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나가거라
“감진이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호국 공주는 신분이 고귀하여 제경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든지 궁을 드나들 수 있고 황제를 만나도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측군, 시군까지 줄줄이 거느리게 되었다.
그녀는 황태자가 아니었지만 누리고 있는 특권과 총애는 황태자에 못지않았다.
그래서 황족 출신의 왕을 몇몇 제외하면 아무리 고귀한 권신의 자제라고 해도 그녀의 앞에서 순순히 무릎을 꿇어야 했다.
게다가 그들이 공주부에 들어온 목적은 공주의 측군 또는 시군이 되기 위함이었다.
지위로 따지면 첩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감히 공주와 평등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야홍릉은 미인 탑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빙란각의 간판 미인 겸 사장인 감진은 경국지색이라고 불릴 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제경의 수많은 귀족들과 고위층 관리들은 그의 규칙을 따르면서까지 그를 만나려고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이, 네 번째 사람도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목국에 잡혀온 제국의 인질인 그는 곱상하고 조용한 청년이었다.
그의 시선에서 날카로움 같은 것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곱상하게 생겼으나 너무 조용하고 유순하여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매현근이 호국 공주를 뵙습니다.”
매현근은 여섯 명 중 유일하게 스무 살이 넘는 청년이었다.
그는 조용하고 품위 있으나 용모는 다른 소년들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마음 편히 해주는 매력이 있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화청의 네 벽에 모두 등불이 걸려 있었다.
밤바람이 불어오자 불빛이 흔들리고 호수에 물보라가 일었다.
아득히 먼 하늘에서 희미한 별빛이 보였다.
화청 안은 갑자기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맨 왼쪽에 서 있던, 하얀색 장포를 입은 소년은 시선을 들고 야홍릉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야홍릉이 정말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인지, 아니면 그저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일다경의 시간이 흘렀지만 야홍릉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소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
“무릎을 꿇어라.”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에 반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소년은 흠칫 놀랐으나 곧바로 입꼬리를 올리며 싱긋 웃었다.
“전하…….”
“내 말을 들지 못한 것이냐?”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의 곱상하고 귀티가 흐르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한번 명령했다.
“무릎을 꿇어라.”
초유는 멍하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온화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제 신분에 대해 모르시는 겁니까?”
“신분?”
야홍릉은 입꼬리를 올리고 차갑게 말했다.
“내 저택에 들어왔으면 시군일 뿐이다. 시군은 무릎을 꿇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초유는 깜짝 놀랐다.
그는 초각로의 적손자로 초씨 가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귀공자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설움을 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른 가문이라면 이렇게 오냐오냐 곱게 자란 아이는 무능하고 방자하게 변했겠지만 초유는 아니었다.
그는 글재주와 무공 모두 뛰어나 가히 천재라고 불릴 수 있었다. 성격, 기품, 수양 등 각종 방면에서도 훌륭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명문가 귀공자답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각한 것 같은 이목구비, 하얗고 투명한 피부, 짙고 정기 도는 두 눈을 가진 그는 귀티 나는 얼굴에 온화함도 담고 있었다.
어디로 보나 초유는 아름답고 우아한 미소년이었다.
진정한 미인은 기품이 뛰어난 사람이지,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한다.
초유는 보기 드문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흠잡을 데 없는 공자였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예의를 갖춘다고 해도 뼛속 깊이 자리 잡은 명문가 귀공자의 도도함과 자부심은 감출 수 없었다.
무릎을 꿇는 일이라 해도, 사실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신분이 고귀한 건 맞지만 호국 공주의 신분이 더욱 고귀했다.
평소에 만났을 때라면 그의 신분으로 허리를 살짝 굽히며 인사를 올리거나, 또는 중요하거나 필요한 경우에만 무릎을 꿇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초유와 야홍릉이 말을 하지 않자 다른 다섯 명도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 순간에 눈치 없이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호국 공주 야홍릉의 성미와 성격은 그들도 충분히 들어 알고 있었다.
공주를 무서워하지는 않았으나 공주부에 들어오겠다 결정한 이상, 야홍릉에게 밉보이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밉보일 시기가 아니었다.
초유는 조용히 야홍릉을 훑어보았다.
호국 공주의 명성이 제경 전체에 넓게 퍼진지라 초유도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3년이나 뒹굴고 돌아온 공주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그는 호국 공주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병법 책략을 꾸미는 데 얼마나 능한지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연속 3년이나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호국 공주의 성미가 차갑고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들었을 때, 과장된 소문인 것이라고 여겼다.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척한다고 생각했다.
‘여인이 차가워 봤자 얼마나 차갑겠어?’
