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궐황도 (49)화 (50/301)

16648799049638.jpg 

49화 이유가 뭘까

황제는 곧 한숨을 내쉬며 실소를 터뜨렸다.

“초각로의 손자도 홍릉이에게 대우를 받지 못하는구나……. 손평, 홍릉이의 속생각은 도대체 어떤 것 같으냐? 초씨 가문의 자제는 부마로 삼기에도 충분한데도 홍릉이는 정말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냐?”

“그건…….”

손평은 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바라보았다.

“호국 공주의 일에 대해 저는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공주가 성미는 차가우시나, 보통 이런 성격의 사람일수록 사랑을 진지하게 대하는 것 같습니다. 쉽게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으나 일단 사랑에 빠지면 그 마음이 평생 가지요.”

‘평생 간다고?’

황제는 흠칫 놀랐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그 아이가 아직도 한옥금을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거냐?”

“그건 아닐 겁니다.”

손평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씨 가문 2공자가 먼저 공주에게 잘못을 저질렀으니 공주가 미련이 남았다고 해도 다시는 한옥금과 엮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저 한동안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손평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야홍릉처럼 차갑고 도도한 사람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상대방을 소중히 다루지만 사랑에서 빠져나오면…….

게다가 한옥금은 그녀를 배신하고 죽이기까지 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야홍릉이 어찌 쉽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러면 홍릉이의 부마를 찾아주는 일은 서두르지 말아야겠구나.”

손평은 고개를 숙이며 ‘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초씨를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명은 다 받았단 말이지…….”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게다가 모두 똑같이 측군의 명분을 주고 말이야. 이건 좀 놀라운 일이로구나.”

‘홍릉이에게는 경계심도 없다는 말인가?’

나머지 다섯도 보통 신분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야홍릉의 능력으로 충분히 그들이 공주부에 들어간 목적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왜 초유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을 모두 받아들였단 말인가?

“손평, 어서 말해 보거라.”

황제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홍릉이가 왜 그랬을 것 같으냐?”

손평은 고개를 숙였다.

“저는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뭘 말하든 죄를 묻지 아니하마.”

“……네.”

손평은 침묵을 지키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공주께서는 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닐까요?”

“뭐?”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손평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8공주가 했던 말은 아주 민감한 발언이 아닙니까? 호국 공주가 여인이라고 해도 그 말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수는 없었겠지요. 그래서 이들이 다른 목적으로 공주부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주는 폐하의 뜻에 따라 그들을 모두 받은 것입니다. 그 말은 자신을 감시하는 다섯 명의 첩자를 들인 것이지요. 이렇게 되었으니…… 폐하께서도 안심하시겠지요.”

여기까지 말한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다가 결국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에 이르렀다.

황제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는 손평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야자릉은 야홍릉이 황위를 노린다고 했다.

황제는 겉으로 믿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때부터 그의 수많은 행위가 그의 속마음을 보여주었다.

호국 공주부에 측부와 시군을 보내는 등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야홍릉은 똑똑한 여인이었다.

“손평, 내가 잘못한 것이냐?”

그는 갑자기 불안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난 홍릉이에게…… 난 그 아이가 정말 오해할까 두렵단다.”

‘오해라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면 누구라도 오해할 것이다.

호국 공주는 똑똑하여 쉽게 속을 사람이 아니었다.

차분하고 총명한 그녀가 뭘 모르겠는가?

손평은 노복으로 말을 적게 하고 조심스럽게 살아야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황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모셔서 황제의 생각을 얼추 알고 있었다.

황제는 미간을 문지르며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그러나 왜 후회하는지, 또 마음속으로 왜 자꾸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건지는 그밖에 모를 것이다.

* * *

같은 시각.

불안한 황제와 달리 호국 공주부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다섯 명의 공자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고 집사는 돌아와서 야홍릉에게 보고를 올렸다.

“다섯 공자가 묵을 곳을 모두 마련해 두었습니다. 서원의 청운헌(聽雲軒), 청우루(聽雨樓), 청풍각(聽風閣)을 감진 공자, 영정 공자와 매 공자에게 드렸습니다. 청설원(聽雪苑)에는 단 공자 두 분을 머물게 했습니다. 더 지시하실 것이 있습니까?”

야홍릉이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됐으니 이만 가보거라.”

고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야홍릉은 창가에 기대앉은 채, 입을 열었다.

“능묵.”

검은 옷의 소년이 구석에서 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단씨 소년들 말이다. 아는 사람이더냐?”

‘단씨 소년?’

능묵은 아까 보았던 쌍둥이 형제를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전 그들을 모릅니다.”

“모른다고?”

야홍릉의 담담한 말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게 정말이냐?”

능묵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를 의식했는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전 그들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부디 믿어 주십시오.”

그는 야홍릉이 왜 이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주인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어영위인 그는 곧 버려질지도 모른다.

방 안은 정적에 싸였다.

