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궐황도 (46)화 (47/301)

16648798936431.jpg 

46화 네 조건을 말하거라

“제가 그때 일곱 살이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래서 대충 둘러대면 제가 믿을 거라고 여긴 걸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언제 명분을 신경 썼습니까? 살아 계실 때, 그는 결백과 믿음도 주지 못했는데 돌아가시니 평처의 명분을 주겠다? 정말 우습지도 않습니다. 그가 뭐라고 제가 도와드려야 합니까?”

그는 한씨 가문이 지금이라도 바로 망하기를 바랐다.

한서화와 심교가 동시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고통을 맛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들은 이미 권세를 잃고 한씨 가문도 예전 같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는 한참 부족했다.

한경백은 눈을 감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야홍릉에게 예를 올렸다.

“제가 할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전하, 제 얘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야홍릉은 탑에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경백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담담하게 물었다.

“이것들은 다 어머니가 말해준 건가?”

한경백은 흠칫 놀랐다가 그녀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심완에게 그 일이 생겼을 때, 한경백은 갓난아기이기에 기억이 있을 수 없었다.

태어나기 전의 일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다른 사람이 말해주지 않는 한.

한경백은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전 일곱 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욕심도 없고 불만도 없는 분이셨지요. 한씨 저택과 아버지에게 실망했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가 평생 분노와 원망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요.”

그러나 그는 직접 어머니의 초췌한 얼굴과 날이 갈수록 말라가는 몸을 지켜보았고 또 어머니가 임종 전에 그를 걱정하는 눈빛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전의 일들은……

한경백은 시선을 거두고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제가 열세 살 되던 해에 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저한테 책 한 권을 주었는데 그 속에 한서화가 심씨 가문의 자매를 맞이한 일과 한 부인이 제 어머니와 함께 한씨 저택에 들어간 일이 들어 있었습니다.”

“검은 옷?”

야홍릉의 표정이 굳었다.

“그자의 신분을 아느냐?”

한경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제 어머니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단지 한씨 가문이 잘 지내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고……. 그는 무공이 아주 강했습니다. 한씨 저택의 호원들도 모두 고수였으나 그 사람은 누구도 모르게 한씨 저택에 들어왔었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그 사람과 제 어머니의 사이를 의심하실 수 있으시나 제가 장담합니다. 그 사람은 그전까지 제 어머니에 대해 잘 모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수첩의 글씨체가 아주 어지러웠는데 글을 잘 모르는 사람이 바삐 남긴 흔적인 듯했습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하다 물었다.

“왕 어멈이 한 거로구나?”

한경백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하, 어떻게 짐작하신 겁니까?”

“한서화가 아내를 맞이한 일과 심교가 한씨 가문에 들어간 뒤 저지른 소행에 대해 아는 걸 보니 한씨 저택의 사람이었겠지.”

야홍릉의 말투는 기복이 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심교는 다른 사람이 모르게 조심스럽게 나쁜 짓을 했을 터. 사람이 많을수록 들통날 위험이 커지니까. 그러나 직접 할 수는 없었기에 그녀의 일을 도울 수 있는 심복이 필요했을 것이다.”

왕 어멈은 심완의 그 일이 일어난 뒤, 유일하게 오동원에 음식을 나르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심교의 신임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심복이라는 존재는 위험하기도 했다.

오직 심복만이 그녀의 모든 비밀을 알기에 심교는 왕 어멈을 죽여서 입을 막으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심교의 마음을 잘 아는 왕 어멈은 심교의 악행을 낱낱이 기록해 둔 것이다.

남자가 남몰래 한씨 저택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그가 줄곧 한씨 저택을 지켜보았을 리는 없었다. 한씨 저택에서 벌어진 자잘한 일들과 심교의 마음까지 자세히 알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수첩의 주인이 바로 처음부터 끝까지 심교의 옆에서 손발이 되어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왕 어멈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글씨체가 어지럽고 서툰 것도 이를 입증하고 있었다.

대갓집에서 일을 하는 어멈들은 글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많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급히 쓴 글이라 글씨체가 엉망이었던 것이다.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생각이 맞으십니다.”

그도 나중에 조용히 알아보았다.

그러다 수첩의 필체가 왕 어멈의 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왕 어멈이 기록한 수첩이 있어도 한경백은 여러 번 거듭 조사해 보았다. 그는 신분이 낮고 한씨 저택에서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기에 이것들을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경백만 알 것이다.

그러나 한 부인이 왕 어멈에게 정이 남아 있던 것인지, 아니면 왕 어멈에게 뭔가 있는 것인지 심교는 왕 어멈을 죽이지 않고 왕 어멈의 딸을 조카며느리로 맞이했다.

