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기뻐해야 한다고?
야홍릉이 싸늘한 물음에 감진은 말문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곧 말을 이었다.
“족보에 들어가면 이들 모두 정식적인 명분을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과 혼인할 수 없지요. 전하께서는 이 측부들이 평생 저택에 있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나중에 부마가 될 분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부마의 입장?’
야홍릉은 눈살을 찌푸리고 더욱 차가워진 얼굴로 물었다.
“넌 부마와 무슨 사이라도 되느냐? 지금 네가 너무 많은 일에 간섭한다는 생각은 안 드는 것이야?”
감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부마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제가 어찌 그분과 무슨 사이가 되겠습니까? 전 그냥 공주 전하의 입장에서…….”
“내 입장을 네가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야홍릉은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족보에 들어간들 어떠냐? 내 저택에 들어오기로 마음먹었으면서 나중에 자유를 되찾기 바란다는 것이냐?”
감진은 입을 열려고 했으나 할 말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다물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지는 것이다. 자유를 원한다고? 날 죽일 재주가 있으면 모를까.”
야홍릉은 냉소를 하였다.
“그럴 재주가 없다면 평생 내 측부로 지낼 것이다. 난 너희들을 외면할 수도 있고 평생 찾아가지 않을 수도 있으나 너희는 영원히 황권과 명분의 속박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감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늘 전까지 그는 호국 공주가 차가운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난 그는 야홍릉의 뼛속에 패기가 흘러넘치고 가끔씩 난폭한 모습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말은 이 뜻이었다.
너희는 호국 공주부에 들어오기로 결정한 이상, 앞으로 죽으나 사나 호국 공주부를 떠날 생각은 하지 말라. 난 너희들을 공기처럼 여기며 무시할 수 있으나 너희들은 영원히 공기처럼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게 왜 들어왔느냐?
이런 선택을 했으면 결과를 감당할 준비는 했어야지.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말의 진정한 뜻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운명을 명확하게 얘기해 주었다.
감진은 침묵했다. 문득 제 무덤을 판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 * *
또 이틀이 지났다. 한경백은 야홍릉의 분부대로 한 부인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
그가 어산서원으로 가서 사보직을 맡고 싶으니 아버지의 추천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한 부인이 그를 어산서원에 들어가게 해준다면 심씨 가문이 구족을 멸하지 않게 호국 공주에게 사정해 보겠다고 했다.
심씨 가문 사건의 진실은 이미 낱낱이 드러났다.
대리시경은 모든 증거를 형부에 보냈다. 이튿날 조조에서 형부상서가 증거를 황제에게 보낸다면 심씨 가문의 죄명과 처벌 방식이 선포될 것이다.
황제가 입을 연다면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이 시기는 한경백이 조건을 내걸기 최적화된 시기였다. 한서화가 거절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무슨 방법을 사용해 그를 어산서원에 들여보낼지 한경백은 관심이 없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고 했다. 한씨 가문 또한 권세가 예전 같지 않긴 해도, 한경백을 원하는 위치에 넣을 정도로 충분히 힘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나신도 자신의 장군부로 돌아왔다. 봉우가 그를 보러 장군부에 오자 둘은 방문을 잠근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봉우는 나신 장군부를 떠나 경기(京畿)에 있는 순방영(巡防營)으로 갔다.
그날 저녁.
야홍릉은 능묵에게 정상서부(丁尙書府)로 가서 정창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황제에게 전할 서신도 가져다주었다. 모든 일을 마친 뒤, 야홍릉은 능묵과 함께 성문이 닫히기 1각 전에 마차를 타고 몰래 저택을 나갔다.
제경을 떠난 날은 오월 초여드레였다. 태후의 생신과 보름 좀 넘게 남겨둔 날이었다.
* * *
오월의 공기는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야홍릉이 남긴 서신을 본 황제는 표정을 우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손평아, 홍릉이가 왜 이러는 것 같으냐?”
서신에는 제경에 날씨가 좋지 않아 요양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쓰여 있었다. 그녀는 상처가 나았지만 자꾸 사고가 일어나 딱지가 자꾸 떨어지니 많이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당분간 혼란스러운 제경을 떠나 산 좋고 물 맑은 데 가서 기분 좋게 상처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머물다가 다시 제경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심씨 가문을 대신해 사정하기도 했다.
‘심씨 가문은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으나 그들이 한경백의 외조부 집안인 걸 봐서 사형을 유배로 바꿔줄 수 있을까요? 최근 북강(北疆) 쪽에 방어벽을 세우고 있다고 들었는데 일손이 부족할 터이니 그쪽으로 보내시면 어떨는지요? 부황께서 자비를 베푸실 필요는 없습니다. 심씨 가문의 사람들도 백성의 고된 생활을 겪어보게 해야지요. 백성들의 고초를 겪지 못했으니 그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겨 이런 짓을 한 게 아닙니까?’
이 서신을 본 손평은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러는 것이냐?”
황제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손평은 고개를 젓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 이 서신은 공주가 손수 쓴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대필한 듯합니다.”
차가운 성격의 그녀가 언제 이런 어조로 얘기를 해보았던가?
제경이 아무리 혼란스럽다고 해도 그녀는 이런 말을 직설적으로 꺼낼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신에 쓰인 글들은 그녀의 성격과 전혀 맞지 않았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네 말은 홍릉이를 음해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냐?”
