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빙산처럼 차갑다
만약 정말 밖에서 몇 년 동안 있다 돌아온다면 조정의 형세가 안정적으로 변하고 후계자도 정해졌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태자를 세우는 것은 종묘사직에 연관되는 일이었다.
일찍 태자를 정하면 대신들도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터였다. 또한 태자는 일찍부터 황제에게서 정사를 보는 법을 배우며 다음 황제가 되기 위한 길을 닦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황제는 태자를 정하는 일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야홍릉은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그녀의 시선에서는 늘 그렇듯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나신은 침대 머리에 기댄 채, 야홍릉의 차가운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야홍릉이 한옥금과 헤어진 뒤로 성격이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더 속을 알 수 없게 변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짙은 안개가 휩싸인 것처럼 그녀의 모든 감정을 숨겼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감정과 속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한없이 차가운 분위기만 느낄 뿐이었다.
“주인님.”
방 밖에서 흑의 소년이 들어오더니 시선을 내리깔고 보고를 올렸다.
“감진이 뵙기를 원합니다.”
이 말에 야홍릉과 나신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감진이 누구인지요?”
나신은 의아한 얼굴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ㅡ, 잠시만요. 이름이 귀에 익은데…….”
“오늘 새로 들인 측부이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느 기방의 사장이자 간판이라고 하던데.”
그 말을 들은 나신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새로 들인 측군이라고? 전하께서 정말 자신을 사내로 생각하시는 건가? 측군을 줄줄이 저택에 들이시다니. 정말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거지?’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야홍릉은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곧게 편 허리에서 날카롭고 매서운 기운이 풍겼다.
그는 멍하니 야홍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그는 야홍릉이 한 말을 떠올렸다.
‘어느 기방의 사장이자 간판이라…….’
순간, 나신은 충격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잠깐만. 감진? 그래, 이제 기억이 났어. 여인들의 흠모와 사내들의 구애를 잔뜩 받는다는 그 감진이라고?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가 높은 빙란각의 간판 소관이자 배후의 사장인 감진 공자? 전하께서 그런 인물을 저택에 들이셨다고?’
나신은 벼락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인물을 저택에 들인 야홍릉의 능력에 놀란 것인지, 풍류에 젖어 사는 이런 사람들도 가리지 않는 야홍릉의 취향에 놀란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야홍릉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서원을 나선 그녀는 비단 재질의 파란색 경포를 입은 남자가 다리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훤칠한 키에 유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차분하고 느긋한 분위기를 풍겨 마치 그림 속의 신선 같았다.
금방이라도 바람을 타고 떠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미남이었다.
양귀비처럼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자였다. 제경의 수많은 귀족들이 그에게 껌뻑 죽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야홍릉은 뒷짐을 진 채,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날 찾은 것이냐?”
감진은 흠칫 놀랐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차갑고 무덤덤한 야홍릉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여태까지 그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그에게 첫눈에 반해 환심을 사려고 뭐든 하는 부류였다. 그러나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편이었다.
두 번째는 그에게 첫눈에 반한 뒤, 미친 듯이 그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는 부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처참한 교훈을 얻은 후 첫 번째 부류가 되었다.
물론 그의 미모를 보고도 꿈쩍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극소수였다.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절대 대다수가 그의 미모에 빠져 환심을 사려고 무슨 짓이든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행동햇다.
그러나 야홍릉은 이 두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그녀는 완벽한 다른 부류였다.
감진은 일부러 외모를 정성 들여 꾸미고 하늘거리는 옷을 골라 바람이 잘 부는 다리 위에 서서 분위기를 연출까지 했다.
그런데 그가 들인 노력을 야홍릉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감진의 외모를 무시하고 있었다.
감진은 눈살을 찌푸리고 마음속에서 드는 이질감을 억눌렀다. 그리고 우아하게 허리를 굽히며 예를 올렸다.
“제가 이 저택에 들어온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고 집사에게서 저택의 규정을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전하의 금기를 어길까 걱정됩니다. 그래서 전하께 저택의 규정에 대해 들을 겸, 함께 정원 산책을 하고 싶은데요. 전하께서 제 초대에 응해주시겠습니까?”
‘함께 산책하자고?’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니 허락한 것이라고 생각한 감진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둘은 다리를 지나 후원 방향으로 걸어갔다.
호국 공주부는 수비가 엄격하고 규정이 많았다. 그들이 길을 가면서 마주친 호원과 시녀들은 예를 올릴 때조차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서 공주의 모습을 보면서 꿇어앉아 있다가 야홍릉이 멀리 간 뒤에야 일어섰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공주부의 하인들은 모두 야홍릉을 아주 존경하는 한편 두려워했다. 뼛속에 새긴 듯한 하인들의 공손한 모습과 야홍릉의 묵묵한 반응에 감진은 놀랍기만 했다.