지금 호국 공주를 직접 본 그는 소문이 진짜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호국 공주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질질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말을 부드럽게 돌려 할 줄 몰랐으나 괜히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차갑고 무정하나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지금 순간에도 그녀는 고집을 부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오늘 공주부로 들어온 것은 공주의 측부나 시군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주 앞에서 공손하게 큰 절을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큰절을 올리면 정식으로 공주부의 사람이 되는 셈이었다.
권세 있는 가문의 공자든, 기방의 기생이든, 이 저택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야홍릉의 눈에는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모두를 똑같이 대하기로 했다.
누구도 특별할 게 없고 더 고귀한 사람일 수 없었다.
스무 살 된 초유는 난생 처음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가 공주부에 발을 들인 이유는 야홍릉에 대해 호기심이 동해 그녀를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또 심심해서 재미거리를 찾기 위해 들어온 것은 더욱 아니었다.
공주부에 들어온 것은 그가 진지하게 생각을 거친 뒤에 내린 결정이었다.
오기 전에 그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생각해보았고 자신이 모두 순조롭게 처사할 것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차가운 공주의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세를 낮출 수 없다면 지금 바로 내 저택에서 나가도 된다.”
야홍릉이 먼저 정적을 깼다.
“난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강요하는 기방의 포주가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
일부러 내는 소리가 아니라 타고 난 목소리가 온기 없이 차가웠다.
초유는 입가를 실룩였다. 그는 이렇게 엄숙한 말에서 기방의 포주라는 천박한 단어가 나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눈을 내리깐 그는 마지막으로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귀티 나는 얼굴은 불빛 아래서 차분하게 비춰졌다.
그러나 야홍릉은 그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있는 다섯 명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단홍상, 단백의.”
쌍둥이 소년은 흠칫 놀랐다가 곧바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전하.”
“감진.”
감진은 눈을 내리깔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네, 전하.”
“영정.”
“네, 전하.”
“매현근.”
“네, 전하.”
“나는 성격이 좋지 않고 규칙도 중히 여긴다.”
야홍릉이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매정함이 담겨 있었다.
“모두들 잘 들어라. 홍릉원은 저택의 주전(主殿)이다. 그곳에는 내 침전과 서각이 있기에 허락 없이는 함부로 들어오지 못한다. 만약 허락 없이 들어왔다 걸리면 사지를 자를 것이다.”
“공주부에 들어온 이상, 출입을 하려면 반드시 내 허락을 받아야 한다. 내 허락을 받지 않고 저택을 나간 자는 최소 곤장 오십 대를 맞을 것이다.”
“나쁜 꿍꿍이를 가지고 있거나 다른 목적으로 저택에 들어온 자는 나한테 발견되기만 하면 죽기보다 못한 삶을 살게 할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는 다섯 명의 반응을 살피지도 않고 고개를 돌렸다.
“고 집사.”
고 집사가 화청 밖에서 허리를 숙였다.
“네, 전하. 말씀하십시오.”
“다섯 명을 데려가 거처를 마련해 주어라.”
말을 마친 야홍릉은 천천히 일어났다.
“오늘부터 이 다섯 명은 호국 공주부의 측군이다. 서원에 거처를 마련해 주어라.”
고 집사는 입을 떡 벌렸다.
“모두 남기실 겁니까?”
“다섯 명이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초유는 돌려보내거라.”
‘돌려보내라니?’
당황한 초유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탈락했다는 건가?’
고 집사는 눈치 빠르게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네, 전하.”
야홍릉도 더는 말을 하지 않고 화청 밖으로 걸어갔다.
능묵도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공주 전하.”
초유가 시선을 들고 말했다.
“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야홍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호국 공주부는 귀공자를 모시지 않는다.”
초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멀어져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야홍릉의 뒷모습은 꼿꼿하고 도도했다.
깡마른 몸매임에도 불구하고 칠 척에 달하는 남자조차 갖추기 어려운 강한 기세와 차가움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꺼리고 두려워했으나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초유는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 * *
“홍릉이가 다섯 명이나 남겨 두었다고?”
어서방에서 암위의 보고를 들은 황제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남지 못한 한 명은 누구냐?”
“초유 공자입니다.”
황제는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초유 공자가 탈락하다니…… 무슨 이유인지 아느냐?”
암위가 대답했다.
“호국 공주가 무릎을 꿇으라고 했는데 초 공자가 꿇지 않았다고 합니다.”
황제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것이다.
‘초유더러 무릎을 꿇으라 했다고? 저택에 들어간 첫날에 이렇게 기를 죽인 거야?’
역시 야홍릉에게만 이런 패기가 있었다. 만약 정왕이나 숙왕이었다면 절대 직접적으로 초각로가 가장 아끼는 적손자더러 무릎을 꿇으라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인 그조차도 초각로의 체면을 봐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야홍릉은 달랐다. 황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