“그건 아닌 듯합니다.”
손평은 고개를 저었다.
“이 서신의 내용은 별 것 없습니다. 공주가 최근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한옥금의 일부터 그 뒤로 일어난 일들은 기분이 상할 만했지요. 먼젓번에는 8공주가, 그리고 장양후와 태후까지……”
손평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기에 폐하께서 측부를 보낸 걸로 공주 전하는 마음이 심란했을 겁니다. 그러니…….”
그래서 당분간 제경을 떠나고 싶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황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평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제가 외람된 말씀을 드리자면, 공주 전하는 열네 살 전까지 그 누구와도 가까이하지 않으셨지요. 권력 다툼에도 관심이 없었고요. 열네 살에 전쟁터에 나가면서 삼 년의 시간은 모두 전쟁터에서 적을 상대하느라 권력 다툼에 거의 참여하시지 않으셨죠.
그러나 제경으로 돌아온 이 몇 달간에 얼마나 심란한 일이 많았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배신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동생은 거짓된 말로 모함을 하고 심지어 할머니인 태후도 정인을 위해 공개 심문까지…….”
“무엄하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
“감히 태후의 일을 이렇게 언급하는 것이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손평은 황급히 스스로 따귀를 내리쳤다.
그러나 황제가 진짜로 화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또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폐하께서도 장양후와 공주 중 누가 더 중요한 인물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태후께서 장양후의 편을 드니 공주가 서운한 마음이 안 들 리 없지요.”
한 명은 황실 혈통으로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삼 년이나 고생한 공주였다.
다른 한 명은 궁의 시위이나 무공이 조금 강하고 반반하게 생겨서 태후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해 후로 봉해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감히 공주의 사람을 건드린 것이다.
그리고 다른 측군들은……
“그리고 아뢰올 것이 하나 있습니다.”
측군의 얘기가 나오자 손평은 뭔가 떠오른 듯했다.
“폐하, 7공주는 다섯 명 모두 마음에 드니 다들 똑같게 측군의 신분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제 오후에 종정시(宗正寺)에 말을 전해 종책에 기록했습니다. 아침에 종정시경이 이에 관한 상주서를 올렸는데 폐하께서 보셨는지요?”
종정시경의 마음도 복잡했다. 공주가 측부를 한 번에 다섯 명을…
아니, 그 전의 한씨 가문 서자까지 여섯 명을 들였으니 말이다.
‘한적하던 호국 공주부에 단번에 측군이 이렇게 많이 많아졌으니 얼마나 떠들썩할까?
폐하의 후궁처럼 매일 음모와 술수가 넘치며 겉으로는 화목한데 뒤로는 서로 이를 으르렁대는 거 아니야?’
“그들을 모두 종책에 올렸다고?”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손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정시경은 호국 공주의 측군이 모두 폐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공주가 말을 전했을 때, 바로 응했습니다.”
황제는 호국 공주를 총애했다. 그래서 공주에게 측군을 보내 그녀의 다친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제경에 이미 파다하게 퍼졌다.
대신들은 놀라고 당황스러우며 심지어 다른 생각까지 품었지만 황제가 최근에 기분도 좋지 않고 호국 공주의 단호한 처사 방식을 보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종정시경은 호국 공주의 지시를 들은 뒤, 아무 망설임 없이 야홍릉의 말대로 한 것이었다.
황제에게 상주서를 올린 것도 그저 격식에 지나지 않았다.
종정시경은 호국 공주가 여인의 신분으로 세속과 황실의 규칙을 어기고 한꺼번에 측군을 여섯 명이나 들였다.
그들의 명분을 종책에 기입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무더기로 쌓인 상주에서 종정시경이 보낸 것을 찾아냈다. 그러나 펼쳐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황제는 시선을 거두고 잠깐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저었다.
“없다.”
이미 이름을 적었으니 이제 와 안된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게다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규칙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 알 수 없는 기분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홍릉이는 제경을 떠나 어디로 갔다고 하더냐?”
“전 모릅니다.”
손평은 고개를 저었다.
“공주는 다른 사람이 모르기를 바란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는 걸 모르게 한 거라고?’
야홍릉의 성격으로 떠난다면 멀리 떠났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곳으로 가야 그녀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황제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심씨 가문이 떠올랐다.
“홍릉이는 왜 갑자기 심씨 가문을 대신해 사정하는 거지?”
“한씨 가문의 서자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손평은 황제 옆에서 가장 오랫동안 시중을 든 사람이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경백은 유약한 서생이기에 전하는 그를 데리고 나가지 않고 제경에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하셨나 봅니다. 마침 이 한씨 가문의 서자는 학식이 뛰어나 한서화더러 어산서원의 산장에게 추천서를 쓰라고 하며 사보직을 내달라고 한 것입니다.”
“사보? 어산서원은 귀족 학원이지 않느냐? 한경백은 과거 시험도 본 적이 없는데 어산서원에 사보로 들어가면 학생들이 말을 듣겠느냐? 게다가 그는 서자이기가지 한데.”
“그래서 전임 어사의 추천서가 필요한 거지요.”
손평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공주가 간만에 규칙을 어겼으니 폐하께서 기뻐하셔야 마땅하시죠.”
“기뻐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