에 성공하여 봉회근이 깨어난다면 목국 서남쪽의 사업과 마장을 넘겨준다고 해도 아쉽지 않았다.

대가는 크나 일시적인 손실일 뿐이었다.

나중에 천천히 다시 돌려받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능 공자의 의술을 믿고 있네. 그래서 제염과 제철 사업, 그리고 마장으로 회근이의 목숨을 살리고 싶네.”

그는 시선을 들어 소년을 바라보며 담담하나 강한 어조로 말했다.

“능 공자와 약속했으니 우리 봉씨 가문이 사람을 놀리는 곳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겠지. 그러나 만약 회근이의 병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절대 좋게 끝나지 않을 것이네.”

봉씨 가문은 상업계에서 패자로 통하고 있었다.

동제에서 권력이 가장 큰 섭정왕 영위까지 등에 업고 있으니 봉씨 가문의 가주는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인물이었다.

만약 적자 봉회근의 목숨이 위험한 시기가 아니었으면 그는 절대 나이 어린 소년이 그에게 조건을 내걸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봉회근 때문에 봉형은 이토록 화를 가라앉히고 상대방이 내건 조건을 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봉회근이 깨어나고 완치된다는 것이 전제였다.

만약 저 차가운 소년이 봉회근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봉형은 소년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이 봉씨 가문의 영역은 아무나 왔다가 가고 싶을 때 가는 곳이 아니고 봉 가주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해 능야,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봉형은 곧 그녀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바로 금란원의 서쪽 별실이었다.

봉회근을 치료하는 데 편리하게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아 준 것이다.

“능 공자는 먼저 쉬시게. 하인을 시켜 점심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겠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쪽 별실로 들어갔다.

능묵은 그런 야홍릉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봉형은 영리하고 일 잘하는 두 하녀를 시켜 서쪽 별실에 들어가 시중을 들게 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떠나려고 할 때, 소년의 차갑고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봉 가주께서는 제가 한 말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봉형은 발걸음을 멈추고 뭔가를 물으려고 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택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능야가 한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약에 관한 것과 그의 신분을 알아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다 자잘한 것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시게. 난 회근이의 목숨으로 장난치지 않는다네.”

그래서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나도록 내버려 두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야홍릉은 창가에 서서 창밖의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화초와 나뭇잎에 비가 내려앉아서 투명하게 빛나 보였다.

이때, 한 시녀가 차를 타서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올렸다.

“공자, 차 드세요.”

능묵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녀를 힐끗 보고 시선을 돌려 탁자에 놓인 자사(紫砂)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다가가 찻잔에 차를 따랐다.

“나가 보아라.”

시녀는 예를 올린 뒤, 방을 나갔다.

“주인님.”

능묵은 야홍릉의 뒤에서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서 있었다.

“봉회근은 중독된 게 아니라…….”

“알고 있다.”

야홍릉은 기분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다 그가 독에 당한 줄로 알고 있지. 허나 자칭 의술이 고명하다는 명의들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인데 그게 어찌 일반적인 독이겠느냐?”

명의가 치료할 수 없는 독이라고 하나 강호에도 고수가 많았다.

그중에서 독을 치료하는 데 뛰어난 고수도 많을 텐데 지금까지 봉회근의 독을 치료한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 누구도 봉회근이 어떤 독에 당했는지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일은 아주 이상하다 볼 수 있었다.

야홍릉은 무공이 강하고 병사를 이끄는 데 능하다고 해도 의술이나 해독하는 것에는 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봉회근이 누구에게 당했는지, 봉회근을 해친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저지른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그녀가 아직 전쟁터에 있을 때, 야소숙과 동제의 어린 황제 영린은 손을 잡고 동맹을 결성한 적이 있었다.

동제의 궁에는 무술(巫術, 무당처럼 귀신을 부린 기술)에 능한 남자가 있었다. 영린은 봉회근이 섭정왕의 저택에 갔을 때, 그 남자를 시켜 남몰래 봉회근에게 고독(蠱毒)을 심어 두었다. 당분간은 발작하지 않기에 들킬 일도 없었다.

고독이 효과를 보는 시간도 남자가 조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린은 고독을 치료하는 방법을 야소숙에게 알려 주었다.

목국의 3황자는 신분을 숨기고 봉씨 가문에 찾아가 봉회근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봉씨 가문의 딸 봉령(鳳靈)은 3황자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야홍릉이 한옥금에게 살해당하던 해에 봉령은 야소숙의 측비가 되었고 그로 인해 봉씨 가문의 재산 반 이상은 야소숙에게 통제당하게 되었다.

