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기구한 운명
심완은 한서화의 첩실이었다. 대부분의 일은 그녀가 결정할 수 없었다.
한씨 저택에 들어온 뒤로 그녀에게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도 제멋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가 어찌 몸을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씨 저택에 들어온 지 2년이 지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한서화의 여인이 되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말이 있다.
심완의 용모는 흠잡을 데 없이 어여뻤지만 성격은 심교와 완전히 달랐다. 조용하고 차분한 그녀는 한서화의 마음까지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한서화는 보름 내내 오동원에 머물렀다.
커다란 한씨 저택은 모두 심교가 관리하고 있기에 그녀는 몸이 아파 누워 있으면서도 한서화와 열흘이 넘게 심완의 방에서 밤을 보낸 일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지만 심완을 괴롭힐 여력이 없었다.
둘째를 임신한 뒤로 그녀는 매일 잠들기 바빴다. 침대에서 일어나면 온몸이 시큰거리고 기운이 하나도 없기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심복 시녀를 시켜 오동원의 기척을 살피게 했다.
그러나 보고받을 게 딱히 없었다.
심완은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줄 아는 여인이 아니라서 많은 일은 한서화가 나서서 결정했다. 심완은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심교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심완이 아무 짓도 안 했는데도 한서화는 임신한 아내를 내버려두고 연속 보름이나 그녀의 방에 머물렀다는 말이 아닌가?
이 사실에 심교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몸이 좋지 않은 데다 한서화가 심완에게 푹 빠져 있는 시기라 심교는 화가 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매일 오동원에게 풍성한 음식을 보내주었고 사람을 시켜 색깔이 화려한 옷 몇 벌을 심완에게 지어 주었다.
너그러운 아내의 행위에 한서화는 아주 만족스러웠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그는 며칠에 한 번씩 주원으로 돌아와 아내의 곁에 머물렀다.
두 여인을 품에 안는 소원이 실현된 셈이었다. 얼굴이 같으나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여인을 안은 한서화는 마음과 육체적으로 큰 만족감을 느꼈다.
이렇게 평온한 나날이 삼 개월 지속되었다.
심교도 슬슬 입덧이 가라앉아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기운도 되찾았다.
바로 이 시기에 심완도 임신했다.
이 소식에 한서화 모자는 아주 기뻐했다. 심교는 화가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좋은 점이라면 심완이 임신한 뒤, 남편을 섬길 수 없게 되니 한서화도 곧바로 심교의 방에 돌아온 일이었다.
한서화가 잠자리를 가지고 싶어 할 때면 심교는 통방 하녀를 붙여 주었다.
심교는 드세고 샘이 많고 지배욕이 강하며 심보도 고약했으나 다른 여인들보다 총명한 점이 있었다. 그녀는 아이만큼은 해치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임신했을 때, 더더욱 아이를 해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심완을 잘 대해 줄 리는 없었다.
심교가 둘째를 낳고 사 개월 후, 심완도 순조롭게 아들을 낳았다.
그때부터 일 년에 다다른 심교의 인내도 끝이 나고 말았다.
심완이 낳은 아이는 서자이기에 만월연(滿月宴,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되면 여는 연회)을 크게 열지 않았다. 그리고 적차자의 만월연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한서화는 서자에게 만월연을 열어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심완이 아들을 낳은 지 한 달 되던 날.
심교가 먼저 한서화더러 심완을 보러 가라고 제안했다. 동생이 아이를 낳느라 고생했을 테니 남편의 관심이 필요할 때라고 했다.
심완이 임신한 뒤로 한서화는 오동원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어 그녀가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아내의 말을 듣고 그날 밤에 바로 오동원으로 갔다.
바로 그날에 심완의 처참한 운명이 정해졌다.
낮에 아이를 달래느라 지쳤는지 한서화가 갔을 때, 심완과 아이는 모두 잠을 자고 있었다.
오동원의 시녀들을 모두 내보낸 한서화는 침대 앞에 앉아 심완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따뜻한 광경이기도 했다.
아이를 갓 낳은 여인의 몸은 풍만했고 피부는 하얬다. 한서화는 침대 앞에 앉아 애틋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내를 아끼는 좋은 남편인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서화가 심완의 손을 잡았을 때,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는 심완의 손목에서 나타나지 말아야 할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순간 그는 안색이 시퍼레졌다.
그는 다급히 심완의 옷섶을 풀어 헤쳤다. 새하얀 피부에 빨간 흔적이 곳곳에 내려앉아 있었다. 잠자리 시에만 남을 수 있는 흔적이었다.
그러나 근래 한서화는 몇 달 동안이나 오동원에 오지 않았었다.
한서화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이 떨리기도 하고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화가 나기도 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침대에 누워 있는 심완의 머리채를 잡아서 끌어내리고는 그녀의 귀뺨을 갈겠다.
“천한 것!”
그리고 혼란스러운 장면이 펼쳐졌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시녀는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심완은 귀뺨을 맞은 뒤에, 해명할 기회도 없이 방탕한 여인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한서화는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내연남은 누구냐? 천한 것, 내연남은 누구야?!”
