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내가 고칠 수 있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힐끗 보았다.
“홍릉이가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데 내가 왜 기뻐해야 하느냐?”
“공주가 왜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겠습니까?”
손평은 한숨을 내쉰 뒤,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
“이번에는 감정적으로 행하신 듯합니다.”
경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바로 시선을 내리깔고 침묵에 잠겼다.
‘감정적으로 행한 거라? 야홍릉의 성격상 이런 규칙에 어긋나는 부탁을 한 적이 거의 없지. 몇 번 있었지만 모두 한옥금을 위한 거였고……. 그런데 이번에는 한경백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그 아이는 왜 그렇게 한씨 가문 사람들과 엮이는 걸 좋아하는 거냐?”
손평이 대답했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기로 한경백과 전임 어사 부부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심지어 원한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공주 전하가 진심으로 한경백을 좋아하는 게 맞든, 아니든 그건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한경백은 결국 한씨 가문의 사람이지 않느냐?”
황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러다 나중에 홍릉이가 정말 그한테 마음이라도 생긴다면…….”
‘그러면 한씨 가문과 셋째를 도와주지 않을까?’
“폐하, 제가 한씨 가문의 옛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러면 폐하께서 이런 걱정을 하지 않으실 겁니다.”
손평은 황제에게 차를 따른 뒤, 말을 이었다.
“그때 한서화가 심씨 가문의 자매를 맞이한 일을 기억하십니까?”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구나.”
“한서화는 그때 장원에 급제하고 누이가 입궁까지 하여 인기가 아주 하늘을 찔렀지요. 그러다 심씨 가문의 자매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것을 알게 되고 두 여인을 한 번에 품으려고 했는데…….”
* * *
“야홍릉이 제경을 떠났다고?”
정왕부 주원에서 한 남자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갔다더냐?”
“모릅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은 흑의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저희가 제경을 나선 뒤, 삼십 리 정도 뒤쫓다가 놓쳤습니다. 지금은 공주 전하의 행방을 모릅니다.”
그는 이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선왕부의 사람들도 놓친 듯합니다.”
야정연은 말없이 서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알아보아라.”
짧은 한마디였지만 남자가 야홍릉의 행방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 수 있었다.
“네.”
흑의인, 암위는 공손하게 대답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인.”
그때, 그의 뒤에서 여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빨간색 긴 치마를 입은 여인이 침전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호국 공주가 제경을 떠났나요?”
사내, 야정연은 고개를 돌리고 아름다운 아내의 얼굴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께서는 공주가 떠난 게 그렇게 신경 쓰이시나요?”
정왕비 계완월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야정연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7공주는 여인인데다 병부를 바쳐 전쟁터에도 못 나가는데 왜 그렇게 신경을 쓰세요?”
“떠난 것을 신경 쓰는 게 아니라 행방과 목적이 궁금한 것이지.”
‘행방과 목적?’
계안월은 생각에 잠겼다 입을 열었다.
“전 7공주가 특별한 목적으로 떠난 것 같지 않은데요. 최근 공주에게 심란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나요? 기분 전환이나 좀 하고 돌아오겠죠.”
야정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오?”
계완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잘 몰랐다.
야정연이 왜 이렇게 야홍릉을 신경 쓰는지, 그리고 황제가 야홍릉을 총애하는 건지, 아니면 경계하는지도 말이다.
만약 딸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그러나 아버지가 딸에게 남자를 이렇게 많이 보내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그러면 경계하는가?
그러나 호국 공주는 자신의 능력이 조금 뛰어날 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동맹을 결성하거나 대신들과도 가까이하지 않는 데다가 병권과 군공을 제외하고는 기댈 세력도 없었다.
그런데 뭘 경계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계완월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7공주가 지금 제경을 떠났다면 측부들은 그냥 저택에 남아 있는 건가요?”
측부 얘기가 나오자 야정연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도화산에서 야홍릉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저 잠자리 시중을 드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그는 이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야홍릉이 제멋대로 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야자릉이 ‘야홍릉이 황위를 노린다’는 말을 듣자 더 이상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첩실을 들이는 것은 남자들만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 야홍릉이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가졌으니 충분히 야심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목국은 땅이 넓고 경제가 발전했으며 병력도 강했다.
서쪽 인근 나라는 목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금국(金國)으로, 가장 자주 병사를 발동하여 목국을 치는 나라기도 했다.
목국과 동쪽에 있는 동제(東齊)는 오랫동안 갈등 없이 지내왔다. 현재 동제의 황제가 많이 어린 탓에 섭정왕(攝政王)이 대권을 움켜쥐고 있었고, 그로 인해 동제는 몇 년 전까지 줄곧 내란이 끊이지 않아서 다른 나라와 싸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어렸던 황제는 성장하여 몸소 정사를 보려고 하니 조정의 암투와 갈등이 절정으로 치솟을 때였다. 그러니 다른 나라에 병력을 사용할 실력과 겨를이 더욱 없었다.
사실 수백 년 전만 해도 제국(齊國)은 가장 강한 나라였다. 가장 부강할 때만 해도 지금의 목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나중에 어느 왕이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 형제간 사이가 틀어졌고, 그리하여 동쪽의 삼천 리 되는 땅이 제국에서 분할되어 지금의 동제가 되었다.
당시 동제의 왕은 제국 황족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용(容)씨 성을 영(榮)씨로 바꾸었다.