봉씨 가문은 동제 섭정왕 영위가 있어 측비의 자리를 하찮게 여겼다. 그러나 야소숙은 준수한 외모에 점잖은 척, 가식을 떨며 짧은 며칠 사이에 어린 봉령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래서 봉령은 야소숙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난리를 친 것이었다.

그러나 봉씨 가문은 상인이기에 정실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황제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야홍릉이 전쟁터에서 5년간 세운 공과 봉씨 가문의 엄청난 재산은 모두 야소숙이 황위를 꿰찰 힘이 되었다.

한편, 동제의 섭정왕 영위와 어린 황제의 싸움 역시 점점 치열해졌다.

야홍릉은 동제의 국세에 대해 잘 몰랐지만 야소숙의 도움으로 영린이 영위를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생은 좀 다를 줄 알았으나 변방의 전쟁터에 있는 야소숙은 여전히 영린과 협력을 맺었다. 봉회근이 중독되어 쓰러졌다는 것은 야소숙이 전생에 했던 계획을 이번 생에도 똑같이 실시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야홍릉은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야소숙은 언제부터 영린과 손을 잡은 거지? 영린은 올해 열네 살이 채 되지 않았어. 만약 그가 예전부터 이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그럼 영정이 동제를 떠나 목국의 인질이 된 것도 그의 수작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이때, 은은한 차 형이 코끝을 맴돌았다.

야홍릉은 창가에 기대어 능묵에게서 차를 받아 들었다. 그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봉씨 가문의 일이 끝나면 난 동제에 잠깐 다녀오려고 한다. 넌 몰래 영영에게 말을 전해 그더러 야소숙과 동제의 황제 영린의 사이를 파악하라고 하거라. 둘이 주고받는 서신을 가져올 수 있다면 더 좋고.”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야홍릉은 차를 마시다 고개를 돌려 책상에 놓인 필묵을 바라보았다.

“봉회근이 원기를 되찾을 약을 지으려고 한다. 필묵을 준비하거라.”

중독된 것은 아니나 기절한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봉회근은 몸이 아주 허약했다.

깨어난 뒤에도 약을 먹어 원기를 회복해야 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독한다고 했으니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네.”

능묵은 바로 대답하고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책상 앞에 선 그는 종이를 잘 편 뒤, 벼루에 물을 넣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다 마신 뒤,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의원이 아니었으나 황족 출신에 전쟁터에 나가 본지라 귀한 약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봉씨 가문은 돈이 많은 집이기에 봉회근이 쓸 약도 다 좋은 것이었다.

붓을 들고 먹을 묻힌 그녀는 종이에 약재 몇 가지를 썼다.

“이 처방으로 위성(渭城) 풍(馮)씨의 약재방에 가서 약재를 사 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능묵은 처방을 받고 바로 떠나갔다.

야홍릉은 책상 앞의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야소숙과 봉씨 가문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봉회근은 기절한 지 열아홉 날이 되었다.

그가 기절한 지 한 달째 될 때, 야소숙이 위성에 올 것이다. 전생에서 그는 전쟁에 나가지 않았기에 제경을 떠나 볼 일이 있다는 이유로 위성에 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터에 있으니 무슨 핑계를 대서 올까? 아니면 누구를 파견해서 오려나?’

금국과의 전쟁은 그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전쟁할 때 자리를 비운다면 전쟁터에서 탈영한 것인데 그 죄명을 그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가 멍청하지만 않다면 이 시기에 직접 위성에 오지 않을 것이다.

이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공자.”

방금 차를 두고 물러갔던 시녀가 다시 들어와 무릎을 살짝 굽혔다.

“저희 아가씨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야홍릉은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잠깐 침묵을 지킨 그녀는 일어서서 밖으로 향했다.

방문을 나서자마자 야홍릉은 열네댓 살 되어 보이는 소녀가 정원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녀는 자그마한 몸집에 하얗고 동그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맑고 깨끗한 눈에 위로 올라간 입꼬리를 가진 그녀는 웃지 않아도 친절한 인상을 풍겼다.

녹색의 긴 치마는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욱 투명하게 비춰주었다.

야홍릉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소녀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준수하고 차가운 얼굴의 소년을 본 순간, 그녀는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으나 소년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안개가 드리워진 듯했다. 소년은 속세에 물들지 않은 세상 밖의 다른 생명체로 보였다.

차갑고 고귀하여 감히 바라볼 수도, 다가갈 수도 없는 느낌을 풍겼다.

“공, 공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