야홍릉은 말없이 소년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아까 두 소년의 놀란 눈빛을 떠올린 그녀는 어두운 시선으로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너한테 2각의 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보고 다시 답하거라.”

능묵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뭐라고 해명하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머릿속으로 두 소년과 연관된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뒤져봐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능묵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2각의 시간이 지난 뒤, 그는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전 정말 그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능묵은 하얗게 질린 입술을 깨문 채, 몸을 일으키더니 허리춤에서 계편을 꺼내 두 손으로 야홍릉에게 바쳤다.

“주인님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계편으로 물어보십시오. 계편에 맞으면서 거짓말하는 영위는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야홍릉은 시선을 돌려 그의 손에 들린 계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영위.

야홍릉은 능묵도 황제가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능묵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무공이 강하나 글을 모르고, 두 손이 퉁퉁 붓도록 맞았으나 고분고분하게 붓을 들고 자신의 이름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는 공주부에 들어온 첫날부터 공손하고 순종적인 모습만 보였다. 그녀는 여태까지 한 번도 반항한 적이 없었다.

계편에 맞아 중상을 입고도 아무렇지 않게 대들보 위에서 그녀를 지켜주던 사람이었다.

그는 맞아서 퉁퉁 부운 왼손으로 숭준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이고, 숭준과 싸우다 물집이 터져도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남은 오른손으로 글을 쓰던 사람이었다.

그는 야홍릉이 장양후부에 쳐들어갔을 때, 혼자의 힘으로 장양후부의 모든 호원을 무찌르며 야홍릉을 지키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강한 어영위가 종종 그녀의 기분 때문에 긴장하고 ‘삼자경’을 외우지 못해 불안해하며 숙제를 마치지 못해 그녀의 앞에 순순히 두 손을 내밀었다.

‘본성은 난폭할 텐데 내 앞에서는 항상 유순하고 순종적인 모습만 보인다는 말이지. 모서리가 모두 깎인 둥근 인형처럼…….’

야홍릉은 마음을 가다듬고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궁의 악사, 단리는 아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으나 아까보다 한기가 덜했다.

‘악사?’

능묵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야홍릉은 계속해서 물었다.

그러나 더 이상 심문하는 말투가 아니라 한담에 가까운 말투였다.

“빙란각의 사장은 아느냐?”

능묵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들어온 여섯 명 중에서 몇 명이나 아느냐?”

“……주인님게 아룁니다.”

능묵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제가 지금 바로 그들의 조상까지 싹 훑어보겠습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참 침묵을 지킨 뒤,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네가 몇 살에 신은전에 들어갔는지 기억이 나느냐?”

능묵은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는 한경백이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능묵은 글공부를 습득하는 속도가 아주 느립니다. 무공을 익힐 때의 재주와 비교했을 때 아주 많이 떨어집니다.”

“무공을 익히는 재주가 좋다고 해서 글공부를 배울 때도 총명하다는 것은 아니나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능묵은 의지력이 강하고 아주 열심히 배웁니다. 그러나 매일 깨우치는 양이 아주 적습니다.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그는 글공부에 재주가 없습니다.”

‘재주가 없다고?’

야홍릉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전의 다른 영위들은 모두 글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유독 능묵만 글을 모른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 능묵이 신은전에서 제일 강한 어영위라는 것도 이상했다.

게다가 굳이 이 어영위가 그녀에게 보내졌다는 것까지.

육연지는 황제도 이 어영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물며 그녀에게 악의를 품고 온 사람도 아니라고 했다.

‘능묵은 우연히 나에게 온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보낸 것일까? 만약 의도적으로 보낸 것이라면 배후의 조종자는 누구일까? 목적은 또 무엇이고?’

오늘 저택에 온 여섯 명 중에서 쌍둥이 형제는 분명 능묵을 아는 자들이었다. 혹은, 능묵을 겨냥해서 온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야홍릉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의 어두운 시선에 소름끼치는 한기가 담겨 있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어느덧 사흘이 지나갔다.

나신은 무공을 수련한 사람이라 몸이 원체 건강했다.

상처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물론 나흘 동안 도 의원이 매일 약을 갈아주고 궁에서 온 태의가 가져온 좋은 약을 먹은 것도 큰 역할을 했다.

나흘째 아침에 야홍릉이 나신을 보러 갔을 때, 나신은 상처에 무리가 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기까지 했다.

“전하, 제 상처가 이미 많이 나았으니 저택으로 가서 쉴 수 있을 듯합니다.”

야홍릉이 말했다.

“이틀 더 있다 가거라.”

야홍릉의 말에 나신은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께서 홀로 제경을 떠나시려는 겁니까?”

야홍릉은 그렇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폐하께서도 모르시는 겁니까?”

나신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야홍릉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것 없다.”

“그럼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

“아직은 확정할 수 없다. 길면 몇 년도 될 수도 있고, 짧으면 몇 달 안에 돌아올 것이다.”

야홍릉이 대답했다.

나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깐 생각을 하다 물었다.

“전하께서는 조정의 권력 다툼을 피하시려는 겁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