강대했던 제국은 동제가 떨어져 나간 뒤, 군왕의 실력도 점점 쇠퇴하여 국력과 병력도 나날이 뒤처지게 되었다. 그 뒤로 몇 년간 이어진 내전까지 더해진 제다 동제에게 패배당하기까지 하니, 결국 부유한 성곽 몇 채를 빼앗겨 동제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렇게 동제는 점차 강해졌고 원래 강하던 제국은 점점 쇠퇴해져서 패자의 자리를 놓치게 되었다.
동제와 구분하여 부르기 위해 원래의 제국은 서서히 남제(南齊)라 불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강해지는 동제와 달리, 남제는 예전의 위엄을 되찾지 못했다.
동제의 황제 영화(榮華)는 몸이 좋지 않아 삼 년 전에 두 아들만 남기고 죽고 말았다.
그리고 적황자 영린(榮麟)이 순조롭게 황위를 이어받았다.
다만 영린의 나이가 어린 탓에 황숙(皇叔)인 영위(榮威)를 섭정왕으로 세워야 했다.
지금 목국에 인질로 들어온 영정은 동제의 대황자였으나, 신분이 낮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탓에 계승권이 없었다. 섭정왕은 그가 동제에 남아 있으면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어 새 황제가 등극한 뒤, 황제가 어려서 몸소 정사를 보지 못하는 틈을 타 영정을 목국에 인질로 보낸 것이다.
새 황제에게 받쳐주는 힘이 없이 고립된 상황에서 섭정왕은 천천히 조정 대권을 움켜쥐었다. 동제 전체가 그의 통제 범위에 들어갔다.
대권을 얻은 영위는 곧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었다.
영위가 이렇게 빨리 조정에 자리를 잡고 어린 황제와 대항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동제의 경제를 대부분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병력이 아닌 경제력을 말이다.
영위의 아내는 동제에서 가장 큰 상인인 봉(鳳)씨 가문의 적녀였다.
상인은 신분이 높지 않으나 든든한 재력이 뒷받침해주고 있으니 영위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아내의 친정은 영위가 사적으로 병사를 키우거나 암위, 사사를 훈련하는 데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다.
든든한 재력과 강한 병력을 가지고 있기에 영위는 황제가 성장한 뒤에도 권세가 줄어들지 않고 조정 대권을 움켜쥘 수 있은 것이다.
심지어 황제를 내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고 싶은 야심도 품게 되었다.
어린 황제 영린은 올해 열세 살하고도 육 개월이 되었다. 그가 직접 정사를 볼 수 있기까지 반년밖에 남지 않았다.
시기가 되면 섭정왕이 섭정 대권을 내놓을지, 아니면 반역을 일으킬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이렇게 동제 조정의 국세는 팽팽한 활시위처럼 아주 긴장했다. 조정의 문무 대신들은 모두 긴장한 마음으로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최근 영위의 가장 강한 뒷배인 봉씨 가문에 큰일이 생겼다.
봉씨 가문의 적자 봉회근(鳳懷瑾)이 이상한 독에 걸린 것이다. 의원들이 많이 다녀갔지만 여전히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봉씨 가문 사람들은 이 일로 허둥지둥하며 속을 썩였다.
봉회근의 아버지 봉형(鳳珩)은 은 만 냥을 내걸어 세상의 명의들을 불러 모았다. 아들만 낫게 해준다면 은 만 냥을 제외하고도 요구 세 가지를 들어준다는 파격적인 조건도 걸었다.
봉씨 가문에서 내건 조건은 아주 혹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칭 의술이 높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지만 결국 누구도 해독법을 내놓지 못했다.
불안한 기운이 서서히 봉씨 가문에 드리웠다.
봉씨 가문의 가주 봉형은 평생 장사에 몰두하느라 서른의 나이에 가진 아들을 후계자로 키웠는데, 아들 셋 중 봉회근만이 적자였다.
그는 장차 봉씨 가문의 가주로 되기에 손색이 없는 아이였다.
봉회근에게 일이 생긴다면 그는 이 충격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봉씨 가문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이 점을 잘 알기에 영위는 궁의 태의더러 봉회근을 치료하게 했다. 그러나 태의들도 해독법을 내놓지 못했다.
* * *
유월 초하루 아침.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청색 마차가 봉씨 저택의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흑의를 입은 소년이 내렸다. 소년은 평범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몸이 훤칠하여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소년은 차에서 내린 뒤, 우산을 들고 마차의 문발을 젖혔다. 그리고 우산을 마차 쪽으로 가져갔다.
남장한 소년이 마차에서 걸어 나왔다. 청색 비단 장포를 입은 소년은 깡마른 몸을 하고 있었다.
키는 소년보다 좀 작았으나 용모는 아주 출중하여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소년은 용모가 아름다우나 분위기가 차가웠다. 그의 눈매에는 천성적인 서늘함이 있었고 항상 한기를 뿜었다.
흑의 소년은 우산을 든 채, 청의 소년의 옆에서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청의 소년보다 반걸음 뒤떨어진 채였다. 그가 든 우산도 청의 소년의 머리 위쪽에 고정되었다.
둘은 함께 대문 앞으로 와서 말없이 위쪽의 문패를 바라보았다.
봉씨 저택.
“당신들은 누구요?”
문지기가 걸어와서 언짢은 얼굴로 대문 앞에 선 두 소년을 바라보았다.
“봉씨 저택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얼른 떠나시게.”
청의 소년은 시선을 돌려 평온한 얼굴로 문지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놀랄 만한 말을 하였다.
“나에게 봉회근의 독을 치료할 방법이 있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