머리끄덩이가 잡힌 그녀의 귓가에 아들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화가 나서 일그러진 얼굴의 남편을 본 순간, 처음으로 두려움과 절망을 느꼈다.
“그런 적 없어요…….”
그러나 한서화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긴 일은 철석같이 믿었다. 심완은 모진 매를 맞았고 오동원은 하룻밤 사이에 한씨 저택에서 금지(禁地)가 되어버렸다.
심완의 시중을 든 두 시녀도 끌려가 심문을 당했지만 어떤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한서화는 홧김에 두 시녀를 때려죽이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 뒤로 오동원에는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다.
사정을 아는 두 시녀가 죽자 심완의 일은 오동원에 묻히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심완이 왜 하룻밤 사이에 남편의 총애를 잃었는지, 그날 밤에 한서화가 왜 화를 냈는지 알지 못했다.
그 뒤로 오동원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졌다.
“제 어머니는 욕심도 없고 꿍꿍이도 없는 사람이었으나 항상 화를 입었지요. 운명은 어머니에게 한 번도 은총을 베푼 적이 없었습니다.”
한경백의 목소리에는 서글픔이 묻어 있었다.
세상을 뜬 어머니에 대한 동정과 이 일을 꾸민 악인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한서화는 이 일이 망신스럽다고 여겨 한씨 저택에서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기에 어머니의 결백을 증명할 사람도 없었고요.”
점심때가 되자 햇살이 점차 뜨거워졌다.
눈부신 햇살이 창문에서 들어와 온화한 얼굴의 남자를 비추었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은 햇살의 따뜻함에 물들지 않은 듯, 여전히 차가웠다.
“그전에 얼굴에 났던 여드름과 마찬가지로 약물로 인한 현상일 뿐이었죠.”
한경백의 목소리는 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심교는 허점을 남기지 않고 단칼에 어머니를 나락에 떨어뜨렸습니다.”
“어머니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홀로 오동원에서 절 키우셨습니다. 매일 주방에서 적선하는 남은 밥을 먹으면서요…….”
한경백은 얼굴을 감쌌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제가 굶을까 걱정하신 어머니는 남은 밥조차 아까워서 드시지 못하셨습니다…… 전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전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요. 어머니가 큰 병에 걸리셔서…….”
어머니가 큰 병에 걸리자 일곱 살 난 아이는 두렵고 겁이 나 어찌할 줄 몰랐다.
그는 밥을 가져오는 어멈에게 부탁해 보았으나 그 어멈은 심교의 심복이라 그의 부탁을 아예 무시했다.
장기적으로 밥을 제대로 못 먹은 데다 병까지 도지자 심완은 더 이상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임종 직전, 그녀는 초췌한 얼굴로 아들에게 신신당부했다.
“말을 잘 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단다. 분노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아. 자유가 없는 한, 순종해야 해.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한경백은 숨을 깊게 들이쉰 다음 다시 시선을 들고 창밖의 찬란한 햇빛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눈에 담긴 감정을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떠나셨습니다. 죽어도 씻을 수 없는 굴욕적인 죄명과 함께요. 누구 하나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주는 사람이 없었지요. 어머니의 일생은 한서화를 만나면서 비극으로 변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도 사람들은 오동원의 일을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한서화가 사람들에게 엄령을 내렸거든요. 오동원과 그 여인에 대해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말라고요. ‘그 여인’은 제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하! 꽃 같은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면서 결국 ‘그 여인’이라는 말로 제 어머니를 지칭하다니요. 정말 우습고 처량한 일이지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한경백은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병으로 돌아가신 일은 알려야 했나 봅니다. 왕 어멈은 이 소식을 심교에게 알려줬고 심교는 한서화에게 전했죠.”
심완이 한씨 저택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서화는 그녀를 7년이나 냉대했지만, 그녀가 죽자 더는 화를 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7년 동안 심완의 ‘내연남’을 알아내지 못한 것도 화가 사그라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내연남이 진짜로 있었는지 의심이 들었다.
결국 한서화는 심완에게 간단한 장례식을 치러 주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일곱 살 된 한경백은 명의상 심교의 아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오동원에 머물렀다. 그의 어머니는 생전에 그에게 글을 가르치고 인간의 도리를 가르쳤다.
한경백은 어머니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한씨 가문은 규칙이 엄한 곳이었다. 심교도 그를 모질게 대하며 툭하면 그를 괴롭혔다.
“난 네 어미를 대신해 널 가르치는 거야.”
그녀는 항상 이 말을 핑계로 대며 한경백을 괴롭혔다. 일곱 살 된 아이는 매일 힘든 나날을 보냈다. 몸은 성한 데 없었다.
매일같이 매를 맞고 벌을 받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한경백은 그동안 어떻게 버텨냈는지 스스로도 놀라웠다. 어쩌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증오와 어머니의 결백을 밝혀주려는 신념 하나로 버텼을 것이다.
그는 한씨 가문이 멸망하는 것을 직접 지켜보고 싶었다.
“오늘 한씨 저택에서 아버지가 제 어머니에게 평처의 명분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이게 어머니가 바라셨던 소원이라고 하면서…….”
차갑게 코웃음을 치는 한경백의 시선에는 한기가 서렸다.