야홍릉이 하인들을 모질게 대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하인들이 그녀에게 경외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저택의 주인이 가져야 하는 위엄이었다.
야홍릉은 어느 모로 보나 소녀다운 모습이 하나도 없이 진정한 사내 같았다.
예전에 한옥금을 사랑했다는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오직 그 점만이 여인 같은 면모였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황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정원은 조용하고 풍경이 아름다웠다. 정원의 오솔길을 따라 산책을 하자 향긋한 꽃내음이 풍겨왔다.
“전하께서는 저 같은 신분의 사람이 공주부에 왜 들어온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감진은 야홍릉과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면 바로 그녀의 싸늘한 옆모습이 보이는 거리였다.
“전하께서는 저희를 들였으나 이틀 동안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살다 죽으라는 것입니까?”
야홍릉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난 네 의도에 관심이 없다. 허니 내 생각에 대해 말해 줄 필요도 없겠지.”
그 말을 들은 감진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준수한 얼굴에는 흥미로운 표정이 나타났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가 어찌 감히 전하의 생각을 말씀해 달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공주부에 온 게 아무런 목적이 없었다고 한다면 전하께서도 믿지 않으시겠죠.”
야홍릉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표정을 고수했다.
감진도 야홍릉이 자신의 말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야홍릉의 서리가 낀 듯한 얼굴에서 아무런 표정도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팔방미인인 감진은 처음으로 자신의 매력이 통하지 않는 좌절감을 맛보았다.
그의 앞에 있는 이 여인은 녹지 않는 설산의 눈처럼 아름다우나 가슴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러나 감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하, 혹시 제 신분이 전하께 수치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그는 풍류스럽기만 한 사람이었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구애를 받아 봤다고는 하지만 다들 그의 미모에 빠졌을 뿐이다. 그는 수려한 외모로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명문가 사람들은 그를 아무리 떠받들고 돈을 물쓰듯이 하면서 환심을 사려고 애써도 결국 그를 노리개나 기방의 소관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그런 기방 출신인 사람이 공주부의 측군이 되었으니.
“네가 수치라고 생각하면 수치인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수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야홍릉이 싸늘하게 말했다.
“스스로를 낮잡아 본다면 다른 사람들도 다 얕볼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감진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감동을 받은 게 아니라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스스로를 낮잡아 본다고?’
매일 웃음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지만 그는 한 번도 자신을 낮잡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신분은 웃음을 파는 것 정도로 간단한 게 아니었다.
그가 이 질문을 한 것은 그냥 화젯거리가 없어서 꺼낸 얘기였다.
호국 공주는 대화를 이어 가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감진은 줄곧 자신이 붙임성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상대하기 싫은 경우를 제외하고 그 누구와도 대화가 잘 통할 거라고 자부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빙산도 녹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호국 공주는 빙산보다도 더 차가운 사람이었다.
감진은 그녀의 싸늘함에 결국 속으로 포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 폐하께서 보낸 사람도 아니고 황자들의 지시 때문에 들어온 것도 아닙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제경 전체에서 저에게 억지로 뭘 강요할 만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야홍릉은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어찌 전하의 앞에서 거만하게 굴겠습니까?”
감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은 별빛이 들어 있는 것처럼 반짝였다.
“전 제가 원해서 저택에 들어온 것입니다. 들어오기 전에 당부하는 말을 들은 것도 사실이나 전 그냥 무시했습니다. 전 그 누구의 첩자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야홍릉이 어두운 시선으로 물었다.
“그럼 네가 내 저택에 온 목적은 무엇이냐? 너의 진실된 신분은 무엇이지?”
감진은 우아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은 아직 그런 것을 얘기할 때가 아닙니다. 하지만 전하께 나쁜 의도를 품고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야홍릉이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나한테 나쁜 의도를 품으려고 해도 그럴 능력이 되겠느냐?”
감진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야홍릉은 몸을 돌려 정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감진은 바로 따라갔다.
“전하께서 신중하게 생각해 보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께 들어온 다섯 명을 모두 측군으로 봉한 일 말입니다.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 아닌 듯합니다.”
감진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듣기 좋았다. 낮고 굵직하여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목국에서 공주가 측부를 들인 선례는 없지만 전하께서 그 선례를 열었으니 많은 일에서 신중해야 하는 듯합니다. 공주의 측군은 왕의 측비처럼 황실 족보에 들어가야 하니…….”
“그래서? 내 일을 네가 신경 쓸 필요가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