즉, 심씨 가문 서자 심리(沈離)의 아내로 들인 것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한 부인의 요구를 들어주는 동시에 네 조건을 말하거라.”

‘뭐라고?’

한경백은 경악했다.

“전하, 그 뜻은…….”

“네 아버지는 조정에서 파직당했으나 여전히 귀족이다. 황후가 황후로 있는 한, 그는 황족의 친척이지.”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한옥금이 공주를 죽이려고 한 것 말고 한씨 가문에서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없고, 부황도 한씨 가문에 벌을 내렸으니 당분간 그들을 건드리지 않을 거다.”

그래서 한서화는 아직 사지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가 겪은 충격은 전혀 치명적이지 않았다.

한경백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는 야홍릉에게 다 생각이 있다는 것과 야홍릉이 계획하는 일은 하룻밤 사이에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눈앞의 득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경백은 야홍릉과 함께 맞서 싸우기로 했으면 그녀를 믿기로 마음먹었다.

“전하, 말씀하십시오.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어산서원(禦山書院)에 사보(師保) 자리가 하나 빈다고 들었다.”

야홍릉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서화가 전에 어산서원에서 글을 가르친 적이 있으니 네가 그자의 추천서를 가지고 간다면 서원의 책임자가 그의 체면을 봐서라도 널 들일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한경백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국자감(國子監, 고대의 최고급 학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목국의 국자감은 ‘어산서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백 년 전, 목국의 최고 부자가 세운 것이었다. 규모가 크고 귀족 자제들만 받았기에 조정의 재목을 배양하는 학교로 되었다. 나중에는 황제가 직접 국자감으로 등급을 올려 주었다.

어산서원은 목국에서 가장 정규적이고 등급이 높은 학부였다. 사보는 물론, 학생의 신분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려고 해도 강한 집안 배경이 필요했다.

어산서원에 들어가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세가의 적자였다.

한씨 가문의 서자인 그는 평생 그곳에 발을 들인 적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찌 다른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된다는 말인가?

“난 며칠 뒤에 제경을 떠날 것이다.”

야홍릉은 그의 놀란 얼굴을 무시한 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어산서원에 들어가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신경 쓸 것 없다.”

“하지만 전하, 제 신분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은 걱정할 것 없다.”

야홍릉이 평온하게 말했다.

“내 말대로 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될 것이다.”

한경백은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이틀 정도 더 기다려서 한 부인의 애간장을 태우고 다시 얘기하자꾸나.”

말을 마친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없을 때, 저택의 서각을 마음대로 쓰거라. 난 숨길 게 없으니 책장의 책들도 원하는 만큼 읽어 보아도 좋다.”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는 지난번에 호국 공주의 서각에 좋은 책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정말 어산서원에 들어갈 수 있다면 서각의 책들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공주는 성격이 차가웠지만 세심하고 그를 곳곳에서 배려해 주었다.

‘공주 전하께서 나더러 어산서원에 들어가라고 하신 일은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닐 거야.’

“용건이 끝났으니 먼저 돌아가 쉬거라.”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씨 가문은 당분간 망하지 않을 것이다. 나한테 그들을 남겨 두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러니 복수를 하려거든 좀 더 기다리거라.”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도 한씨 가문이 바로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벌어진 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한옥금은 중상을 입었고 그의 아버지는 속이 타서 머리가 희게 새어버렸다.

한 부인은 심씨 가문의 일로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최근 한씨 가문의 나날은 가히 엉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것도 천천히 시기를 기다리면 되지. 급할 것 없어.’

그와 공주는 같은 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경백은 야홍릉의 계획을 협조적으로 따를 것이다.

한경백이 떠난 뒤, 야홍릉은 홀로 말없이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능묵.”

소년이 나타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조용하고 순종적인 모습이 영락없는 어영위였다.

“일어나거라.”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장롱에 검은색 장포가 있으니 갈아입거라.”

능묵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고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자신의 행위가 무례했다는 것을 깨닫고 또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전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능묵은 주인의 말을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내전의 장롱 앞으로 걸어갔다.

장롱 문을 연 그는 깔끔하게 개어져 있는 장포를 두 손으로 꺼냈다.

능묵은 다시 장롱 문을 닫고 외전으로 걸어와 야홍릉을 불렀다.

“주인님.”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가 손에 든 옷을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옷이 맞다. 옷을 갈아입으려무나.”

능묵은 안색이 변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전 어영위이기에 검은색 단의(單衣)만 입을 수 있습니다.”

검은색은 은신하기에 편하기 때문이었다. 영위의 옷은 양식이 간단하고 천이 얇아 입고 벗는 데에 시간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장포도 검은색이었으나 단추도 많고 입기 번거로웠다.

게다가 질 좋은 천을 사용해 그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거절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